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 연구의 이유
다른 한편 언어가 내장하고 있는 이런 특징은, 각각의 언어마다 상이합니다. 다시 말해 사용하는 언어에 따라 사고할 수 있는 것도 달라지고, ‘확실한 것’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것은 번역을 할 때 뚜렷이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의사 지바고」로 유명한 파스테르나크의 작품 가운데 My sister life라는 시집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말로 직역하면 나의 누이인 생이 되고, 약간 멋을 부려 번역하면 ‘삶이여, 나의 누이여’가 됩니다.
그런데 이 시집을 체코어로 번역을 하려 하자마자 문제가 생깁니다. 러시아어에서 life의 성은 여성입니다. 그러니 ‘My sister’와 동격이 될 수 있었죠. 그러나 체코어에서는 life가 남성명사랍니다. 그러니 My siste와 동격이 되는 건 문법상 불가능합니다. 굳이 옮기려면 My brother life로 번역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애초의 시집 분위기와는 전혀 달라질 것이 분명합니다. 여성으로 표현되는 삶에 대한 글과 남성으로 표현되는 삶에 대한 글은 최소한 누이와 형제가 다른 만큼은 다를 게 틀림없으니 말입니다.
만약 작문 시험에서 주어진 제목이 ‘삶이여, 나의 누이여’라면, 당연히 ‘삶이여, 나의 형제여’란 제목이 나왔을 때와 글의 내용이나 분위기가 전혀 달라질 것입니다. 첫 번째 것에서는 삶이 가지고 있는 여성적인 이미지, 여성적인 메타포를 주로 사용하겠지만, 두 번째 것에서는 삶이 가진 역동적이고 박력있는 남성적인 이미지를 사용해 써야겠지요. 마찬가지로, 일상적으로 삶을 남성으로 표현하는 사람들(체코인)과 여성으로 표현하는 사람들(러시아인)이 다르게 사고하리라는 것은 쉽게 추측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언어마다 사고를 제한하는 나름의 규칙이 서로 다르게 내장되어 있다면, 각각의 언어는 세상을 나름대로 파악하는 방법이기도 하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사고방법은 이전의 사람들이 세상을 보던 사고방식이 언어에 새겨진 채 남아 있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어쨌든, 어차피 언어에 새겨진 규칙과 사고법에 따라 우리가 사고할 수밖에 없다면, 오히려 언어가 확실한 것을 제공해 주니 주지 못하니 하는 것은 부차적인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차라리 사람들이 어떻게 사고하고 판단하는지를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통해 파악할 수 있으리란 생각이 가능해집니다.
여기서 언어와 사고, 언어와 인간의 관계를 이해하는 또 하나의 입장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언어 속에서 사고할 수밖에 없다면, 결국이 언어를 연구함으로써, 혹은 사람들이 언어를 어떻게 사용하는가를 연구함으로써 인간의 삶과 사고에 대해 알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소쉬르나 촘스키의 언어학이 이런 방향에 크게 영향을 미쳤는데, 그 영향 아래서 형성된 구조주의자들은 언어를 통해 인간에 대해 다시 사고하려고 합니다. 이와는 다른 흐름으로, 후기의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적 실천에 기초한 새로운 문제설정을 만들어냅니다. 또한 오스틴과 같이 의미를 언어가 사용되는 상황으로 환원해서 파악하려는 입장도 있습니다.
이제부터 주로 주목할 것은 이 두 번째 입장과 연관된 견해들입니다. 이는 언어와 의미뿐만 아니라, ‘주체’를 이해하는 새로운 방법을 가르쳐주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근대철학을 해체하는 또 하나의 방법일 것입니다.
▲ 코끼리
웨그먼(William Wegman)의 사진이다. 이것은 앞의 마그리트 그림(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과 반대되는 사진처럼 보인다. “이것은 코끼리가 아니다”라고 했다면 이 사진은 그저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웨그먼은 개의 신체에 약간의 변형을 가해 놓곤, 밑에다 ‘코끼리’라고 써 놓았다. 우리는 그게 코끼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양말을 쓴 개일 뿐이다. 그러나 「코끼리」라는 제목은 사태를 완전히 다르게 바꾸어 버린다. 마치 변기를 전시해 놓고 「샘」이라는 제목을 붙였던 뒤샹의 작품에서처럼, 대상과 분리된 기호는 거꾸로 대상에 스며들어가 대상을 다른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 결과 ‘코끼리’라는 기호는 대상을 지시하는 기호가 된다. 지시체가 기호와 만날 수 없다면, 대체 이런 일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