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식’의 윤리학
따라서 데카르트라면 당연히 이성의 통제 아래 두려고 할 이 ‘욕망’이 스피노자에겐 바로 인간의 본질을 이루는 게 됩니다. 육체와 정신을 합일시키려는 힘으로서 코나투스가 인간의 본질이라고 말하는 셈이니 말입니다. 따라서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처럼 그것을 억누르거나 통제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니 억제하거나 통제하려는 것은 어쩌면 소용없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프로이트라면 이 점에 관해 훨씬 더 설득력 있는 얘기를 하고 있지요.
한편 스피노자는 이 욕망이라는 것이 타자에 의존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욕망 역시 하나의 ‘양태’로서 타자에 의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유한양태’라는 개념을 사용해야 합니다. 스피노자에게 유한하다는 것은 다른 것에 의존한다는 것과 동일합니다. 그리고 양태들 각각은 모두 유한한 양태(유한양태)입니다. 어떤 개체가 취하는 모습(양태)은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서, 다른 것에 의존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란 말입니다】. 이것을 제 식으로 해석하면, 인간의 욕망은 다른 인간과의 특정한 관계속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욕망이 이처럼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다는 말은 인간의 욕망이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데카르트처럼 이성에 의해 욕망을 통제하고 억압하는 게 아니라 인간관계를 바꿈으로써, 즉 욕망을 만들어내는 조건을 바꿈으로써 욕망 자체를 전환시키는 게 훨씬 더 현실적으로 중요한 게 됩니다. 인간 간의 관계를 바꿈으로써 욕망 자체를 바꾸려고 해야지, 욕망을 억누르려고 하면 아무것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윤리학적 계몽주의와는 전혀 상반되는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상과 같은 의미를 종합해 볼 때 스피노자의 ‘코나투스’란 일종의 ‘무의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를 거는 정신-육체의 합일 속에서 파악된 새로운 무의식 개념으로 이해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는 프로이트가 말하는 것과는 매우 다른 것으로서, 제 식으로 말하자면 일종의 생체무의식이리고 하고 싶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꿈에 대한 스피노자의 이야기도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그에 따르면 내가 꿈을 꾼다는 것은 내 의식과는 무관하게 내 육체와 정신의 상태 속에서 나오는 것이고, 내가 그것을 의식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내 안에서 작동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이후 프로이트의 이론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는 건 대개 다 알고 계실 겁니다. 이런 점에서 스피노자의 ‘윤리학’은 무의식 개념에 의해 인간의 행동과 정서, 욕망과 정신 등을 사고하려 했던 결코 근대적이지 않은 사고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이응도, 「군상」
이응노는 후기에 이처럼 하나의 흐름을 이루는 인간들의 군상을 주로 그렸다. 종종 대중(mass)이라는 말로 불리는 이런 군상은 어떤 때는 하나의 집합체를 이루기도 하고, 어떤 때는 그 집합체에서 벗어나는 흐름을, 그리하여 다른 집합체로 변환되는 흐름을 이루기도 한다. 무리[衆]지어 사는[生] 이 모든 것을 ‘중생’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사실 학교는 가족이든, 문학이든 철학이든, 모든 개체들은 둘 이상의 대중들로 만들어진 집합적 구성물이다. 그래서 독신자 같은 개인조차도 항상 이미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포함하고 있는 ‘군상’이고 ‘중생’이다.
이는 생물학적으로도 그렇다. 내 몸은 10조 개의 세포들로 이루어진 집합적 구성물이고, 시시각각 태어나고 죽으며 변하는 ‘중생’들의 집합체다. 스피노자는 모든 개체를 이러한 집합체로, ‘중생’으로 본다. 따라서 개인과 집단, 개체와 집합체 간의 대립은 스피노자의 사상에선 존재하지 않는다. 사진제공, (주)가나아트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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