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적 윤리학 확립
셋째, 근대적 윤리학(도덕철학)의 확립입니다. 칸트가 윤리학 혹은 도덕철학의 문제를 다룬 책은 알다시피 『실천이성 비판』입니다. 인간의 의지와 행동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이 책에서, 칸트가 던지는 도덕철학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이것입니다. ― “인간의 의지(및 행동)는 이성의 힘만으로 규제될 수 있는가?” 바꿔 말하면 인간의 의지와 행동을 규제하는 원리가 인간의 이성 안에 있을 수 있는가, 모든 인간이 따라야 할 보편적인 원리가 있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앞서 보았듯이 이는 근대적 윤리학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입니다. 인간의 이성이 신에게서 독립해 존재하고, 인식하며, 행동할 수 있는가가 근대철학의 독립을 확보하기 위한 질문이었으니 말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의지를 규제할 보편적인 원리가 이성의 내부에 있다는 것은 인간 이성의 실천적 자율성이 원리적으로 확보될 수 있음을 뜻하는 셈입니다. 이는 어쩌면 이성이 확보할 수 있는 ‘최종적’ 자율성인지도 모릅니다.
이를 위해 칸트는 모든 인간에게 해당되는 ‘보편타당한 윤리원칙’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그는 여기서 유명한 말을 하지요. “너는 언제나 네 의지의 준칙이 보편적인 입법원리로서 타당하게 행동하라”라고 말입니다. 즉 어떤 행동을 하려고 하는 너의 의지가 법으로 제정되어도 좋을 만큼 보편적인 거라면 그것대로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는 법적인 보편적 형식을 취한 규칙을 선악의 잣대로 삼으라는 말이고, 실질적으로는 법에 정한 바를 선이라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선과 법에 관한 통념과 매우 다른 관념을 발견하게 됩니다. 통상 법은 그것이 선한 것이기 때문에 보편성을 갖고, 그래서 법이 되었다고 우리는 생각하지요. 즉 선이야말로 법의 기초요 근거라고 생각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칸트가 보기엔 그런 선은 입장에 따라 얼마든지 다를 수 있는 것이고, 따라서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보편성을 갖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칸트는 계율을 통해 선을 정의하는 유대적 기독교적 전통으로 돌아갑니다. 계율을 지키는 것이 선이듯이, 법으로 정한 것을 지키는 것이 선이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 선이 법의 기초인 게 아니라, 반대로 법이 선의 기초라는 겁니다.
이런 원칙에 서서, 칸트는 ‘자유’의 개념을 새로이 정의합니다. 칸트에 의하면 의지의 자유, 행동의 자유란 다음과 같은 원칙에 따르는 것입니다 ― “나는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해야 하기 때문에.” 즉 보편적인 도덕원칙이란, 본질적으로 내가 어떻게 “해야 한다”는 규정입니다. 칸트는 거기에 따라 사는 것만이 선이며, 올바른 윤리적 삶이고, 인간으로서 자신의 자율성과 자존을 지키는 길이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따라서 자유란 “해야 한다”는 원칙, 의무에 따라 사는 것과 동일한 뜻을 갖습니다.
이런 점에서 칸트의 윤리학은 극도로 계몽주의적인 성격을 갖습니다. 인간 개개인이 갖는 욕망이나 의지는 ‘보편적인 입법원리’가 될 수 있는 한에서만 받아들여지고, 그렇지 않은 것은 모두 자율성과 자존을 위해 억제되고 통제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입법원리에서 어긋나는 의지나 욕망, 법에서 벗어나는 행동은 인간의 자율성을 포기한, 한마디로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이 되는 셈입니다. 따라서 그런 원리에 따르도록 훈련되지 못한 대중은 일깨워지고 계몽되어서, 이 도덕적 원리에 따라 살도록 새로이 ‘갱생’해야 하는 것입니다. 계몽주의 시기 도덕철학은 이런 실질적인 의미를 갖고 있었던 셈입니다.
보다시피 칸트의 도덕철학에서 두드러진 것은 ‘법’ 적인 개념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보편적인 도덕원칙도 입법원리로 정의되었고, 자유나 선 역시 도덕법칙에 의해 정의되었습니다. 이는 공화주의자로서 프랑스혁명에 고무되었던 칸트로선 당연한 것처럼 보입니다. 이는 혈연, 무력, 종교가 지배하던 중세와 달리 법을 통해 지배를 확립하려 했던 부르주아지의 관점을 보여주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신’은 어떻게 되는가? 칸트는 『순수이성 비판』에서 신을 증명하려는 모든 시도가 성공하지 못했고, 진리를 추구하는 순수이성의 영역에서 신은 증명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로써 데카르트도 쫓아내지 못했던 신을 이론적인 이성의 영역에서 쫓아냅니다.
실천적인 이성의 영역에서도 가장 근본적인 원리를 보편적인 도덕원칙이 차지함으로써 신이 개념적으로 들어설 자리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을 보편적 가치에 따라 행동하게 하는 데 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도덕철학적인 필요에 의해 실천이성이 신의 존재를 ‘요청’한다는 것이지요. 이런 점에서 “도덕행위란 신에 대한 실천적 긍정”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신의 존재가 실천이성의 요청에 의한 것이란 점입니다. 이성의 필요에 의해 신의 존재가 받아들여진다는 것은, 이성이란 신의 피조물이요 그것을 인식하는 수단이었던 시대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전환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과감하게 말하자면 신이 이제는 이성의 필요에 의해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이고, 신이 이제는 이성에 의해 포섭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종교 자체가 근대적인 윤리학을 위해 복무하는 도덕철학이 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칸트는 근대적 윤리학의 확립자요 완성자임에 틀림없으며, 칸트철학은 ‘근대철학의 승리’를 선언하는 것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 세 개의 세계지도
그런데 격자는 모두 저렇게 평행한 직선들이 직각으로 교차하는 것만 있을까? 칸트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는 오직 유클리드 기하학만이 유일한 기하학이던 시대에 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19세기에 이르면 다른 종류의 공간을 구성하는 다른 기하학들이 생겨난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사는 지구 자체로 인해 현실성을 가질 수 있었다. 예컨대 지구의 표면은 구(球)다. 그래서 경선은 모두 평행하지만, 그 평행선은 모두 구면을 따라 휘어져서 남극과 북극에서 만나면서, 사각형이 아니라 거대한 삼각형을 이룬다. 삼각형 내각의 합은 유클리드 기하학에선 180도지만, 여기선 180도보다 항상 크고 가지각색이다. 따라서 지구 위에 격자를 만들 경우, 그 격자를 어떤 관점에서 어떻게 떨치는가에 따라 지구는 다른 모습으로 그려진다. 두 개의 지도 가운데 위의 것은 직교하는 격자에 따라 그려진 지도인데, 양극으로 가까이 감에 따라 길이와 면적이 커진다. 그린랜드 섬이 유럽대륙과 맞먹을 정도로 커 보이는 것은 그래서다. 반면 아래 지도는 형태나 크기를 정확히 그리기 위해 격자를 구 위에 그려진 것처럼 구부렸다. 하지만 그걸 평면에 옮기다 보니 지구가 갈래갈래 찢어져 버리고 말았다. 그렇다면 이처럼 유일한 보편적인 ‘격자’가 사라진 시대에, 칸트가 꿈꾸었던 보편적 진리는 과연 가능한 것일까? 가능하다면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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