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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철학과 굴뚝청소부, 제6부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 근대 너머의 철학을 위하여 - 3. 라캉 : 정신분석의 언어학, 무의식에 담긴 타자의 욕망 본문

책/철학(哲學)

철학과 굴뚝청소부, 제6부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 근대 너머의 철학을 위하여 - 3. 라캉 : 정신분석의 언어학, 무의식에 담긴 타자의 욕망

건방진방랑자 2022. 3. 26.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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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에 담긴 타자의 욕망

 

 

다음으로 라캉은 무의식은 타자의 욕망(desire)이라고 합니다. 이 말을 이해하려면 몇 가지 다른 개념을 함께 알아야 합니다. 그는 욕망을 욕구(need), 요구(demand)와 구별합니다. 욕구는 식욕, 성욕처럼 가장 일차적인 충동입니다. 만족을 추구하여, 그걸 충족시켜 줄 대상을 찾고자하는 충동이죠. 이는 다른 사람에게 만족시켜 달라는 요구, 대개는 사랑의 요구로 나타납니다. 거칠게 말하면 요구는 욕구를 표현한다고 해도 좋겠습니다.

 

그렇지만 이 요구는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있는 것으로만 표현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어머니와 자고 싶다는 욕구가 그대로 표현될 수는 없습니다. 즉 어머니에게 결혼을 요구하는 일은 일어날 수 없지요. 한마디로 말해 요구는 사회적 질서와 언어적(상징적) 질서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만 나타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욕구는 언제나 요구를 통해서 표현되고 충족되어야 하기에 그 충족은 늘 불충분합니다. 즉 욕구와 요구 사이에는 메울 수 없는 간극이 있다는 말입니다. 욕구와 요구 사이의 이 격차로 인해 욕망이 생겨납니다. 이런 의미에서 욕망은 결핍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결핍을 메울 대상을 찾아나서지만 결코 만족될 수 없는 것이기에 또 다른 대상으로 끊임 없이 치환됩니다. 즉 대상이 끊임없이 치환되는 욕망의 환유연쇄가 나타난다고 합니다.

 

 

무서운 머리

-존스(Edward Coley Burne-Jones)의 그림 무서운 머리(The Baleful Head)

메두사의 머리는 하도 끔찍하게 생겨서 그것을 보는 자는 누구나 공포와 혐오로 얼어붙어 돌이 된다고 한다. 그래서 페르세우스는 갈라온 메두사의 머리조차 안드로메다에게 직접 보여주지 못한다. 그랬다간 연인을 석상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을 물에, 아니 거울에 비추어 보여준다.

라캉은 이처럼 실재계는 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다고 한다. “실재계는 불가능하다.” 우리는 다만 그것이 거울에 비친 것을 보거나(상상계), 아니면 그것에 대해 언어로 표시한 것(상징계)만을 수 있을 뿐이다. 가령 신경증 환자는 자신이 반복하는 이상한 행동의 이유를 자신도 알지 못한다. 정신분석가는 환자 자신도 모르는 그 실재, 미지수 X와 같은 그 원인을 찾아내려고 한다. 그 실재계의 대부분은 프로이트 말대로 성욕이나 남근과 결부되어 있다. 혹은 어머니에 대한 애시당초 불가능한 욕망과. 그러나 그것은 볼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으며, 따라서 알 수도 없다. 환자의 입에서 나온 말을 분석하거나, 아니면 눈에 보이는 증상을 통해서 추정하고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정신분석가는 답을 알기 때문에, X가 무언지 언제나 쉽게 찾아낸다. 답을 알고서 방정식을 푸는 것은 사실 장난아닌가!

 

 

여기서 욕망은 생물학적인 충족욕이 아닙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으로부터 사랑의 대상으로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망이며, 다른 사람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를 라캉은 음경’penis과 구분하여 남근phallus이라고 합니다)으로서 인정받고 싶어하는 인정 욕망입니다. 예컨대 어머니를 욕망한다는 것은 어머니로부터 자신이 남근임을 인정받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욕망은 허용될 수 없으며, 계속 추구한다면 거세되리라는 위협 앞에서 꺾이고 만다고 합니다. 거세 콤플렉스를 통한 이러한 억압과 그로 인해 야기되는 욕망의 환유연쇄가 바로 인간의 무의식을 구성한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무의식이란 타자(다른 사람, 사회적 용인, 사회적 질서)의 인정을 받고자 하는 인정 욕망이란 거지요. “무의식은 타자의 욕망이란 말은 바로 이런 뜻입니다.

 

 

정의와 신의 복수는 죄인을 추적한다

피에르-폴 프뤼동(Pierre Paul Prudhon)정의와 신의 복수는 죄인을 추적한다(Justice and Divine Vengeance pursuing Crime)

푸코는 벤덤의 원형감옥에서 근대사회에서 작동하는 시선의 배치를 발견한다. 원을 그리며 늘어선 감방들이 있고, 그 원의 중심에 높은 감시탑이 있다. 가능하면 감방들의 저쪽 창에 빛이 잘 들어서 감방 안에 있는 수인(囚人)들의 일거수 일투족이 잘 보이게 한다. 감시탑은 높이 솟아 있기에 탑에서는 앉아 있어도 감방들이 모두 잘 보이지만, 감방에서는 감시탑이 보이지 않는다. 즉 감시자가 있는지, 뭘 하고 있는지 볼 수 없다. 따라서 수인들은 언제나 감시자의 시선이 자기를 보고 있다고 가정하고 행동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은 타인의 시선 속에서 자기 자신을 보아야 한다. 즉 자기 자신이 감시자의 시선으로 자기를 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시선은 지향성이 담긴 응시도, ‘욕망이 담긴 응시도 아니다. 그것은 그 자체가 하나의 권력이다. 규범과 법에 따라, 혹은 도덕에 따라 자기 신체를 규제하는 권력, 그런데 이런 시선의 배치는 단지 감옥처럼 감금된 공간 안에만 있는 게 아니다. 감옥에서 모델화되었지만, 이는 타인들의 눈이 있는 길거리나 광장처럼 개방된 곳에서도, 혹은 가족이나 아이들이 있는 자신의 집에서도 마찬가지로 발견된다.

이것이 왜 우리는 도둑질을 하지 않는가?”를 설명해 준다. 프뤼동의 위 그림에서처럼 심지어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경우에도, 우리는 신이 그것을 지켜본다고 무의식중에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나의 양심이란 그 시선을 의식하고 있는 나의 시선이다. 이런 점에서 푸코는 근대사회 전체가 감옥을 닮았다고 야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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