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를 부정하는 다섯가지 생각
싯달타의 연기에 대한 신념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인간의 고통은 매우 리얼한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모든 고통은 반드시 합리적인 원인이 있다. 그러므로 인간이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 고통에 대한 약물의 처방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을 산출하고 있는 원인 그 자체를 제거해야 하는 것이다. 그 궁극적 원인은 인간의 무명(無明)이다. 그것은 인간이 스스로 자신을 무지에서 해방시켜야만 하는 고독한 혁명이다. 약물의 처방은 대체적으로 의원성질병(醫原性疾病, iatrogenic disease)을 산출시킨다. 우리나라의 질병의 절반 이상이 병원이나 치료, 의사와의 만남 그 자체에서 생기는 것이다. 의사나 병원으로부터 생기는 병을 우리는 의원성 질병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싯달타 이전의 대부분의 인간의 고통이 이 의원성 질병이었던 것이다. 아트만(ātman)에서 생기고, 브라흐만(Brahman) 신에서 생기고, 브라흐만 계급에서 생기고, 모든 훌륭한 잡신에 대한 제사로부터 생겼던 것이다. 싯달타 자신이 당대 사람들의 연기의 부정, 인과에 대한 부정적 생각들을 다음의 다섯 가지로 정리해놓고 있다【『中阿含經』, 業相應品, 「尼乾經」 第九, 『大正』 1-442∼5. 팔리어장경 『중니까야』 101, 「天臂經」(Devadaha-sutta), 『남전』 11上-279~297. 이 부분에 관하여 水野弘元, 『原始佛敎』 pp.62~5를 참고하였다.】. 연기의 부정은 곧 업보의 부정을 의미하는 것이다.
1) 자재화작인설(自在化作因說, issara-nimmāṇa-hetu-vāda)
이것은 신의설(神意說)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세계와 인간의 운명이 브라흐만이나 마헤슈바라(Maheśvara, 大自在天)와 같은 최고신의 창조라고 생각하며 모든 것이 신의 의지에 의하여 좌우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세계의 모든 것이 나의 의지나 노력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신의 의지대로 작동할 뿐이다. 따라서 이런 작인설을 믿는 사람은 자기의 인격완성을 위해 스스로 정진노력할 실제적 근거가 없어진다. 선악의 행위에 대한 행위자의 책임의식도 희박해질 것이다.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보수적 신앙인, 교회만 열심히 나가면 만사가 형통되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다고 믿는 대부분의 신앙인들이 암암리 범하고 있는 인과부정론이다.
2) 숙작인설(宿作因說, pubbe-kata-hetu-vāda)
우리가 이 현세에서 얻는 행ㆍ불행의 운명은 모두가 우리의 전생에서 행한 선ㆍ악업의 결과일 뿐이며, 따라서 인간의 일생의 운명은 전생의 업의 결과로서 태어날 때 이미 결정된 것이다. 따라서 이 생애에서의 모든 노력은 내세(來世)의 운명을 결정할 수는 있을지언정 현세의 운명에는 하등의 영향이 없다고 믿는 일종의 숙명론이다. 성명철학관을 열심히 찾아다니는 대부분의 우리나라 사람들이 암암리 범하고 있는 인과부정사상이다.
3) 결합인설(結合因說, saiigati-bhāva-hetu-vāda)
우리 인생은 모두가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 등의 요소가 결합되어 이루어진 것이다. 이 결합이 잘되었냐 못되었냐에 따라 우리 인생의 고락길흉(苦樂吉凶)의 운명이 결정된다. 이 결합상태는 태어날 때 이미 확정된 것이며, 우리의 생애를 통하여 일정불변하게 지속된다. 따라서 우리의 노력에 따라 우리의 운명을 개변할 수 있는 여지가 없다. 이것은 많은 유물론자ㆍ결정론자들이 범하는 숙명론의 오류이다.
4) 계급인설(階級因說, abhijāti-hetu-vāda)
인간은 태어날 때 이미 흑(黑)ㆍ청(靑)ㆍ적(赤)ㆍ황(黃)ㆍ백(白)ㆍ순백(純白)의 여섯 개의 계급으로 구별되어 있으며, 그 계급에 따라 인간의 성격ㆍ지혜ㆍ처지ㆍ가문 등이 다 결정되는 것이며, 후천적인 인간의 노력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마칼리 고살라(Makkhali Gosāla) 같은 사명파(邪命派: Ājīvika)의 주장이기도 했다. 많은 계급론자들, 그리고 많은 부유층의 사람들의 사고를 지배하는 오류이다.
5) 우연기회인설(偶然機會因說, diṭṭhadhamma-upakkama-hetu-vāda)
무인무연설(無因無緣說, adhicca-samuppāda-vāda)이라고도 불린다. 인생의 운명은 인과응보의 법칙에 지배되는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신의 은총이나 징벌에 의한 것도 아니다. 이 세상에는 착한 일만 하고 살아도 불행해지기만 하는 사람이 있으며, 악한 일만 하고 사는데도 행복하게 잘 사는 사람이 있으므로, 인간의 화복(禍福)이란 일정한 원인이나 이유가 있어 생기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우연한 기회로 생겨나는 제멋대로의 것에 불과하다. 많은 회의주의자나 기회주의자들, 불확정성만을 믿는 우연론자들이 범하는 인과부정의 생각이다.
연기가 말해주는 이 세계의 실상은 무아라는 이 한마디로 귀착된다. 무아란 모든 존재의 실체성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 세계에 대한 기술방식 그 자체를 변혁시키는 작업이었다. ‘이 세계에 대한 기술방식’이라는 말에서 일차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언어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언어는 모두 실체적인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 세계에 대한 기술방식의 변혁에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언어 그 자체에 대한 심각한 반성이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서구에서는 20세기에서나 와서 비로소 언어에 더한 반성이 일기 시작한,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1889~1951)과 같은 사람들이 제기한 문제의식을 이미 불타시대에 모두 제기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도 부차적인 문제로서 제기된 것이 아니라 불교적 세계관의 메인 스트림으로서 제기된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언어에 대한 반성은 서구근세철학에서 제기한 ‘인식론적 반성’(epistemological reflection)의 제문제를 수반한다. 즉 언어의 반성은, 우리의 인식(사물을 아는 방법)의 반성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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