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철학을 정점에 올리다
눈치 빠른 분들은 이미 짐작하고 계시겠지만, 이러한 헤겔의 사상은 스피노자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입니다. 우선 셸링의 자연철학 자체가 그렇습니다. 자연을 정신으로 간주하는 관점은 자연을 실체의 양태로 간주하는 스피노자의 관점에서 유추한 것입니다. 헤겔에게 절대자(절대정신)란 스피노자식으로 표현하면 ‘실체’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외화되어 만들어내는 자연, 사회, 역사는 스피노자 개념에서 ‘양태’에 해당되지요. 한마디로 말하면 스피노자의 실체/양태 개념을 주체와 객체의 통일성을 이루어가는 목적론적 과정에 적용한 것입니다.
다른 한편 지식과 진리에 대한 변증법 역시 그렇습니다. 헤겔은 진리에 대한 판단에 앞서 진리의 기준을 미리 갖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스피노자의 명제를 받아들여, 의식이 자기 내부에 진리의 기준을 미리 갖고 있어야 한다는 명제를 제시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절대정신의 자기의식이란 개념으로 전환시킵니다. 따라서 이제 진리는 절대정신이 자기의식에 도달하는 과정과 동일한 것이 됩니다. 이래서인지 셸링은 물론 헤겔도 스스로 스피노자주의자로 자처했습니다.
사실 이러한 ‘적용’은 스피노자의 근본적 문제의식에서 벗어나는 ‘변형’입니다. 스피노자가 근원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만든다고 보아 거부했던 주체와 객체라는 근대적 범주의 통일과 화해를 위해 실체와 양태란 개념이 복무하게 된 셈입니다. 연장과 사유라는 속성의 일치란 명제 역시 주체와 대상의 일치란 명제로 전환됩니다. 나아가 헤겔은 이를 ‘절대정신의 자기실현’이라는 목적론적 과정에 포섭시켰는데, 이러한 목적론은 스피노자가 『에티카』에서 명시적으로 비판하며 거부했던 것입니다. 진리의 문제도 그렇습니다. 주체와 대상을 분할한 근대철학이 이 양자를 통일시킬 수 있는 방도를 마련하는 데 스피노자의 명제가 변형되어 사용된 것입니다.
이렇게 스피노자의 사상은 근대적 문제설정에 포섭되어 근대적 딜레마의 해결에 봉사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한마디로 말해 근대화된 스피노자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근대적 문제설정에서 처음부터 빗겨나 있었던 스피노자가 예전에는 이해되지 못하고 외면당했다면(‘죽은 개’ 취급을 당했지요), 절정에 오른 근대철학자들에 의해 비로소 주목받고 그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셈입니다. 그러나 이는 스피노자의 사상이 근대적 문제설정 안에 포섭되지 않는 한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이었기에, ‘근대화’라는 비용을 치러야 했던 것입니다.
헤겔철학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는 칸트에 의해 다시 부흥의 기치를 높이 든 근대철학을 정점에 올려놓았다는 것입니다.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저도 그러한 평가에 동의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헤겔철학을 ‘절정에 선 근대철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것은 또한 근대철학의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한 매우 정교하고 복잡한 개념과 장치 들을 개발해 냈습니다. 특히 지식과 진리의 변증법은, 그것이 목적론적 과정으로서 간주되고 있다는 점에선 근본적인 난점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식의 역사적 정정과정 속에서 진리를 파악함으로써 진리에 대한 이전의 독단주의를 비판하는 적극적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 다비드, 나폴레옹과 조세핀의 대관식,
19세기 대표적인 궁정화가였던 다비드(Jacques Louis David)는 나폴레옹이 부인과 함께 황제로 등극하는 대관식(1804년 12월) 장면을 저렇게 멋드러지게 그렸다. 아마도 젊어서 한때 프랑스혁명에 열광했기 때문일 테지만, 그리고 나폴레옹이 프랑스혁명을 독일에, 아니 유럽에 전파하는 역할을 했다고 보아서 그랬을 테지만, 헤겔 역시 나폴레옹이야말로 이성이 외화되어 발전해 가는 역사의 종점에 있는 인물이라고 보았다. 헤겔에게 나폴레옹은 일종의 절대정신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살던 프로이센 역시 동일한 역사 안에 있다는 점에서 역사의 종점이요, 문명과 이성의 절대적 발전의 목적이라고 보았다. 여기서 철학은 국가와 하나가 된다. 국가철학, 철학적 국가, 누구나 자기가 사는 시대를 이전의 어떤 시대보다 발전되고 진화된 시대라고 보는 것은, 자기 자신의 모습을 모든 것에 대한 판단의 잣대로 삼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특징이지만, 인류의 모든 것을 다 싸안고자 했던 거대한 역사철학을 구성해낸 헤겔은 그런 식의 발상을 조금도 쑥스러워 하지 않고 철학화해서 아무런 거리낌 없이 끝까지 밀고 간다. 남은 일은 이제 역사가 거기서 멈춰주는 일이었다. “오, 시간이여, 이대로 멈추어다오! …… 어, 멈춰, 멈춰 달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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