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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복음한글역주, 제1장 - 요한복음과 도마복음 본문

고전/성경

도마복음한글역주, 제1장 - 요한복음과 도마복음

건방진방랑자 2023. 3. 17. 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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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과 도마복음

로고스기독론은 도마의 자각성에 대한 극단적 반동이다

 

 

4복음서 중에서 유독 요한복음에만 쌍둥이라 불리는 도마가 출현한다. 이 도마는 예수가 부활한 몸으로 처음 제자들에게 나타나는 바로 그 결정적인 시각에 제자들과 함께하지 못했다. 그리고 자기 손을 예수의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서는 믿을 수 없다고 말한다. 예수는 후에 나타나 도마에게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한다. 요한은 여기서 도마기독교인들의 자각적이고 실험적인 정신을 평범한 굴종의 믿음으로 변질시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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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가 말하였다: “이 말씀들의 해석을 발견하는 자는 누구든지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And he said, “Whoever discovers the interpretation of these sayings will not taste death.”

 

 

굳게 닫혀 있었던 서장의 첫 관문을 어렵게 풀고 제1장에 들어왔을 때, 우리는 또다시 이집트 피라미드의 현묘한 밀실에라도 들어온 것과도 같은 느낌을 받는다. 죽음을 맛보지 않는다니, 이건 또 무슨 신비스러운 감언(甘言)이냐? 뿐만 아니라 도마복음서의 래디칼한 성격에 대한 기대가 무너지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4복음서의 언어에 익숙한 독자는 금방 요한복음의 냄새를 맡을 수도 있을 것이다.

 

요한복음 8에 간음하던 여자를 현장에서 붙들어와 돌로 치려 할 때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있걸랑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치라”(8:7)하는 유명한 일화가 나오고, 이어 예수가 유대인들과 변론하는 긴 대화가 이어진다. 그때 예수는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8:32)라는 명언을 던지고, 예수를 귀신들린 사람 같다고 계속 힐책하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이와 같이 선포한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내 말을 지키면 그는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라(he will never see death. 8:51).” 그리고 다음 절에 유대인들이 예수 말을 재차 인용할 때는 누구든지 내 말을 지키면 그는 죽음을 영원히 맛보지 아니하리라(he will never taste death. 8:52)”라고 말한다. 도마복음의 언어와 요한복음의 언어가 동일한 것이다.

 

따라서 많은 신학자들이 이러한 언어들 때문에 도마복음과 요한복음은 같은 영지주의 계열에 속하는 문헌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은밀한 말씀들 즉 그노시스를 획득하면 영원히 죽지 않는 곳, 즉 천국의 열쇠를 획득하는 것이 된다. 영지와 영생은 도마복음과 요한복음의 핵심적 공통주제이다.

 

이미 논구한 바 있지만, 도마복음과 공관복음의 상관관계는 매우 명백하다. 특히 도마복음과 큐복음서는 35%나 내용이 겹치기 때문에, 양자가 전승을 공유하는 동시대의 작품이라는 가설을 성립시킨다. 그러나 놀라웁게도 도마복음서는 공관복음서보다 훨씬 뒤에 성립한 요한복음(AD 100년경 성립)과도 내면적인 특성을 공유하는 측면이 강하게 나타난다. 공관복음서와 요한복음서는 확연하게 그 성격을 달리하는 데 반하여 도마복음서는 공관복음서와도, 요한복음서와도 그 성격을 공유한다고 하면 도마복음서의 이해에는 매우 다양한 견해가 엇갈릴 수밖에 없다.

 

요한복음과 도마복음의 공통적 성격에 관하여 신학자들의 입장은 대체적으로 두 파로 갈린다. 하나의 입장은 요한복음을 도마복음적으로 이해하든지, 도마복음을 요한복음적으로 이해하든지간에 양자의 공통성을 강조하여 동일한 주제가 스타일을 달리하여 변조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아무래도 도마복음의 성립연대를 AD 100년경까지 밑으로 내려잡을 것이다.

 

요한은 마가복음이 정립해놓은 예수의 이미지가 오리지날한 예수운동의 모습을 왜곡했다는 전제하에서 마가의 유앙겔리온 전략을 새롭게 해석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는 것이다. 더구나 마태와 누가는 마가의 전략을 증보하면서 더 권위주의적이고 폐쇄적인 모습으로 예수를 그려놓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본래적 예수의 배반이다. 따라서 보다 개방적이면서도 수수께끼와 같은, 살아있는 예수의 목소리가 보다 생생하게 들릴 수 있도록 복음서라는 문학장르를 혁명시킬 필요를 느낀 사상가가 요한이라는 것이다. 요한은 인간적으로 예수를 그린다. 권위화된 두목같은 모습이 없이 개방된 커뮤니티 속을 들락거린다. 요한이 복음서를 새롭게 쓰려는 목적은, 예수운동의 형성단계의 원래적 모습으로 돌아가려는 것이다. 도마복음서나 요한복음서나 기독교형성기의 영지주의적 성향을 충실히 대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레바논 대학의 세계적인 고고학자, 핫산 바다위(Prof. Hassan Ramez Badawi)교수와 두로항 복원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다. 배경에 거대한 로마 공동목욕탕의 폐허가 보인다. 핫산은 말한다: “예수가 역사적 인물이라면 이러한 문화적 배경에도 친숙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또 하나의 입장은 도마복음과 요한복음이 지금 우리가 영지주의라고 부르고 있는 어떤 성향을 공유한다 할지라도 도마복음의 입장과 요한복음의 입장은 상반된 것이며, 요한복음은 도마복음에 대한 반박 내지는 안티테제로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요한은 너무도 명백하게 로고스기독론을, 그의 복음서 기술 전체를 통관하는 연역적 전제로서 내세우고 있다. 그리고 예수를 하나님 아버지(God the Father)’와 완전히 동격화시킨다. 예수는 말씀 그 자체며, 말씀은 궁극적으로 하나님 그 자체인 것이다. 예수를 믿는 것은 곧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예수가 구원의 유일한 통로이다. 그러나 도마가 그리는 예수는 어디까지나 지혜의 스승(a teacher)일 뿐이다. 그는 자기가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임을 선포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삼는 존재가 아니라, 단지 모든 평범한 인간존재 내에 엄연히 내재하는 신성의 빛을 인간 개개인이 스스로 발견하도록 만드는 지혜로운 교사일 뿐이다.

 

요한은 예수야말로 유일한 지상의 빛이라고 선포하지만, 도마는 단지 독자들로 하여금 스스로 내재하는 영적인 자각의 계기를 얻도록 만들 뿐이다. 모든 인간 개개인 속에는 이미 빛이 있다. 그 빛은 전 우주를 밝힐 수 있도록 강력하고 강렬한 것이다. 그러나 빛이란 빛나지 않으면 어둠이 찾아온다. 우리 몸속에 내재하는 빛이 빛을 발하지 않도록 우리가 생활하면 우리 몸은 어둠으로 빠지고 마는 것이다. 이것은 곧 육신은 어둠이요, 예수만이 빛이라고 하는, 어둠(Darkness)과 빛(Light)의 실체화된 이원론을 근원적으로 거부하는 것이다. 하늘과 땅(세계)의 넘을 수 없는 도랑을 메워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도마복음의 건강한 전통을 부정하고 나오는 것이 요한복음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요한복음 속에서는 살아있는 예수의 은밀한 말씀들을 기록한 위대한 도마가, 의심하는 도마로 바보스럽게, 해학적으로 격하되었다는 것이다. 만져보지 않으면 믿지 못하겠다는 도마의 실험적 정신을 불신앙으로 격하시키면서 굴종시키고 만다는 것이다. 요한의 선포는 명료하다. 예수에 대한 신앙만이 인간에게 구원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도마의 은밀한 말씀대신에 요한은 매우 명료한 공식을 제공한다. 그것은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 다 예시되어 있다: “하나님은 너를 사랑한다. 믿으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사실 요한복음은 도마복음의 내면적 자각에 대한 극단적 반동일 수도 있다. 프린스턴대학(Princeton University) 종교학과의 권위있는 석좌교수, 엘레인 페이겔즈(Elaine Pagels)의 이러한 관점은 우리에게는 보다 설득력 있는 제1세기 기독교발전경로의 그림을 그려주고 있다.(Beyond Belief: the Secret Gospel of Jesus, Ch.2).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이 제1장의 수수께끼 같은 언어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제일 먼저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과연 본 장의 가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성서에 나오는 지명 하나가 얼마나 거대한 의미체계인가 하는 것은 실제로 그곳을 방문해봐야 한다. 예수가 활동했던 두로(Tyre)가 얼마나 대단한 문명의 도시였는가 하는 것은 바로 이 지구상에서 건설된 가장 큰 규모의 대전차경기장(hippodrome)이 입증한다. 길이 500m,  160m, 4·5만 명을 족히 수용할 수 있는 이 경기장은 이 지역 유지들의 재원에 의하여 건설되는 것이기에 두로 문명의 화려한 성격을 가늠케 하는 것이다. 이곳으로부터 항구까지 아름다운 포장도로가 뻗어 있었다. 영화 「벤허」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하는 전차경기는 로마인들을 열광시킨 스포츠 종목이었다. 네로 황제는 직접출전(AD 67, 제211회 올림픽)하여 우승을 하기도 했다. 기수단은 초록(Prassina), 빨강(Russata), 흰색(Albata), 파랑(Veneta) 4개 조가 있었고 그 응원 관중도 좌석 영역이 정해져 있었다. 팀과 사회 신분에 따라 입구가 달랐다. 끝나면 바자르에서 물건을 사고, 56편에 소개된 지중해 해변의 거대 공동 목욕탕에서 목욕을 즐겼다. 예수의 산상수훈을 들으러 두로의 해안에서 많은 백성들이 왔다고 누가는 적고 있다( 6:17), 관중석에 앉아있는 나의 귓전에는, 지금도 천지를 뒤흔드는 수만 명의 함성이 메아리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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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성서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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