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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철학과 굴뚝청소부, 제6부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 근대 너머의 철학을 위하여 - 3. 라캉 : 정신분석의 언어학, 타자의 담론, 무의식의 담론 본문

책/철학(哲學)

철학과 굴뚝청소부, 제6부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 근대 너머의 철학을 위하여 - 3. 라캉 : 정신분석의 언어학, 타자의 담론, 무의식의 담론

건방진방랑자 2022. 3. 26. 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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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의 담론, 무의식의 담론

 

 

다른 한편 라캉이 무의식을 파악하는 데서 전통적 개념과 결정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소쉬르 등의 구조언어학의 개념들과 이론을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조차 레비-스트로스의 영향이 그대로 배어 있는 것입니다만, 그 개념들을 사용함으로써 라캉의 정신분석학은 프로이트나 기존 프로이트주의자들의 정신분석학과는 전혀 다른 새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가장 기본적인 명제는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신경증이든, 실수든, 농담이든, 꿈이든 대개 어떤 무의식이 드러난 것으로 간주합니다. 즉 그런 현상들은 무의식의 징후라고 하지요. 언어학 용어를 쓰면 개개의 징후란 무의식상의 어떤 의미를 표시하는 기표(S)를 뜻합니다. 무의식은 기의(s)인 셈이지요. 라캉은 이를 소쉬르와 유사하게 S/s로 표시합니다. 하지만 무의식의 기표는 기의를 그대로 보여주지 않습니다. 기의를 이해하려면 그 기표(징후)를 다른 기표(징후)들과의 연관 속에서 해석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즉 기표들의 연쇄, 기표들의 관계 속에서 어떤 하나의 기표가 갖는 의미는 정해지지요. 하지만 이것은 무의식에 있는 어떤 궁극적인 기의를 표시한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라캉은 기표가 기의에 닿지 못하고 계속 미끄러진다고 하며, Ss를 가르는 /는 무의식의 장벽을 뜻한다고 합니다.

 

 

 수태고지

시모네 마르티니(Simone Martini)와 리포 메니(Lippo Menni)가 그린 수태고지(The Annunciation).

수태고지, 신의 아이를 잉태했음을 천사가 와서 알려주는 모습으로, 서양의 화가들이 무수히도 그렸던 장면이다. 마리아를 쳐다보는 천사 가브리엘의 시선도, 그걸 대하는 마리아의 시선도 뭔가 특별한 데가 있어 보인다. 그저 대상을 보는 평범한 시선과 달리 이처럼 남다른 시선을 사르트르는 응시’(gaze)라고 불렀다. 그렇게 우리는 연인의 얼굴을 응시하고, 그렇게 우리는 고통받는 인간의 얼굴을 응시한다. 그렇게 내가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내게 와서 꽃이 되거나 고통이 된다. 나를 놀라게 하는 응시. 그 응시로 인해 인간은 얼굴을 갖게 된다. 쥐나 개에게는 얼굴이 없지 않던가! 마리아를 보는 천사의 응시 또한 그러하다. 그것은 무어라 말하고 있다.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여.” 이로써 마리아의 얼굴은 성모의 얼굴이 된다. 그리고 이제 마리아는 바로 천사의 그 응시 안에서 무언가를 보게 될 것이다. 이처럼 응시가 의식의 작용이고 지향성인 한, 우리는 응시가 나타나는 순간부터 그에 적응하려 하게 된다.

 

 

다른 한편 결합관계와 계열관계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지요? 그게 바로 문장으로 언어가 조직되는 방식이라고 말입니다. “먹었어라는 말은 누가 무엇을 이란 말과 결합되며, 그 말이 표시되지 않은 경우에도 그것은 먹었어와 공존합니다. 이걸 야콥슨환유라고 하지요. 반면 무엇을 자리에 빵 대신 밥이나 물처럼 유사성을 갖는 말들이 대체 되며 선택되는 관계를 은유라고 한다고 했지요? 이처럼 결합관계와 계열관계를 통해 단어들은 문장으로, 언어로 조직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조직하는 규칙이 언어규칙(소쉬르의 랑그)입니다.

 

프로이트는 꿈을 분석하면서 꿈의 작업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 세 가지를 둡니다. 응축과 치환, 그리고 대리표상이 바로 그것입니다. 여러분도 A의 모자를 쓰고, B의 옷을 입었으며, C의 머리 모양을 하고 있는데, 전체적으로는 D의 이미지를 하고 있는 모습을 꿈 속에서 본 일이 있을 겁니다. 이처럼 여러 개의 이미지가 하나로 압축되어 나타나는 것이 바로 응축(condensation)입니다. ‘치환’(displacement)의 예로는 성교가 피흘리는 모습으로 나타나거나, 사정이 눈물로 표현되는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대리표상은 싫다는 뜻이 자기가 싫어하는 동물인 뱀으로 나타나거나, ‘소원감이 멀리 떨어져 앉아야 하는 커다란 테이블로 나타나거나 하는 것 등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여기서 응축과 치환이라는 무의식의 메커니즘이 앞서 언어학에서 말하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꿈을 조직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물론 라캉에 따르면 꿈에서 응축은 유사한 여러 가지가 한군데 뭉쳐 나타나기 때문에 은유, 치환은 인접한 다른 기표를 빌려 나타나기에 환유라고 합니다.

 

이처럼 무의식이 표현되는 방식이나 그것이 조직되는 방식은 라캉이 보기에 언어적인 구조와 동일합니다. 이런 뜻에서 그가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언어학에서 보았듯이, 언어는 자기 나름의 독자적인 의미망을 가지고 있고, 자기 나름의 독자적인 질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언어를 사용하려면 그 속으로 편입되어 들어가야 합니다. 무의식 역시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면, 그것은 나란 개인으로부터 독립적인 질서와 체계를 갖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따라서 무의식이란 타자(Autre)의 담론이라고 합니다. 결국 무의식이란 타자의 담론이라고 요약되는 이 질서가 개개인에게 내면화되는 메커니즘을 의미하며, 개개인이 질서로 편입되는 메커니즘을 의미합니다(어머니와 자고 싶다는 오이디푸스적 욕구의 억압을 통해 형성되는 무의식은 이렇듯 사회적 규범과 질서와 연관됩니다).

 

 

정신분석가는 여기서도 남근을 본다

한스 홀바인(Hans Holbein)의 그림 대사들(Ambassadors)

두 사람이 선 발 아래, 그 둘 사이로 무언가 기이한 것이 그려져 있다. 무얼까? 이미 답을 알고 있다고? 하긴 워낙 유명한 그림이니까. 그래 맞다. 해골이다. 아직도 눈치를 못 챈 사람은 그림을 들어 썩은 오징어처럼 생긴 그 형상의 밑에 눈을 대고 책을 시선과 나란히 뉘여보라. 그럼 해골이 나올 것이다. 두 사람의 삶이 무상함을 보여주려는 것이었을까? 그런데 라캉은 홀바인의 이 그림을 다시 기이하게 해석한다. 그것은 남근과 결부되어 있는 그림이라는 것이다. 물론 라캉 말대로 쪼그라든 남근에 해골 문신을 했다면, 그 남근이 발기한 경우 이처럼 해골의 형상은 길게 늘어질 것이다. 그리고 이보단 덜 하지만 시계를 늘어뜨린 달리의 그림에서도 그는 늘어진 남근을 본다. 알고 있겠지만, 위대한 정신분석가는 어디서나 이렇게 남근을 본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 해골의 형상을 눈 앞에 두고도 보지 못하는 것일까? 바로 남근이기 때문이란다. 라캉은 사르트르와 달리 응시와 시선이 나란히 가는 게 아니라, 언제나 분열되기 마련이라고 한다. 응시는 시선이 깨어 있는 상태에선 소멸하며, 시선을 돌리는 순간 비로소 살아난다는 것이다. 응시는 언제나 남근을 향하고 있지만, 그것은 의식이 깨어 있는 한 거세의 형태로 소멸한다는 것이다. 물론 시선은 타자의 응시 안에서 본다. 그러나 그것은 응시가 향한 것을 보지 못하며, 시선이 사그라들 때 응시는 자신이 찾는 것을 본다. 그런데 저 그림의 해골을 보지 못한 게 정말 그래서일까? 아니라고 해도 소용없다. 그건 무의식에 의해 행해진 부인이어서, 의식이 깨어 있는 한 알지 못하는 사실이니까. 그래서 정신분석학은 완벽하다! , 그런데 섹슈얼한 이미지를 항상 중의적으로 사용하는 광고를 보는 시선은 어떨까? “좀더 쎈 걸로 넣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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