‘안다’와 ‘모른다’의 경계
제1실체와 제2실체, 즉 개별자와 보편자도 모두 알 수 없다고 하니 설결은 당혹감에 빠져 절규하고 맙니다. “그러면 외물이란 알 수 없다는 겁니까?” 선생님의 이야기가 옳다면, 우리는 외물을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에 빠진다는 절망을 표현한 겁니다. 왕예는 제자의 절망을 위로하기는커녕 그로기 상태에 빠진 설결에게 마지막 펀치를 가합니다. “내가 그것을 어떻게 알겠나!” 왕예는 불가지론자의 길마저 끊어버린 겁니다.
보통 철학자들이 많이 사용하는 딜레마(dilemma)가 두 가지 선택지를 모두 부정하는 것이고 나가르주나(Nagarjuna, 200년 전후)의 테트랄레마(tetralemma)가 네 가지 선택지를 모두 부정하는 것이었다면, 장자는 세 가지 선택지를 모두 부정하는 트릴레마(trilemma)의 전략을 쓴 것입니다.
어쨌든 이제 설결은 케이오 펀치를 맞아 링 위에 쓰러지기 직전입니다. 왕예에게 세 차례 펀치를 맞고 설결의 입은 피범벅이 되었습니다. 이가 빠질 정도의 강펀치였으니까요. 이름 ‘설결(齧缺)’도 ‘앞니가 빠졌다’는 뜻입니다. 장자의 문학적 위트가 번쩍이는 대목입니다. 그는 이미 입으로 하는 싸움에서 패해 이가 빠질 운명으로 캐스팅되었던 겁니다. 이가 빠진 사람이 어떻게 논쟁에 다시 참여할 수 있겠습니까? 말을 또박 또박 못하니 그는 그저 우스꽝스러워 보일 겁니다. 그럼 논쟁의 승자로 캐스팅된 스승의 이름 ‘왕예(王倪)’가 무슨 뜻인지 궁금해지죠. ‘왕과 같은 아이’나 ‘절정의 천진난만’이라는 의미입니다. ‘군주’라는 뜻의 ‘왕(王)’과 ‘어린이’라는 뜻의 ‘예(倪)’로 구성되어 있으니까요. 결국 왕예는 일체의 선입견과 허영에 지배되지 않는 순수한 마음, 권위에 아부하지 않고 자유로운 마음을 상징합니다.
동시 이야기를 제대로 맛보려면 우리는 지적 절망에 빠져 허우적대는 설결이 되어야 합니다. 제자가 링에 쓰러지기 직전에 스승은 마침내 그에게 구원의 손을 내밉니다. “그 문제에 대해 말이나 좀 해보세.” 스승의 태도는 지금까지 태도와는 확연히 다릅니다. 제자가 건넨 인식론적 문제에 대해 왕예는 미온적이거나 냉소적으로, 아니면 불친절하게 반응했습니다. “내가 그것을 어떻게 알겠나!” 그런데 이제 스승은 따뜻하고 긍정적이며 친절하게 변합니다. 먼저 트릴레마에 빠진 제자의 난처한 마음을 풀어주려 하죠. “도대체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게 사실 은 모르는 것이 아니라고 알 수 있겠는가? 우리가 모른다고 생각하는 게 사실 아는 것이 아니라고 알 수 있겠는가?” ‘안다’와 ‘모른다’의 경계선은 항상 모호하니 모른다고 절망할 일도 아니고 안다고 뻐길 필요도 없다는 겁니다. 이어서 얼핏 보기에 너무나 상식적이고 평범한 이야기. 그냥 쉽게 상대주의나 좁혀서는 문화상대주의로 요약될 만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합니다. 습지나 나무 위는 사람이 살기에 좋지 않지만, 미꾸라지는 습지를 좋아하고 원숭이는 나무 위를 편하게 여깁니다. 먹는 것만 보아도 사람은 고기를 먹고, 사슴은 풀을 먹고, 지네는 뱀을 달게 먹고, 올빼미는 쥐를 좋아하죠. 그것만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전설적인 미녀 모장이나 여희를 만나면, 물고기나 새 그리고 사슴은 보자마자 도망가버리지요.
왕예는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모든 존재가 동의하는 ‘올바른 ‘거주지’, ‘올바른 맛’ 그리고 ‘올바른 아름다움’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올바른 거주지’, ‘올바른 맛’ 그리고 ‘올바른 아름다움’라는 생각 자체가 관념 속에만 있을 뿐 실제 삶의 세계에서는 그런 것을 찾을 수는 없다는 이야기죠. 어떤 장소는 누군가에게는 쾌적하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끔찍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음식은 누군가에게 군침 돌게 하지만 다른 누군가는 역겹게 만들기도 하죠. 어떤 사람은 누군가에게 설렘을 주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불쾌함을 주기도 합니다. 그러니 어떤 외물에 불변하는 본질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터무니없습니다. 개똥도 약에 쓴다고 요약할 수 있는 장자의 통찰입니다.
이렇게 스승은 제자의 손을 잡고 트릴레마 바깥의 너른 세계, 추상적 사유 너머 생생한 삶의 세계로 인도합니다. 처음부터 가르침을 내렸다면, 자기 생각에 매몰된 제자는 스승의 말을 귀담아 듣지도 않았을 겁니다. 이 정도만 해도 왕예는 근사한 스승이라고 말하기에 충분합니다. 하지만 왕예는 근사함을 넘어 위대한 스승입니다. 왕예는 설결의 첫 번째 질문에 해답의 실마리만 던져 주고는 침묵합니다. 자신이 던졌던 두 번째 질문은,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질문은 이제 설결 스스로 풀어야 합니다. 사유는 스스로의 힘으로 밀어붙여야 하는 것이니까요.
인용
11. 자유로운 공동체를 꿈꾸며 / 13. 선과 악을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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