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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 만나기까지 - 비하르의 묵상 본문

고전/불경

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 만나기까지 - 비하르의 묵상

건방진방랑자 2022. 3. 16. 0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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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하르의 묵상

 

 

인간의 역사는 삶의 흐름이다.

우리 삶은 철학이나 과학이나 예술,

어느 한 가지 디시플린의 소산이 아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분과과학의 시각이

합쳐질 때만이 우리의 삶은 온전하게 이해될 수 있다.

 

 

불교는 희론(戱論)이 아니다. 그것은 이론의 유희가 아니다. 화살에 맞아 죽어가는 사람을 놓고 그 화살을 어떻게 뽑냐는 것에 관한 이론을 나열하고 앉아 있을 시간이 없다. 우선 화살을 뽑고 생명의 부식을 막아야 한다. 우리는 왜 싯달타가 연기(緣起)를 말했고 무아(無我)를 말했어야 했는지 항상 그 왜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연기의 실상은 무아론으로 귀착된다. 무아론의 궁극적 존재이유는 바로 무아행(無我行)에 있는 것이다. 무아행이란 자비(慈悲)의 실천이다. 무아의 연기적 실상 그것이 바로 공()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공은 자비가 없으면 의미가 없다. 공과 자비를 통합하는 것이 바로 연기요, 무아였던 것이다. 무아의 연기적 실상이 곧 공(, śūnya, suñña)이요, 무아의 무아행적 실천이 곧 자비인 것이다. 공과 자비, 이것을 다른 말로 우리는 지혜(智慧, prajñā)와 방편(方便, upāya)이라고 부른다. 이제 우리는 이런 것들을 이야기 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묵상중이었다. 비하르의 터덜거리는 기나긴 여로에 지친 탓이기도 했지만, 니련선하를 처음 바라보는 순간, 그 너머 검푸르게 널려진 시타림과 전정각산이 순간적으로 나에게 던진 압도적 느낌, 그 느낌속에서 보드가야의 대탑에 이르는, 길지도 않은 시간속에서 나는 이와같이 기나긴 생각들의 묵상속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우리말에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는 말이 있다. 나는 이 속언의 위대성을 내가 탄 토요타 쿠발리스의 앞좌석에서 벙거지모자를 푸욱 뒤집어 쓴 채 되씹고 있었다.

 

 

 보드가야시내의 정경. 티벹승려의 복장에서 치마같은 아랫도리가 샴탑이고 그 위에 걸친 것이 샌이다. 문안 오른쪽으로 티벹 노점상들이 보인다.

 

 

인용

목차

금강경

반야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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