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늘
진리에 관한 문제
이로써 칸트철학은 근대적 문제설정의 딜레마를 해소하고 위기의 요인을 근본적으로 제거한 듯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생각보다 훨씬 어렵고 뿌리깊은 것이었습니다. 새로운 해결은 새로운 방식으로 문제를 생성시키거나 ‘전이’시킵니다. 칸트철학 자체 내에는 이미 새로운 위기의 요소들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앞서처럼 세 가지 차원에서 간단하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진리에 관한 문제입니다. 이는 진리를 주관화하는 전략과 관련된 것입니다. 칸트는 현상이란 우리가 지각하고 인식한 것이고, 따라서 주관 안에 있는 것이라고 하지요. 대신 주관 밖에는 ‘사물 자체’를 남겨두고 말입니다. 사물 자체는 알 수 없는 것으로 남겨두고 우리의 인식을, 진리를 단지 현상에 관련된 것으로 제한합니다.
그럼 우리가 인식하는 ‘현상’과 ‘사물 자체’는 어떤 관계를 갖는가? 물론 칸트는 그건 아무도 모른다고 합니다(이게 바로 근대철학의 딜레마지요!). 따라서 현상에 대한 지식은 사물 자체와 어떤 연관을 갖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진리란 오직 주관의 형식으로만 정의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진리라고 간주하는 지식(예컨대 선험적 종합판단)은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가? 그것은 경험하기 이전부터 “누구든 오인하는” 선험적 허위, 선험적 허구일 가능성은 없는가?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선험적 허위’라면 그것이 진리로 간주되어도 좋은가? 그건 마치 고대에는 모든 사람이 해가 도는 것을 옳다고 생각했으니 천동설이 진리라고 말하는 것과 유사하지 않은가?
이 문제에 적절한 예를 우리는 앞서 칸트의 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예컨대 삼각형의 세 내각의 합은 180도라는 명제가 그렇습니다. 이건 칸트에 따르면 선험적 종합판단입니다. 즉 선험적으로 타당한 진리입니다. 그러나 지구 위에서 그려지는 어떤 삼각형도 세 내각의 합은 180도보다 큽니다. 지구의를 생각해 봅시다. 여기 적도와 두 개의 경선으로 이루어진 삼각형이 있습니다. 적도와 경도는 직각으로 만나지요? 그렇다면 삼각형의 내각 A의 합은 180도(90도+90도)보다 북극에서 만나는 각만큼 큽니다. 따라서 칸트가 선험적 진리라고 생각했던 명제가 사실은 지구 위에선 맞지 않는 거짓인 것입니다!
예전에는 주체와 대상 간에 일치를 확인할 수 없다는 문제로 인해 진리의 개념이 딜레마에 빠지고 위기에 처했다면, 이제는 사물 자체와 현상, 사물 자체와 선험적 주체 간에서 또 다시 딜레마에 빠지고 위기에 처하는 것입니다.
선험적 주체 문제
둘째, 선험적 주체에 관한 문제입니다. 흔히 지적되는 순수이성의 추상성이나 비역사성은 일단 그냥 넘어갑시다(이는 피히테나 헤겔, 뒤에는 딜타이 등에 의해 집중적으로 지적됩니다). 근본적인 난점은 ‘선험적 형식’ 자체에 있습니다.
먼저, 지성의 선험적 형식인 범주를 봅시다. 칸트의 12개 범주는 사실 아리스토텔레스의 10개 범주를 약간 변형시킨 것인데, 여기서도 볼 수 있듯이 선험적 형식인 범주는 철학자마다 다르게 설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범주가 모든 판단의 전제가 되는 ’선험적 형식’인가에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범주 이전에 범주를 나누는 어떤 기준이 있어야 하며, 그게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는 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에 따라 칸트와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는 다르게 설정된 것이라고 해야겠지요.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표 | 칸트의 범주표 | ||
실체 | 단일성 | ]양 | |
다수성 | |||
성질 | |||
전체성 | |||
분량 | |||
실재성 | ]성질 | ||
관계 | |||
부정성 | |||
장소 | |||
제한성 | |||
실체/속성 | ]관계 | ||
시간 | |||
원인/결과 | |||
위치 | |||
상호작용 | |||
양상 | |||
가능/불가능 | ]양상 | ||
능동 | |||
현존/부재 | |||
수동 | |||
필연성/우연성 |
다음으로 선험적 감성형식인 ‘시간과 공간’입니다. 사실 칸트가 이런 주장을 할 수 있었던 건 뉴턴의 물리학 덕분이었습니다. 칸트의 철학은 뉴턴의 물리학에 기초하고 있었고, 그걸 통해 (물리학을 포함한) 과학의 기초를 확고히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예전에 데카르트가 갈릴레이에 기초해서, 그것을 확고히 하려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그런데 알다시피 뉴턴 물리학에서 시간과 공간은 절대시간이요 절대 공간입니다. 마치 다양한 물체의 길이를 재는 자의 눈금처럼 그 자체는 불변적이고 절대적이며, 다른 것의 변화를 재는 기준이 바로 시간과 공간입니다. 그것은 경험에 의해 달라지거나 변화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시겠지만 이런 이론은 20세기 들어와서는 유지되지 못합니다. 아인슈타인은 상대성이론으로 그것을 해체한 장본인인데, 그에 따르면 빛의 속도에 가까울 정도로 빨리 운동하는 비행체 안에서는 시간이 천천히 갑니다. 그래서 그런 우주선을 타고 오랫동안 여행한 비행사는 지구에 사는 그의 아들보다 젊은 모습으로 우주선에서 내릴 수도 있다는 겁니다. 시간이란 이처럼 조건에 따라 다르게 ‘경험되는(!)’것입니다. 공간도 그렇습니다. 그것은 균질적으로 텅 비어 있는 게 아니라, 중력이 강한 곳에서는 구부러져 있다고 합니다. 즉 중력장에 의해 다르게 만들어지고 ‘경험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시간과 공간을 선험적 형식이라고 하기는 불가능해집니다. 이를 알기 위해서는 칸트 사후 100여 년이 필요했지만 말입니다. 어쨌거나 근대적 주체에 기초한 칸트의 선험적 주체 역시 또 다른 위기의 요소를 이미 자체 안에 포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순수이성과 실천이성의 분리 문제
셋째, 순수이성과 실천이성의 분리 문제입니다. 칸트에게 실천적인 판단을 하는 이성은 이론적인 판단을 하는 이성과 전혀 별개의 것입니다. 심지어 이론적인 이성의 영역에선 신을 쫓아내도, 실천이성의 영역에선 필요에 의해 다시 불러들이기도 할 만큼 따로 놉니다. 여기서 순수이성은 ‘선험적 형식’이라는 이유로, 진리를 기초지우는 확실한 근거로서 정당화됩니다. 그러나 실천이성은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가? 다시 말해 ‘보편입법의 원리’라는 도덕철학은 무엇에 의해 정당화될 수 있는가?
여기서 다시 진리를 끌어들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실천이성은 순수이성과 전혀 별개의 영역이기 때문이고, 칸트에게 행동이나 의지는 진리와 전혀 별개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보편적 윤리학의 근거는 무엇인가? 실천이성 자신이 스스로를 근거지웁니다. 바로 여기서 칸트의 비판철학은 ‘독단론’으로 전환됩니다. 개인들의 의지와 욕망을 오직 보편적 입법원리에 끼워맞추려는 독단론이, 자유를 해야 할 것(의무)에 따르는 것으로 정의하는 독단론이, 그리고 선(善)을 (자신이 설정한) 도덕 법칙에 의해 정의하는 독단론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 / 들로네의 「예펠탑」
사태는 점입가경, 혹은 ‘갈수록 태산’이었다. 여러 가지 격자가 있을 수 있다는 것으로 인해 ‘선험적 주관’의 격자로 진리의 기초를 삼으려던 칸트의 구상이 깨진 데 이어, 이제는 하나의 시점에서 여러 개의 격자를 뒤섞고 병렬하려는 시도가 나타났다.
위의 그림은 피카소(Pablo Picasso)의 「아비뇽의 처녀들」(Les Demoiselles d'Avignon)이다. 1906년 「아비뇽의 처녀들」이란 그림에서 투시법을 완전히 깨버리고, 전혀 다른 각도에서 본 얼굴을 뒤섞어 아가씨의 얼굴을 그리고, 등짝 위에 앞 얼굴이 달린 몸뚱이를 그렸다. 이른바 ‘입체파’가 그 해에 탄생한다.
아래의 그림은 들로네(Robert Delaunay)의 「에펠탑」(La Tour d'Eiffel)이다. 이 그림에서 들로네 역시 여러 각도에서 본 에펠탑의 모습을 하나의 시점에서 본 것처럼 섞어서 그렸다. 이럼으로써 투시법은 시각예술에 대한 지배를 포기해야 했고, 투시법이란 코드에서 벗어난 붓은 새로운 형상, 새로운 이미지를 다양한 방향에서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재현’이라는 오래된 강박증에서도 벗어났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예술에서 ‘진리’를 찾으려는 시도가 쉽게 사라지진 않았다. 아직도 주위에서 그런 간절한 노력의 잔영을 발견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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