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분석학의 대상
라캉은 직업적인 철학자가 아니라 정신과 의사입니다. 그는 미국식 정신분석학에 커다란 반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미국식 정신분석학은 일종의 자아심리학적인 경향이 있는데, 그들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자아의 형성과정에 대한 이론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즉 정신분석학을 구순기, 항문기, 성기기 등을 거쳐 하나의 표준적인 자아로 발전해 가는 과정에 대한 일종의 임상심리학으로 바꾸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라캉은 이것을 한편에선 생물학주의에 의해, 다른 한편에선 행태주의에 의해 프로이트 이론의 고유한 정신이 훼손된 것으로 간주합니다.
이러한 나름의 비판적 입지점을 설정한 라캉은 프로이트 이론에서 생물학주의적 요소를 제거하고, 나아가 프로이트 이론이 갖는 철학적 의미를 새로이 부각시키려고 합니다. 이 두 가지 목적을 위해 그는 레비-스트로스처럼 구조언어학을 끌어들입니다. 즉 구조언어학의 이론과 방법론을 기초로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의 본래 정신으로 돌아가자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프로이트로 돌아가자!”라는 슬로건을 자신의 모토로 삼았습니다. 이럼으로써 그는 사실 일종의 소쉬르적인 프로이트주의를 재구성하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돌아가야 할 프로이트란 ‘무의식’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발견한 프로이트요, 무의식에 대한 풍부한 논의를 포함하고 있는 ‘성숙기’의 프로이트를 말합니다.
라캉이 말하는 ‘성숙기’ 프로이트는 결코 노년의 프로이트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꿈의 해석』이 씌여진 1890년대 말부터 1914년 정도까지의, 시기적으로 ‘중기 프로이트’라고 불릴 수 있는 때의 프로이트입니다. 그가 프로이트의 가장 중요한 저작으로 취급하는 것은 『꿈의 해석』, 외에 『일상생활의 정신병리학』, 『농담과 무의식의 관계』 등 1905년을 전후해 씌여진 저작입니다(무의식에서 문자의 심급, 혹은 프로이트 이후의 이성」, 『욕망이론』). 이 시기의 프로이트는 의식/무의식이라는 개념으로 요약됩니다(이처럼 어떤 이론 전체의 틀을 가장 포괄적이고 핵심적인 개념의 관계 곧 위상으로 요약하는 것을 ‘위상학’이라고 하지요). 거시기(id)/초자아(super-ego)/자아(ego)라는 후기의 위상학은, ‘거시기’라는 개념이 생물학주의적 요소를 담고 있다고 보기 때문에 적극 받아들이지 않으며, 단지 ‘그것’(ça)이란 말로 번역해 피해갑니다.
그러면 정신분석학의 대상은 무엇일까요? 다시 말해서 프로이트가 어떤 대상을 발견했기에 새로운 정신분석학이란 영역을 개척했다고 하는 걸까요? 한마디로 말해 그것은 ‘무의식’입니다. 그렇다면 무의식이란 무엇일까요? 라캉에게 그것은 하나의 생물학적 존재를 인간의 자식으로 변환시키는 메커니즘이며, 계속해서 인간의 아이로 살아가게 만드는 인간 내부의 메커니즘입니다.
이런 점에서 그는 레비-스트로스와 비교될 수 있습니다. 레비-스트로스는 ‘근친상간 금지’를 인간의 삶이 자연에서 문화로 넘어가는 고개요 문화성립의 결정적인 계기로 봅니다. 라캉에게서 이와 유사한 기능을 하는 게 바로 오이디푸스기(Oidipous期,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발생하는 시기)지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고 싶다는 욕구, 그것은 인간이 되기 위해 억압되어야 할 최초의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레비-스트로스의 근친상간 금지지요. 욕구에 대한 금지란, 사실 인간이 따라야 할 가장 원초적인 규칙이요 법인 것이고, 오이디푸스적 욕망에 대한 금지를 통해 사회적 법과 규칙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뜻하지요. 그리고 바로 이처럼 사회문화적 규칙을 통해 욕구를 억압함으로써 무의식이 발생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라캉은 무의식이란 동물에겐 없으며 오직 인간에게만 있다고 하지요. 이렇듯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라캉의 체계에서 매우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합니다. 그것은 라캉에겐 무의식 자체에 대한 정의를 뜻하는 셈입니다. 이런 점에서 라캉의 무의식/오이디푸스 개념은 레비-스트로스의 근친상간 금지와 매우 유사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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