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맑스 : 역사유물론과 근대철학
맑스의 ‘유물론 비판’
맑스가 관념론을 비판했다는 사실은, 그가 유물론자였다는 사실만큼이나 유명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유물론자’ 맑스가 사실은 유물론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비판을 수행했다는 주장을 한다면 어떨까요?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맑스가 근대철학과 근본적인 구획선을 그으면서 달라지는 출발점이라고 한다면 어떨까요?
맑스는 ‘실천’이란 개념을 철학에 끌어들인 장본인입니다. 또한 근대 철학을 해체하는 데 맑스가 사용하는 결정적인 개념 역시 ‘실천’입니다. 다시 말해 실천이란 개념을 통해 맑스는 근대철학의 문제설정을 넘어섭니다.
▲ 빈약한 부엌
브뤼겔(Brueghel/Bruegel)의 그림 「빈약한 부엌」(Die magere Kiche)이다. 브뤼겔은 장애인이나 아이들의 모습을 많이 그렸다. 그런데 정신없는 부엌을 그린 이 그림에서 젖먹는 아이, 식탁 앞에서 무언가를 들고 먹는 아이는 전혀 ‘조명발’을 받지 못하고 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다른 많은 인물과 소품들에 가려 잘 보이지도 않는다. 사진을 찍으면 언제나 어린이를 한가운데 앉히는 우리의 모습과는 아주 다른 태도다.
그러나 브뤼겔만 그랬던 건 아니다. 17세기 이전에는 아기 예수를 제외하고는 아이들이 그림의 중심 대상이 된 적이 없었다. 아이들을 위한 그림? 그런 건 없었다. 아니 어린이나 소년에 대한 특별한 관념 자체기 없었다. 어린아이란 그저 ‘조그만 어른’에 불과했다. 그래서 로미오나 줄리엣 같은 열 살 갓 넘은 ‘아이’들이 죽자사자 ‘연애’를 했고, 르네상스의 유명한 휴머니스트 에라스무스는 ‘아이’들을 위한 예절서에서 좋은 창녀 고르는 법을 떡 하니 써 놓았다. 심지어 『수상록』으로 유명한 몽테뉴는 자기 아이들이 몇 명인지, 그 중 몇 명이 죽었는지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했다. 아이들은 7~8세가 되면 다른 집, 가령 장인(匠人)의 집에 일을 배우러 보내졌고, 거기서 나이 많은 ‘사형’들과 섞여 똑같이 일하고, 똑같이 음담을 나누고, 여자를 사러 가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주장에 대해 당장 반박할 분이 있을 것 같습니다. “실천의 개념을 철학에 끌어들인 게 어째서 맑스인가?”라고 말입니다. “바로 앞장에서 나온 칸트는 『실천이성 비판』이란 제목으로 철학책을 쓰지 않았는가? 근대의 윤리학이란 바로 근대인들의 실천을 다루는 학문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이런 반박 말입니다.
그러나 근대철학자들이 사용하고 있는 ‘실천’이란 말은 인간의 행동을 다루는 영역이란 의미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칸트의 『실천이성 비판』도, ‘윤리학’이란 이름도 마찬가지지요. 실천이란 말은 다만 서술적인 의미로, 그것도 윤리학이란 영역에 제한되어서 사용되고 있을 뿐입니다. 이런 말을 ‘개념’이라고 하긴 아직 곤란합니다. 개념이란 대상을 파악하거나, 그 파악 방법과 관련해 다른 개념들을 조직해내고, 그것들과 긴밀히 결합되어 있는 특별한 용어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데카르트의 ‘본유관념’이나 ‘연장’ ‘사유’ 같은 것이 그렇습니다. 칸트의 ‘선험적 경험적’ 같은 말들뿐만 아니라 ‘감성’이니 ‘범주’니 하는 말들이 그렇고, 헤겔의 ‘모순’ ‘본질’ ‘생성’ 등도 그렇습니다. 이처럼 특별한 의미와 기능을 갖는 것이라면 ‘분명한’(clare) ‘뚜렷한’(distincte)처럼 평범한 형용사도 개념이 되지만(데카르트 철학에서), 심오해 보이는 어려운 단어도 그런 특징이 없다면 개념이 되지 않습니다. 맑스가 실천을 개념으로 도입한다는 것은 그 말에 바로 이런 기능과 의미를 부여한다는 뜻입니다.
맑스가 철학적 개념으로 실천이라는 개념을 본격적으로 사용한 저작은 『독일이데올로기』와 그 책에 부록으로 실려 출판된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였습니다. 여기서 맑스는 “포이어바흐 비판”이라는 형식으로 ‘실천’에 관한 몇 개의 핵심적인 명제를 제출합니다. 그것을 크게 네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지요.
▲ 오후의 식사
프랑수아 부셰(François Boucher)의 그림 「오후의 식사」(The afternoon meal)다.
‘어린이’라는 말에 ‘순진무구한 존재’ 하지만 ‘약하고 여리기에 어른들의 더러운 세계로부터 보호되어야 할 존재’라는 생각이 따라다니게 된 것은, 어린이가 어른과 다른 존재라는 구별이 발생한 17세기 이후의 일이다. 그리고 어린이를 위한 옷, 어린이를 위한 놀이, 어린이를 위한 방 등등이 따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그보다도 훨씬 나중의 일이며, 크리스마스가 지금처럼 어린이를 위한 축제로 만들어진 것도 19세기 중반의 일이다(물론 크리스마스가 이렇게 된 데는 상인들의 ‘공작’이 개재해 있지만), 어린이가 일하고 돈을 버는 경제적 대상이 아니라, 입 맞추고 안고 싶은 감정적 대상이 된 것은 이런 변화와 나란히 발생했다.
이후 어린이는 가정의 새로운 중심이 되었다. 근대는 어린이의 시대가 된 것이다. 부세의 그림에서 아이를 바라보는 부모의 눈에는 애정과 사랑이 가득하다. 이와 나란히 부르주아의 가족 안에서는 새로운 욕망, 즉 가족주의가 나타나고 확산되었다. 사랑과 결혼뿐만 아니라 모든 사적 생활을 가정 안에서 ‘해결’하고, 가족적인 내밀성을 무엇보다 먼저 보호되어야 할 프라이버시로 뒤바꾸어 버리고, “모든 것을 가족을 위하여” 바치려는 욕망이, “흠, 홈, 스위트 홈”이라는 구호는 이런 새로운 욕망을 요약해서 표현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