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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복음한글역주, 제18장 - 페르시아적 사유와 초기기독교 본문

고전/성경

도마복음한글역주, 제18장 - 페르시아적 사유와 초기기독교

건방진방랑자 2023. 3. 20.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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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르시아적 사유와 초기기독교

나 예수는 종말론의 종말을 선포하노라, 시작에 서라

 

 

예수운동에서 초기기독교로의 전환에는 기독론과 종말론이라는 두 개의 트랜스포메이션의 틀이 있다. 기독론, 즉 메시아사상은 유대교 자체의 전통에 속하지만, 종말론이란 조로아스터교의 영향 속에서 시대의 요청에 따라 강조되어간 이방전통이다. 종말론이 성행하면서 기독론조차도 원래의 정치적 맥락을 상실하고 재림사상으로 변모되어갔다. 역사적 예수는 이런 틀 속에서 포착되지 않는 동방적 사유를 과시하고 있다.

 

 

18

1따르는 자들이 예수께 가로되, “우리의 종말이 어떻게 될 것인지 우리에게 말하여 주옵소서.” 2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시작을 발견하였느뇨? 그러하기 때문에 너희가 지금 종말을 구하고 있느뇨? 보아라! 시작이 있는 곳에 종말이 있을지니라. 3시작에 서 있는 자여, 복되도다. 그이야말로 종말을 알 것이니, 그는 죽음을 맛보지 아니 하리라.”

1The followers said to Jesus, “Tell us how our end will be.” 2Jesus said, “Have you discovered the beginning, then, so that you are seeking the end? You see, where the beginning is the end will be. 3Blessed is the one who stands at the beginning: That one will know the end and will not taste death.”

 

 

도마복음서의 발견과 큐복음서의 재발견은 초대교회에 대한 전통적 인식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20세기의 신학사조는 아무리 과격한 사조라 할지라도 최소한 1세기의 초대교회의 모습에 대해서는 그 오리지날리티를 인정하고, 그것이 기독교의 진정한 출발이라고 암암리 전제하여 왔다. 그것이 어떠한 모습을 지니던간에 숙명적으로 그것은 기독교의 원점이라는 의식이 있었다. 그러나 도마복음서의 출현은 이러한 가설에 새로운 차원들을 도입하게 만들었다. 원점을 거슬러 또 새로운 원점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든 것이다.

 

불트만만 해도 원점 너머 또 원점을 설정할 수 있는 새로운 자료를 확보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역사적 예수에 관해 본질적으로 관심을 갖지 않았다. 예수에 관해 확보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자료는 4복음서였으며, 4복음서는 이미 초대교회의 케리그마의 소산일 뿐이며, 케리그마는 이미 종말론의 전제가 없이는 의미를 가질 수 없다고 단정지었다. 불트만에게 있어서 초대교회(the Earliest Church)는 이미 종말론적 회중(the Eschatological Congregation)이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을 세상 끝의 무리라고 규정짓고 있었던 것이다.

 

기독교의 본래적 성격이 무엇인가에 관한 논의는, 현재의 보수적 교권의 압력과 무관하게, 그 자체로서 매우 미묘한 문제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기독교(Christianity)’라 할 때에는 이미 기독론(Christology)의 전제가 없이는 생각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운동(Jesus Movement)’은 기독교 이전의 사태이며, 기독교의 전제들에 물들지 않은 어떠한 원초적 성격의 사회운동이었다. 예수운동에서 기독교로의 전환에는 불과 3·40년의 시간의 개입이 있을 뿐이지만 크게 두 가지 왜곡된 설정이 있다. 그 하나가 기독론이고, 또 하나가 종말론이다. ‘왜곡이라는 말에 눈살을 찌푸린다면, 예루살렘멸망 이후의 절박한 시대적 요구와 복음서 작가들의 탁월한 문학적 상상력에 의한 정당한 트랜스포메이션이라고 말해도 좋다. 기독론이란 역사적 예수가 유일무이한 하나님의 아들, 즉 독생자이며 이 세상을 침략자들의 억압에서 구원할 구세주라고 하는 신념을 표방하는 메시아사상(Messianism)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메시아는 매우 구체적인 정치사적 함의를 지니는 사건이며 다윗 왕가의 혈통에서 나올 때만 그 정통성이 확보된다. 이 메시아시상은 명백히 유대인 사제의 전통에 속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었던 페르세폴리스의 부조 아후라 마즈다상, 상반신은 인간의 모습으로 손에는 원반을 쥐고 있으며, 허리 아래 양옆으로 날개가 펼쳐져 있다. 날개는 사유의 순결과 말과 행동을 상징한다(바른 생각, 바른 행동, 바른 말의 三正道). 아후라 마즈다를 최고신으로 섬기며 페르시아 종교를 개창한 조로아스터공자와 동시대이며, 바로 니체가 말하는 차라투스트라이다. 베들레헴의 마구간 아기 예수를 방문한 동방박사 3인도 조로아스터교의 3마기(magi)로 간주되고 있다.

 

 

그러나 종말론은 유대인의 시상이 아니다. 마태 24:3에 나오는 세상 끝이라는 표현도, 구약성서에서 아하리트 야밈(aḥarit yamim, end of days)’이라고 표현되는 것인데, ‘아하리트’()는 적당히 먼 미래의 시점을 나타내는 것이며 우주적 종말이나, 시간의 종료를 나타내는 말은 아니다. 중동세계의 종말론이란 거개가 모두 조로아스터교(Zoroastrianism)에 근원하고 있다. 빛의 세력인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와 어둠의 세력인 앙그라 마이뉴(Angra Mainyu)간의 우주적 대결로서 설정된 코스믹 드라마에서, 어둠의 세력의 종국적 멸망을 의미하는 시점을 종말로서 인지하는 사유는 구약의 세계에서는 오히려 생소한 것이다. 예언자들을 통한 끊임없는 하나님의 심판은 오히려 현재적인 것이며 현세적인 것이다. BC 587/586년의 솔로몬성전의 멸망과 바빌론 유치는 현세적 정치지도자에 대한 실망감, 그리고 민족의 미래에 대한 절망감과 더불어, 그 반사적인 희망을 종말론적으로 표현하게 만들었다. 페르시아문명의 사상이 유대인들의 사유 속으로 깊게 침투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뒤 하스몬왕조(the Hasmonian kings)의 문란한 통치에 대한 실망감, 로마제국의 지배, 그리고 AD 70년의 예루살렘 멸망으로 종말론의 분위기는 가중되어만 갔다. 예수시대에 이미 기존해 있었던 쿰란공동체의 극심한 종말론적 성향을 고찰할 줄 안다면, 초대교회가 이러한 종말론적 분위기를 계승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시대적 요청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종말론이란 근원적으로 허구적인 망상이다. 우리나라의 졸렬한 종말론자들이 신봉하는 요한계시록도 결국 종말을 말하지 않는다. 천년왕국을 말하고 사탄의 패망을 말하고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을 말할 뿐이다. 순수한 종말이란 희망을 거부하며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천박한 종말론자들이 생각하는 종말이란 기껏해야 지구의 재앙같은 것인데, 지구가 설령 거대한 혜성과의 충돌로 파멸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은하수의 한 먼지가 사라지는 수준밖에는 되지 않는다. 시간의 종말을 의미할 수는 없는 것이다. ‘라는 개체의 종말이 억울하다고 지구의 재앙을 희구할 수는 없는 것이다.

 

종말이란 전우주가 다시 거대한 블랙홀로 빨려들어가지 않는 한, 어떠한 경우에도 시간의 종료를 의미할 수는 없다. ‘종말(end)’이란 시간의 종료가 아니라, 나의 삶의 완성(consummation)을 의미하는 것이다. 영어적 표현에서도 끝(end)이라는 뜻은 항상 목적(end)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나의 죽음은 나의 삶의 완성이며, 나의 존재가치의 목적이 될 수 있다. 쉽게 말하자면, 어떻게 잘 죽느냐 하는 것이 나의 삶의 보람일 수 있는 것이다.

 

17장 주해에서 인용한, 노자홀황을 말하는 대목에서 복귀어무물(復歸於無物)’이라는 구절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다시 물()이 없는 상태로 되돌아간다는 뜻인데, ‘다시라는 말은 끊임없는 회귀(回歸)를 의미하며, ‘무물(無物)’이란 분별된 사물의 세계가 아닌 그 이전의 원초적 무차별의 혼융(混融)한 상태를 의미한다. 즉 코스모스(Cosmos) 이전의 카오스(Chaos)적인 일체감을 나타내는 말이다. 재미있게도, 역사적 예수의 사상에는 이러한 카오스적 세계에 대한 예찬이 있다. ·여의 문제도 그는 남·여로 분화되기 이전의 동체의 아담(andropgynous Adam)’을 예찬한다(Th.22, 114).

 

종말을 묻는 제자의 질문에, 종말은 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작에 있다고 설파하는 예수의 역설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이제 독자들은 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예수는 후대에 형성!! 서구적 사유의 틀 속에서 단순하게 해석될 수 있는 그런 직선적 시간론의 사상가가 아니다. 예수의 당대에 이미 천박한 종말론이 성행하고 있었을 것이니, 예수는 그러한 종말론의 종말을 선포하는 역설적 사상가였다.

 

시작에 선다는 말에서 선다의 중요성은 이미 16에서 해설되었고, ‘죽음을 맛보지 아니 하리라라는 구절은 1에서 충분히 논의되었다.

 

 

필자가 지금 들여다 보고 있는 안티옥 산중턱의 석굴이 바로 초대교인들의 주거지인 동시에 교회였고 수행 동굴이었고 무덤이었다. 이 동굴 밖으로 보이는 도시의 모습이 바로 안티옥 전경이다. 도시 뒤로 뿌옇게 보이는 산이 타우루스(Taurus) 산맥의 줄기이고 도시 한복판으로 오론테스(Oronts) 강이 흘러 지중해로 들어간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티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티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11:25~26). ‘크리스찬이라는 이름이 최초로 유래된 곳인데, 이곳에서 비로소 비유대인인 헬라인에게도 그리스도 신앙이 전파되기 시작하였기 때문에 그러한 이름이 생겨난 것이다. 안티옥은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에 버금가는 국제도시였기 때문에 유대인의 독주가 허용될 수 있었다. 크리스챤이라는 이름은 원래 외부인들이 예수 신앙인들을 비하시키는 명칭이었을 것이다.

 

 

인용

목차

본문

성경

주제상관도표

기독교성서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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