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의 탈근대적 ‘이탈’
이상에서 본 것처럼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영향 아래 철학적 사고를 시작했지만, 데카르트가 열었던 근대적 문제설정에서 크게 벗어나고 있습니다. 데카르트가 명시적으로 보여주었던, 그리고 과학에 대한 신뢰 뒷편에 자리잡고 있던 근대적인 ‘반자연주의’에 대해 스피노자는 명확하게 반대의 깃발을 내건 셈입니다. 또한 주체를 대상에서 분리해내며, 그 ‘주체’를 사고와 판단의 중심으로, 나아가 세계의 중심으로 삼으려고 했던 ‘주체철학적인’ 문제설정에서 애시당초 벗어난다는 것도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이럼으로써 주체-객체(대상)의 일치라는 문제 자체가 스피노자에겐 제기되지 않으며, 나아가 인식이 진리를 제공하리라는 근대철학적 신념과 달리 차라리 진리가 인식에 앞서, 판단에 앞서 존재해야 한다는 역설을 지적함으로써 근대적 인식론에서 완전히 이탈합니다.
나아가 인간의 육체적 힘과 정신적 힘을 통일시키는 ‘코나투스’란 개념을 통해, 그리하여 의식으로 파악되지 않는 무의식적 힘을 통해 인간의 삶과 욕망 등 ‘윤리학’의 문제를 파악합니다. 이런 독특한 방식은 ‘나’란 곧 ‘생각하는 나’, 즉 의식과 동일시되는 ‘나’를 뜻하던 데카르트의 사고와는 매우 다른 것이며, 이후 보겠지만 근대적 사고 전반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걸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것에 비한다면, 스피노자가 욕망이나 정념에 대한 통제를 뜻하는 윤리학적 계몽주의와 다른 길을 간다는 것은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스피노자는 근대철학이 낳은 근대철학 최초의 ‘이탈자’요 반항자인 셈입니다. 즉 스피노자는 근대 최초의 ‘탈근대인’이었던 것입니다. 이같은 특징은 이후 다른 근대철학자들의 사상을 살펴보면 더욱 두드러지게 보일 것입니다.
이후 스피노자가 근대철학의 중심에 들어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독창적이고 탁월한 사상에도 불구하고 그는 근대철학자들로부터 이른바 ‘죽은 개’ 취급을 당합니다. 그의 철학이 갖는 탈근대적 성격을 생각해 볼 때, 더구나 그게 근대철학의 독립이 성취된 직후의 일이었음을 생각해 볼 때, 어찌 보면 이는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네그리의 말마따나 스피노자는 근대적 문제설정 안에서는 결코 이해될 수 없는 하나의 ‘변종’(anomalie)이었던 것입니다(네그리, 『야성적 변종』L‘Anomalie sauvage).
물론 나중에 스피노자주의자임을 자처하고 나선 사람들이 있어서 스피노자가 다시 철학의 중심으로 진입하기는 합니다. 그건 특히 셀링이나 헤겔에 의해 그렇게 되는데, 이를 위해 스피노자의 철학은 근대적인 형태로 전환되고 자신이 가장 반대했던 목적론으로 바뀌는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예컨대 실체와 속성이란 개념은 주체/객체의 동일성을 입증하는 개념적 수단이 되고, 실체와 양태는 절대정신과 그것의 외화(소외)라는 개념으로 변형됩니다(이에 대해선 헤겔을 다루면서 다시 언급하겠습니다).
결국 스피노자가 근대철학의 중심으로 들어가기 위해선 자신이 처음부터 분명히 벗어났던 근대적 철학으로 변형됨으로써 가능했던 것입니다. 반면 근대적 사고방식에 대한 비판 속에서 등장한 탈근대적 철학자들이 스피노자에게서 그 중요한 자원을 발견하는 것은 이런 점에서 보면 오히려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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