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부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 근대 너머의 철학을 위하여
1. 구조주의와 철학
현대철학에는 다양한 흐름이 있고, 이 흐름은 이제까지 얘기해온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기도 합니다만, 이 자리는 어차피 한정된 것이기에, 그걸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일단 구조주의자, 혹은 포스트구조주의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사상 가운데 대표적인 것만을 간략히 다루려고 합니다. 물론 이러한 흐름이 현대철학을 대변하는 것이냐는 반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건 옳은 말입니다. 현상학이나 하이데거, 거기서 이어지는 해석학적 흐름, 혹은 좀 다른 방향으로 현상학을 발전시킨 실존주의, 그리고 영미권의 철학도 나름의 분명한 전통을 형성하고 있는 게 사실이며, 독일에서는 비판이론이라 불리는 철학적 전통이 독일 너머까지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근대철학의 문제설정과 그 경계들을 검토하는 게 우리의 주제라면, 이 한계를 넘어섬으로써 경계선을 드러내려고 한 시도가 명확하면 할수록 주제에 부합한다고 생각합니다. 구조주의나 포스트구조주의가 근대철학과의 관계를 명시적으로 드러낸다는 점, 그리고 근대철학의 한계를 의식적으로 넘어서려 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유독’ 이 자리를 빌려 이야기할 이유는 충분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구조주의의 흐름에 들어서자마자 우리는 적잖이 당혹스런 사태에 부딪칩니다. 그것은 우리가 흔히 구조주의자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자신이 ‘구조주의자’임을 부정하고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오직 레비-스트로스만이 예외일 따름입니다. 이런 사정은 포스트구조주의자라고 불리는 사람들도 마찬가집니다.
그렇다면 이런 사태는 무엇 때문이며,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건 그들을 직접 만나본 일이 없는 저로선 감잡기조차 어려운 일입니다. 그리고 이게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도 의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사정의 원인이든 결과이든 간에, ‘구조주의’라는 말 자체가 매우 모호하게 사용된다는 점은 언급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구조’라는 말은 인문과학이나 사회과학에서 가장 흔히 사용되는 개념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언어구조니 사회구조니 경제구조니 정치구조니 하는 말들이 그거지요. 구조주의란 말을 가장 넓게 사용하는 경우는 이처럼 구조를 가정하고, 그것이 반복적으로 다양한 현상들을 만들어낸다는 전제 위에 다수의 현상들 근저에서 구조를 찾아내려고 하는 시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는 지시하는 내용이 너무 포괄적이어서, 이 말만으로 어떤 철학적 태도나 사상적 흐름을 변별하기는 곤란합니다.
반면 가장 좁게는 언어의 일반적이고 공통된 구조를 찾으려 한 구조언어학을 가리키며, 그 영향을 받아 구조언어학의 방법을 사용하는 경우를 가리킵니다. 이들은 어떤 하나하나의 항은 다른 항과의 대립적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고, 각각의 요소들은 전체 체계를 이루며, 이 체계 속에서만 의미나 기능이 정해진다고 합니다. 이런 의미로 쓴다면 아마 구조언어학자와 레비-스트로스 정도만이 구조주의란 이름에 적당하다는 결론에 이를 것 같습니다.
다른 한편 이들의 영향 아래, 다양한 것들의 근저에 있는 구조를 보편적이고 무의식적인 수준에서 찾으려는 시도들이 있었습니다. 이들 역시 요소가 아니라 관계를 강조하고 그 관계 속에서 요소를 이해했지요. 예컨대 다양한 지식이나 사고를 가능하게 해주는 무의식적인 (사고)구조를 찾으려는 시도(푸코의 에피스테메)나, 모든 인간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무의식의 구조를 규명하려는 시도(라캉의 타자), 혹은 다양한 사회에 공통된 요소들을 찾아내고, 그 요소들의 결합관계로써 사회의 본질적 구조를 찾아내려는 시도(알튀세르/발리바르의 생산양식)들이 이런 관점에서는 ‘구조주의’로 간주됩니다.
제가 지금 ‘구조주의’란 말을 사용한다면 세 번째 의미로 사용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을 단순히 ‘구조주의자’란 하나의 이름만으로는 충분히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그들은 이후 구조주의가 가지고 있는 중요한 가정을 해체하고 파괴했습니다. 예컨대 모든 인간에 공통된 무의식적 조건을 찾으려는 시도나, 모든 경우를 포괄하며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구조’를 찾으려는 시도를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구조주의자’로 불리기를 거부합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해체 역시도 구조주의를 통해 개척한 새로운 지반 위에서 행해진 것이며, 구조주의와 연속성을 갖고 있다는 것만은 완전히 부정할 순 없을 것 같습니다.
포스트구조주의라는 말은 그것이 대개(‘전부’는 아니란 의미에서) 구조주의의 연속성상에 있음을 뜻하지만, 동시에 그 한계를 해체하고 넘어선다는 점에서 구조주의를 벗어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알다시피 ‘포스트’라는 말은 무엇의 ‘후’라는 의미인데, 그것을 벗어난다는 것인지, 그것에 이어져 있는 부분이란 뜻인지 모호합니다. 이 모호함이 차라리 이 흐름이 갖는 이중적인 위치를 잘 보여준다고 생각해서, 저는 그냥 포스트라고 음독해서 쓸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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