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훔볼트 : 언어학적 칸트주의
선험적 주체의 언어학
언어학과 철학이, 언어와 사고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그에 대한 이론을 가장 먼저 체계화한 사람은 훔볼트입니다. 외교관이었던 그는 언어에 대한 관심에 덧붙여 직업적인 이유로 다수의 외국어를 비교 연구할 수 있었고, 그걸 통해 민족마다 고유한 사고방식이 각각의 언어에 새겨져 있으며, 그것이 개인들의 사고를 제약한다는 사실에 일찍 주목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의 이론을 몇 가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그는 언어는 통일적인 유기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의 단어는 다른 단어를 전제로 하며, 또한 단어를 결합시켜 문장을 만드는 규칙 전체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아까 말했던 ‘삶’이란 단어를 생각해 봅시다. 러시아어에서는 그 단어를 남성명사와 함께 사용할 수 없습니다. 나아가 남성적인 이미지를 갖는 다른 단어들과도 함께 사용할 수 없지요. 혹은 ‘자다’ ‘먹다’ 같은 단어와도, ‘길쭉한’ ‘모자’ 같은 단어와도 결합될 수 없습니다. ‘살다’ ‘고통스럽다’ ‘아름답다’ 등 특정한 단어와만 결합될 수 있지요. 즉 그것은 다른 단어들과 이미 하나의 유기적인 그물을 이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단어를 사용하는 것도 이 의미망 속에서만 가능하지요.
둘째, 그는 “언어는 정신적 활동”이라고 말합니다. 즉 언어는 활동의 결과물(Ergon)이 아니라 “분절된 음으로서 인간의 사상을 표현하는 영원한 활동(Energeia)”이라는 겁니다. 따라서 언어는 인간이 하는 활동 없인 존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물론 그는 전체적으로 언어가 사유활동에서 독립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유하는 인간의 활동 없이도 언어가 존재할 수 있는 실체라는 (그 당시의) 주장을 비판합니다. 즉 언어는 사유로부터 독립해 있지만, 동시에 사유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겁니다. 이런 의미에서 언어는 활동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이는 소쉬르나 구조주의자들의 견해에 대한 비판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라틴어를 예로 들어 봅시다. 라틴어는 지금 사어(死語)지요. 즉 라틴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여기서 실체론자나 구조주의자들은 말할 겁니다. “그래도 라틴어는 의연히, 그리고 예전대로 남아 있지 않은가”라고 말입니다. 이에 대해 훔볼트는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예전대로 남아 있는 건 분명하다. 그건 언어가 사유로부터 독립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도 의연히 남아 있는 것은 고문서나 라틴어로 쓴 예전 문헌을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즉 라틴어를 읽을 필요마저 사라진다면 누가 라틴어를 배우겠는가? 더 이상 아무도 그걸 배우지 않는다면 라틴어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겠는가?”
셋째, 그는 “모든 언어는 하나의 세계관”이라고 합니다. 그의 말을 빌리면 “모든 언어는 현실세계를 사고로 전환시키는 각각의 고유한 방법이 있다. 그것은 세계를 고유한 범주의 망으로 포섭하며, 판단을 만들어 주는 고유한 문장 형식을 제공한다. 누구나 모국어라는 자신의 안경을 통해 일정한 색조 속에서 세계를 바라본다”고 말합니다(『카비語 연구 서설』), 쉽게 말해 모국어는 세상을 바라보는 안경이라는 거죠.
예를 들어 봅시다. 무지개를 보면 우리는 보통 일곱 가지 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무지개의 색깔은 진짜 일곱 개일까요? 사실 정확히 보면 색과 색 사이의 경계선은 분명하지 않습니다. 만약 주황과 빨간색 사이를 유심히 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빨강과 주황 사이에 주홍이라는 색을 더 넣어서 무지개의 색깔은 여덟 개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또 무지개의 색깔이 더 적은 경우도 있습니다. 아프리카 쇼나족의 언어에서는 무지개의 색을 네 가지로 표현한다고 합니다. 무지개의 색이 4개라는 말이죠. 또 라이베리아의 바사족은 무지개의 색을 딱 두 가지로 본다고 합니다. 아프리카가 아니더라도 19세기까지 독일에서는 주황색과 보라색이란 단어가 사용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독일어란 안경을 통해서 독일인이 본 무지개는 분명 다섯 가지 색깔이었던 것입니다.
넷째, 동일한 국민의 언어, 혹은 한 민족의 언어에는 비슷한 종류의 주관성이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각각의 언어는 나름의 세계관을 갖고 있다는 뜻이죠. 쉽게 말하면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이나 국민은 각각 고유한 색깔의 안경을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국어라는 안경의 색깔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그 눈에 들어오는 세상도 국민 민족마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외국어를 습득하는 것은 상이한 세계관을 흡수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예컨대 우리말에서 ‘결혼하다’라는 말은 목적어를 갖지 않습니다. 그런데 영어에서 marry라는 말은 목적어를 가지지요. “He married me” 란 문장을 직역하면 “그는 나를 결혼시켰다”입니다. 우리 말에선, 그 가 강제로 나를 결혼시킨 아버지를 지칭한다면 모를까, 이런 문장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는 나와 결혼했다”가 정상적인 말이지요. 이처럼 다른 언어는 결혼에 대한 다른 사고방식을 보여줍니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각각의 모국어에 새겨져 있는 사고구조는 각 민족정신에 따라 고유한 개성을 갖는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언어는 ‘민족정신의 외적인 표현’이라는 거죠. 그의 말에 따르면 “민족언어는 민족정신이며, 민족정신은 민족언어”라고 합니다. 이런 얘기는 일제 시대의 조선어정책을 두고 종종 들어본 말일 것입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일본어에서 ‘~(ら)れる’는 ‘~함을 당하다’란 의미를 갖는 수동의 조동사입니다. 그런데 일본어에는 이 수동의 조동사가 매우 광범위하게 사용됩니다. ‘오다’ ‘가다’ ‘되다’ 같은 자동사에도 수동을 붙여 사용하고, ‘(전화를) 걸다’같은 동사에도 붙여 (전화가 걸려와) 귀찮거나 불리한 경우를 표현하며, 심지어 사역동사에도 붙여서 사용합니다. 우리 같으면 했다고 할 것도 ‘하도록 함을 당했다’는 식으로 표현을 하지요.
반면 우리말의 ‘하게 하다’나 ‘시키다’라는 말에는 수동의 의미를 갖는 어미를 붙일 수 없습니다. 즉 ‘하도록 함을 당했다’나 ‘시켜지다’라는 표현은 한국어 어법에는 맞지 않습니다. 물론 한국어를 잘 모르는 사람이 일어책을 번역하면 이런 문장을 그대로 직역하지요. ‘되어지다’도 마찬가집니다. ‘시켜진다’라는 말에는 내가 누구를 시킨다는 것 자체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 나에게 강제해서 할 수 없이 하게 된 것이라는 뉘앙스가 느껴집니다. 이는 내가 시키는 행위조차도 다른 요인에 귀속시키는 태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시키는 건 시키는 것일 뿐이라는 식의 사고방식이 새겨진 언어와 크게 대조됩니다.
마지막으로 다섯째, 그는 “주체(subject)의 활동은 사유 속에서 대상을 형성한다”고 합니다. 나아가 “이 사유는 언어를 통해서 행해지기 때문에 결국 대상이란 언어를 통해서만 형성된다”는 것을 추가합니다.
일례로 치즈의 종류를 들어 봅시다. 요리를 즐기는 프랑스에서는 치즈의 종류가 700가지나 된다고 합니다. 용도와 맛, 만드는 방법 등에 따라 극도로 자세한 치즈의 이름이 다 있는 것입니다. 이는 아마 치즈의 맛을 즐기는 그들의 생활에서 기인한 거겠지요. 반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기껏해야 일반 치즈와 피자용 치즈 등이 전부고, 더 나아간다 해도 해태치즈, 매일치즈 등과 같은 고유명사 이상이 아닐 겁니다. 그리고 그 700가지 치즈를 맛보고 이름을 배운다 해도 실제로 치즈 맛에 둔한 우리로서는 그 미세한 차이를 별로 유의미하게 생각하진 않을 것 같습니다. 이는 주체의 생활, 활동 속에서 치즈라는 대상이 형성되기 때문에 생기는 차이입니다. 어떤 대상에 민감한 민족일수록 그에 대해 더 미세하고 많은 대상들을 형성합니다. 바로 언어를 통해서 말입니다.
주체의 활동이 대상을 형성한다는 이 명제는 “대상은 주관이 형성하는 것이고 판단은 주관의 작용”이라는 칸트의 견해를 그대로 빌려 온 것입니다. 즉 훔볼트가 칸트의 견해에 크게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줍니다. 훔볼트는 선험적 주체가 사고의 기초라는 칸트의 견해에 명시적으로 동조합니다. 그리고 바로 언어(모국어)야말로 주체들이 그 위에서 사고하는 일종의 ‘선험적 구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어떠한 사고도 언어(모국어)를 빌리지 않으면 불가능하며, 따라서 모국어에 내장된 세계관 속에서 행해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적 활동과 언어는 결합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후 훔볼트의 사상을 계속 발전시킨 바이스게르버(L. Weisgerber)는 위의 말과 관련하여 언어(모국어)를 “세계를 변화시켜 인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세계를 영유하고 전유하는 방식이며 내적 조직”이라고 말합니다(모국어와 정신형성).
따라서 만약 칸트가 훔볼트의 연구를 참조할 수 있었다면 순수지성의 선험적 형식을 ‘범주’라고 하지 않고 ‘언어’라고 했을지도 모릅니다.(사실 그게 더 설득력이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훔볼트의 칸트주의는 매우 생산적인 보충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반면 훔볼트처럼 언어구조 속에서 사고와 행동을 이해하려는 노력 또한 정확하게 칸트적인(근대적인) 선험적 주체를 구성하는 결과로 귀착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훔볼트는 언어(모국어)가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사고구조를 제약하며, 그래서 세계를 파악하는 관점을 내장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로써 언어와 사고구조 간의 긴밀한 관계가, 그리고 사고에 대한 언어의 선차성(先次性)과 우위성이 분명해집니다. 이러한 명제를 훔볼트는 칸트의 선험적 주체라는 개념에 이어 붙입니다. 즉 언어란 그걸 사용하는 주체들 모두에게 공통된 사고의 기반이며, 선험적인 구조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구조주의의 선구자’로 종종 지칭되는 훔볼트는 칸트적인 선험적 주체를, 결국은 새로운 주체철학을 언어를 통해 재건하고 있는 셈입니다. 더불어 훔볼트 역시 칸트와 마찬가지로 선험적 구조로서 언어의 연구가 바로 진리에 이르는 길이라는 확신을 가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언어학은 인간에 대한 과학, 다시 말해 인간이 어떻게 사고하고 어떻게 질서를 만들어내는가를 연구하는 과학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훔볼트의 언어학은 칸트적인 의미에서 근대성 안에 있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