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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복음한글역주 - 제1장 본문

고전/성경

도마복음한글역주 - 제1장

건방진방랑자 2023. 3. 17. 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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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과 도마복음

로고스기독론은 도마의 자각성에 대한 극단적 반동이다

 

 

4복음서 중에서 유독 요한복음에만 쌍둥이라 불리는 도마가 출현한다. 이 도마는 예수가 부활한 몸으로 처음 제자들에게 나타나는 바로 그 결정적인 시각에 제자들과 함께하지 못했다. 그리고 자기 손을 예수의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서는 믿을 수 없다고 말한다. 예수는 후에 나타나 도마에게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한다. 요한은 여기서 도마기독교인들의 자각적이고 실험적인 정신을 평범한 굴종의 믿음으로 변질시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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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가 말하였다: “이 말씀들의 해석을 발견하는 자는 누구든지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And he said, “Whoever discovers the interpretation of these sayings will not taste death.”

 

 

굳게 닫혀 있었던 서장의 첫 관문을 어렵게 풀고 제1장에 들어왔을 때, 우리는 또다시 이집트 피라미드의 현묘한 밀실에라도 들어온 것과도 같은 느낌을 받는다. 죽음을 맛보지 않는다니, 이건 또 무슨 신비스러운 감언(甘言)이냐? 뿐만 아니라 도마복음서의 래디칼한 성격에 대한 기대가 무너지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4복음서의 언어에 익숙한 독자는 금방 요한복음의 냄새를 맡을 수도 있을 것이다.

 

요한복음 8에 간음하던 여자를 현장에서 붙들어와 돌로 치려 할 때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있걸랑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치라”(8:7)하는 유명한 일화가 나오고, 이어 예수가 유대인들과 변론하는 긴 대화가 이어진다. 그때 예수는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8:32)라는 명언을 던지고, 예수를 귀신들린 사람 같다고 계속 힐책하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이와 같이 선포한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내 말을 지키면 그는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라(he will never see death. 8:51).” 그리고 다음 절에 유대인들이 예수 말을 재차 인용할 때는 누구든지 내 말을 지키면 그는 죽음을 영원히 맛보지 아니하리라(he will never taste death. 8:52)”라고 말한다. 도마복음의 언어와 요한복음의 언어가 동일한 것이다.

 

따라서 많은 신학자들이 이러한 언어들 때문에 도마복음과 요한복음은 같은 영지주의 계열에 속하는 문헌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은밀한 말씀들 즉 그노시스를 획득하면 영원히 죽지 않는 곳, 즉 천국의 열쇠를 획득하는 것이 된다. 영지와 영생은 도마복음과 요한복음의 핵심적 공통주제이다.

 

이미 논구한 바 있지만, 도마복음과 공관복음의 상관관계는 매우 명백하다. 특히 도마복음과 큐복음서는 35%나 내용이 겹치기 때문에, 양자가 전승을 공유하는 동시대의 작품이라는 가설을 성립시킨다. 그러나 놀라웁게도 도마복음서는 공관복음서보다 훨씬 뒤에 성립한 요한복음(AD 100년경 성립)과도 내면적인 특성을 공유하는 측면이 강하게 나타난다. 공관복음서와 요한복음서는 확연하게 그 성격을 달리하는 데 반하여 도마복음서는 공관복음서와도, 요한복음서와도 그 성격을 공유한다고 하면 도마복음서의 이해에는 매우 다양한 견해가 엇갈릴 수밖에 없다.

 

요한복음과 도마복음의 공통적 성격에 관하여 신학자들의 입장은 대체적으로 두 파로 갈린다. 하나의 입장은 요한복음을 도마복음적으로 이해하든지, 도마복음을 요한복음적으로 이해하든지간에 양자의 공통성을 강조하여 동일한 주제가 스타일을 달리하여 변조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아무래도 도마복음의 성립연대를 AD 100년경까지 밑으로 내려잡을 것이다.

 

요한은 마가복음이 정립해놓은 예수의 이미지가 오리지날한 예수운동의 모습을 왜곡했다는 전제하에서 마가의 유앙겔리온 전략을 새롭게 해석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는 것이다. 더구나 마태와 누가는 마가의 전략을 증보하면서 더 권위주의적이고 폐쇄적인 모습으로 예수를 그려놓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본래적 예수의 배반이다. 따라서 보다 개방적이면서도 수수께끼와 같은, 살아있는 예수의 목소리가 보다 생생하게 들릴 수 있도록 복음서라는 문학장르를 혁명시킬 필요를 느낀 사상가가 요한이라는 것이다. 요한은 인간적으로 예수를 그린다. 권위화된 두목같은 모습이 없이 개방된 커뮤니티 속을 들락거린다. 요한이 복음서를 새롭게 쓰려는 목적은, 예수운동의 형성단계의 원래적 모습으로 돌아가려는 것이다. 도마복음서나 요한복음서나 기독교형성기의 영지주의적 성향을 충실히 대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레바논 대학의 세계적인 고고학자, 핫산 바다위(Prof. Hassan Ramez Badawi)교수와 두로항 복원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다. 배경에 거대한 로마 공동목욕탕의 폐허가 보인다. 핫산은 말한다: “예수가 역사적 인물이라면 이러한 문화적 배경에도 친숙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또 하나의 입장은 도마복음과 요한복음이 지금 우리가 영지주의라고 부르고 있는 어떤 성향을 공유한다 할지라도 도마복음의 입장과 요한복음의 입장은 상반된 것이며, 요한복음은 도마복음에 대한 반박 내지는 안티테제로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요한은 너무도 명백하게 로고스기독론을, 그의 복음서 기술 전체를 통관하는 연역적 전제로서 내세우고 있다. 그리고 예수를 하나님 아버지(God the Father)’와 완전히 동격화시킨다. 예수는 말씀 그 자체며, 말씀은 궁극적으로 하나님 그 자체인 것이다. 예수를 믿는 것은 곧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예수가 구원의 유일한 통로이다. 그러나 도마가 그리는 예수는 어디까지나 지혜의 스승(a teacher)일 뿐이다. 그는 자기가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임을 선포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삼는 존재가 아니라, 단지 모든 평범한 인간존재 내에 엄연히 내재하는 신성의 빛을 인간 개개인이 스스로 발견하도록 만드는 지혜로운 교사일 뿐이다.

 

요한은 예수야말로 유일한 지상의 빛이라고 선포하지만, 도마는 단지 독자들로 하여금 스스로 내재하는 영적인 자각의 계기를 얻도록 만들 뿐이다. 모든 인간 개개인 속에는 이미 빛이 있다. 그 빛은 전 우주를 밝힐 수 있도록 강력하고 강렬한 것이다. 그러나 빛이란 빛나지 않으면 어둠이 찾아온다. 우리 몸속에 내재하는 빛이 빛을 발하지 않도록 우리가 생활하면 우리 몸은 어둠으로 빠지고 마는 것이다. 이것은 곧 육신은 어둠이요, 예수만이 빛이라고 하는, 어둠(Darkness)과 빛(Light)의 실체화된 이원론을 근원적으로 거부하는 것이다. 하늘과 땅(세계)의 넘을 수 없는 도랑을 메워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도마복음의 건강한 전통을 부정하고 나오는 것이 요한복음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요한복음 속에서는 살아있는 예수의 은밀한 말씀들을 기록한 위대한 도마가, 의심하는 도마로 바보스럽게, 해학적으로 격하되었다는 것이다. 만져보지 않으면 믿지 못하겠다는 도마의 실험적 정신을 불신앙으로 격하시키면서 굴종시키고 만다는 것이다. 요한의 선포는 명료하다. 예수에 대한 신앙만이 인간에게 구원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도마의 은밀한 말씀대신에 요한은 매우 명료한 공식을 제공한다. 그것은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 다 예시되어 있다: “하나님은 너를 사랑한다. 믿으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사실 요한복음은 도마복음의 내면적 자각에 대한 극단적 반동일 수도 있다. 프린스턴대학(Princeton University) 종교학과의 권위있는 석좌교수, 엘레인 페이겔즈(Elaine Pagels)의 이러한 관점은 우리에게는 보다 설득력 있는 제1세기 기독교발전경로의 그림을 그려주고 있다.(Beyond Belief: the Secret Gospel of Jesus, Ch.2).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이 제1장의 수수께끼 같은 언어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제일 먼저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과연 본 장의 가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성서에 나오는 지명 하나가 얼마나 거대한 의미체계인가 하는 것은 실제로 그곳을 방문해봐야 한다. 예수가 활동했던 두로(Tyre)가 얼마나 대단한 문명의 도시였는가 하는 것은 바로 이 지구상에서 건설된 가장 큰 규모의 대전차경기장(hippodrome)이 입증한다. 길이 500m,  160m, 4·5만 명을 족히 수용할 수 있는 이 경기장은 이 지역 유지들의 재원에 의하여 건설되는 것이기에 두로 문명의 화려한 성격을 가늠케 하는 것이다. 이곳으로부터 항구까지 아름다운 포장도로가 뻗어 있었다. 영화 「벤허」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하는 전차경기는 로마인들을 열광시킨 스포츠 종목이었다. 네로 황제는 직접출전(AD 67, 제211회 올림픽)하여 우승을 하기도 했다. 기수단은 초록(Prassina), 빨강(Russata), 흰색(Albata), 파랑(Veneta) 4개 조가 있었고 그 응원 관중도 좌석 영역이 정해져 있었다. 팀과 사회 신분에 따라 입구가 달랐다. 끝나면 바자르에서 물건을 사고, 56편에 소개된 지중해 해변의 거대 공동 목욕탕에서 목욕을 즐겼다. 예수의 산상수훈을 들으러 두로의 해안에서 많은 백성들이 왔다고 누가는 적고 있다( 6:17), 관중석에 앉아있는 나의 귓전에는, 지금도 천지를 뒤흔드는 수만 명의 함성이 메아리치는 듯했다.

 

 

 해석의 발견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우리는 기독교를 공관복음이 되었든 요한복음이 되었든 신약 4복음서의 틀 속에서만 규정하려고 한다. 이것은 기독교 정통주의의 너무도 당연한 입장이기 때문에, 나는 그 정당성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최소한 제1세기의 기독교형성사를 생각할 때 이러한 정통주의는 사소한 편견으로 전락해버리고 만다. 기독교는 4복음서 이외로도 수없는 복음서를 만들어내었다. 그리고 기독교운동은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가치관의 스펙트럼 속에 있었다. 도마복음서 그 다양한 물줄기의 주류를 형성하는 은밀한 연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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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가 말하였다: “이 말씀들의 해석을 발견하는 자는 누구든지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And he said, “Whoever discovers the interpretation of these sayings will not taste death.”

 

 

는 누구일까?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는 말을 선포하는 주체인 를 우리는 예수로 상정할 수도 있다. 도마복음 전체의 용례로 볼 때 그러한 상정은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 앞에 서장이 나오고 본편 제1장에서 예수의 말씀이 곧바로 도입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법 구조와 단어 선택을 잘 살펴보면 다른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도 있다. 제일 먼저 나오는 말, ‘그리고(And)’는 제1장의 말이 그 앞 프롤로그의 언어와 연결되어 있는 부속적 코멘트라는 사실을 말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예수의 말을 도마가 기록하였다. 그리고 그가 말하였다.’ 이 때 는 기록자인 쌍둥이 도마일 수도 있다. 이 제1장의 로기온은 예수가 자기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에게 그 말씀을 들어야 하는 당위성을 제시하는 말일 수도 있고, 기록자 디두모 도마가 이 말씀을 기록하는 그의 목적을 설명하는 말일 수도 있다. 도마는 예수의 은밀한 말씀을 기록하였다. 도마는 물론 사람이다. 예수의 분신과도 같은 예수의 쌍둥이 사람이다. 그 사람이 기록한다는 행위를 했을 때는 반드시 그 행위의 목적이 있을 것이다. 도마는 도대체 왜 기록했는가? 기록이란 반드시 그 기록을 읽는 독자들을 전제로 한다. 그는 독자들에게 자기 기록의 목적을 전달하고 싶은 것이다. 인용부호 안의 내용은 기록자 도마가 한 말로 볼 수도 있다. ‘라는 3인칭으로 되어있는 것을 보면 이 말은 나레이터가 연출한 것이 된다.

 

기록자 도마는 말한다. 그가 기록한 것은 살아있는 예수의 말씀이되, ‘은밀한것이다. 은밀하다고 하는 것은 쉽게 알아들을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은밀한 말씀은 은밀하기 때문에 반드시 해석(interpretation)되어야 하는 것이다. 바로 해석 자체가 살아있는 예수의 말씀을 접하는 인간의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과정이기 때문에 은밀한 것이다. ‘은밀해석은 상통하는 것이다.

 

 

 전차경기장 스탠드 밑은 이와 같은 구조로 되어있어 바자르(시장)를 형성하는데, 하나의 석실 부스가 하나의 상점을 이룬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오늘날의 정통기독교도라고 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도마가 권유하고 있는 해석을 거부한다. 그리고 말한다. 예수의 말씀을 해석하지 말고 곧바로 믿어라! 예수의 말씀 그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해석할 필요가 없다. 곧바로 믿어라! 기록자 도마는 바로 이러한 태도를 거부하는 것이다.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열쇠는 예수의 말씀을 해석하는 우리의 내면적 각성의 과정에서 주어진다는 것이다.

 

왜 오늘날의 기독교는 해석을 거부하는가? 그것은 바로 2천 년 동안 빵빠레를 울려온 요한복음기독교의 승리의 나팔 덕분이다. 로고스기독론에 의하면 예수는 말씀이며 빛이다. 그것은 태초로부터(1:1), 아브라함이 나기 이전부터 있었던(8:58) 존재이다. 예수가 곧 말씀이라는 뜻은, 예수는 말씀을 매개로 하는 하나님 그 자체라는 뜻이다. 요한의 예수는 끊임없이 외친다. “내가 바로 그라는 것을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8:24, 8:28), “내가 바로 그라는 것, 예수의 자의식 속에서 이미 예수는 곧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청중들에게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명료하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10:30).

 

이 말을 정면으로 해석하기를 공포스러워하는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이 예수의 선포는 예수와 하나님의 완벽한 일치(complete identity)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나 의지의 일치(oneness of will or action)를 주장할 뿐이라고 에둘러대지만, 실제로 요한이 강력하게 주장하고 싶은 것은 살아있는 예수에게 전적인 신성을 부여함으로써 예수를 바라보는 인간들에게 해석의 여지를 상실케 하는 것이다. 만약 예수가 곧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예수는 신이 되고 만다. 그렇게 되면 예수는 오히려 헛도깨비가 되고 만다. 도케티스무스(Doketismus: ‘……처럼 보인다는 뜻의 도케오(dokeō)’라는 희랍어에서 유래된 말), 즉 가현설(假現說)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이 가현적 허구성을 방지하기 위하여 요한은 이미 1장에서 육화(肉化)라는 사상을 도입했다. 매우 절묘한 작전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1:14).

 

요한복음을 도마기독교 흐름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생각할 때, 요한복음 기술에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는 어법은 나는 이다(egō eimi)’라는 예수의 호언(豪言)이다. 이러한 어법은 타 공관복음서에서 두드러지지 않는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다’(6:35). ‘나는 세상의 빛이다’(8:12). ‘나는 양의 문이다’(10:7, 9). ‘나는 선한 목자다’(10:11, 14).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11:25).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14:6). ‘내가 참 포도나무다’(15:1, 5).

 

이러한 표현은 매우 자랑스럽게 2천 년 동안 암송되어 왔지만, 불교의 상식으로 말하면 바라밀(pāramitā)의 열쇠인 무아(無我, anātman)의 대전제를 망각하는 망언이요, 아집과 독선과 배타를 구현하는 비어(鄙語)일 수밖에 없다. 물론 이러한 말은 듣는 사람에게 확신과 믿음과 소망을 준다. 그러나 회의나 모색이나 탐구의 기회를 앗아가 버린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 나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유일한 생명의 떡이다. 너희들은 아래로부터 왔고 나는 위로부터 왔다. 위로부터 온 나야말로 항상 아래로부터 온 너희들 위에 군림한다. 나는 너희들이 위로 올라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다. 나는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이다. 너희들이 영생을 얻고자 한다면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딴 방법이 없다. 나를 믿고, 나를 따르고, 나에게 복종하고, 나를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로서 고백하라, 그리하면 너희는 구원을 얻으리라. 예수는 인간의 구원을 독점한다. 이러한 요한의 프로그램은 기막힌 성공을 거두었다. 2세기부터는 서서히 모든 기독교운동은 요한의 프로그램에 따라 변질되고 획일화되기 시작한다. 사실 우리의 마태ㆍ마가ㆍ누가의 공관복음서 이해도 요한의 필터를 거치고 있다. 도마의 필터를 통하여 공관복음서를 바라보게 되면 기독교의 그림이 전혀 달라질 수 있다.

 

도마복음이 말하려는 진리는 예수라는 한 인간이 선포하는 말씀 그 자체의 진리가 아니다. 그 말씀을 해석함으로써 나의 내면에 있는 빛을 밝히는 은밀한 과정에 내재하는 진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말씀의 해석은 반드시 발견되어야 한다. 발견이란 앙가쥬망(engagement, 정치참여)이다. 타인이 해석해놓은 것을 듣고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해석을 발견해가야 한다는 것이다. 발견이란 은밀함을 벗겨가는 과정이다. 발견이란 바로 나의 삶 속에 이루어지는 말씀의 체험이다. 살아있는 예수의 말씀이 나의 삶의 체험 속으로 참여하게 만드는 과정이다. 그것은 예수의 말씀인 동시에 나의 삶의 발견인 것이다. 나의 삶 속에 내재하는 우주적 생명의 환희의 발견인 것이다. 그럴 때 비로소 인간은 죽음을 맛보지 않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또다시 물어야 한다. ‘죽음을 맛보지 않는다는 뜻은 무엇일까?

 

 

 두로지역에는 도마가 이 지역에서 선교했다고 하는 구전의 전통이 강렬하게 남아있다. 지금 이 글에서 논의하고 있는 도마공동체의 영역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지금 내가 서있는 곳은 12세기 십자군이 지은 교회의 폐허 이지만, 재미있는 것은 이 교회가 도마에게 봉헌되었다는 사실이다. 십자군이 지은 교회는 대부분 세례요한에게 봉헌되었다. 도마교회는 매우 희귀하다. 십자군이 교회로 변형시키기 전에 이곳은 헤라클레스 신전이었고, 헤라클레스 신전 이전에는 또 멜카르트 신전(the temple of Melkart)이었다. 역사의 아버지 헤로도토스는 배를 타고 직접 이곳 헤라클레스 신전을 방문하였고 그 사실을 『역사 속에 상세히 보도하고 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최후의 만찬을 베풀고 고별담론을 펼친다. 그리고 자기는 곧 어디론가 갈 것이라고 말한다. 도마는 뭔 말인지를 몰라 꼬집어 묻는다: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우리가 알겠삽나이까?” 이때 예수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14:5~6)고 대답하는 것이다. 도마는 그 길을 찾아 북방선교에 나섰고 인도에까지 갔던 것이다.

  

 

 죽음의 해석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인간은 죽는 순간까지 살아있을 뿐이다. 인간에게 죽음은 물리적으로 체험되는 사태는 아니다. ‘맛본다는 것은 삶의 행위일 뿐이다. 그 맛보는 삶의 감각적 행위 속에 죽음이라는 메뉴가 들어있지 않다는 것은, 인간이 죽지 않는다는 사실판단의 명제는 아닌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생명의 고귀함을 드러내기 위한 심볼리즘일 뿐이다. 그 심볼리즘은 예수가 선포하는 천국의 해석과 관련되어 있다. 도마복음은 영생(永生)을 신앙의 미끼로서 실체화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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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가 말하였다: “이 말씀들의 해석을 발견하는 자는 누구든지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And he said, “Whoever discovers the interpretation of these sayings will not taste death.”

 

 

혹자는 말씀들의 해석을 발견하는과정을 개인적이라기보다는 집단적인 과정으로 주해하기도 한다. 당시 문맹률이 95% 이상을 차지했던 사회에 있어서 문서기록을 해석할 수 있었던 사람은 극히 제한된 인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운동은 궁극적으로 대중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이러한 갈등, 즉 포퓰리즘(populism)엘리티즘(elitism)의 괴리는 고대사회에 있어서는 심각한 문제였다. 그러나 예수가 살았던 그레코로만의 1세기는 과거 어느 시대에 비교하여도 문자와 지식의 보편화가 일어났던 시기였다. 그렇다고는 해도 도마의 기록을 일반대중들이 직접 읽고 해석했다는 것은 당대의 현실상황에서는 어불성설(語不成說)이었다.

 

이미 내가 이러한 문제에 관하여서는 나의 저서 기독교성서의 이해(서울: 통나무, 2007)에서 설진(說盡)하였다. 9낭송문화와 복음서를 참고하면 당대의 실제정황을 숙지할 수 있을 것이다. ‘도마가 기록하였다할 때, 그 기록은 주로 양피지(parchment) 위에 쓴 것인데2~4세기 콥트어 코우덱스는 파피루스를 사용한 것이지만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 사용한 소재는 주로 양피지였다, 그것은 매우 고급소재였으며 가격이 높았다. 그래서 대중적인 의사소통의 수단은 아니었다. 게다가 읽을 수 있는 사람은 몇 명 되지 않는다. 따라서 은밀한 말씀의 해석은 실제로 집단적으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다시 말해서 도마가 기록한 예수의 말씀들은 특정한 공동체의 리더에 의해 낭송된 것이다. 그 한 사람의 낭송을 동시에 많은 사람들이 듣고, 해석하게 되는 것이다. 혹은 낭송자가 해설까지 곁들여서 설교를 했다고도 추론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도마복음서의 성립연원을 생각할 때, 그 정확한 명칭이 어떠하든지 간에, 도마공동체의 존재를 그 배후에 연상치 아니할 수가 없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 말씀들의 해석을 발견하는 자라는 것은 도마공동체에로의 입단이라는 제도적 성격을 암시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두로에는 세계 최대규모의 화려한 네크로폴리스가 있다. 저 앞에 보이는 하드리아누스 개선문 안쪽으로 두로라는 메트로폴리스가 있고 그 밖에는 석관들이 즐비한 거대한 공동묘지가 있는 것이다. 로마인들에게는 죽은자들도 도시 구성원의 일원이었다. 죽음은 삶과 항상 공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도마공동체는 쿰란공동체와 같이 엄격한 규율을 지키면서 집단생활을 했던 그러한 공동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예수의 말씀을 사모하는 사람들의 매우 느슨한 정신적 유대관계 내지는 무형의 조직, 혹은 시나고그(Synagogue, 會堂)와 같은 어떤 커뮤니티 센터를 활용한 연대 같은 것이었을 수도 있다. 이들의 신념은 예수의 말씀의 전파 그 자체에 있었으며, 예수의 말씀을 미끼로 해서 사람을 공동체의 울타리나 규율 속으로 묶어두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들은 조직을 최소화시켰다. 도마기독교에 관해 깊은 연구를 한 패터슨 교수(Stephen J. Patterson)는 이와 같이 단언한다: “특별하게 도마공동체라고 집어 말할 수 있는 조직은 없었다. 그것은 차라리 느슨한 연대를 지닌 방랑자들의 운동이었다(There is no Thomas community per se, but rather a loosely structured movement of wanderers).” (The Gospel of Thomas and Jesus 151).

 

따라서 나는 해석의 발견도 집단적으로 해석하기보다는, 어떤 방식으로 이 메시지를 접하든지 간에, 궁극적으로는 개인의 실존적 각성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살아있는 예수의 말씀은 살아있기에 은밀하고, 은밀하기 때문에 해석되어야 하고, 끊임없이 발견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자기를 놓고 왈가왈부하는 제자들을 향해 예수는 이와 같이 외친다: 이놈들아! 너희들은 너희 앞에서 살아 움직이는 나를 외면하고, 죽은 자만 이야기하는 도다!” (도마복음서 제52. 略號 Th.52).

 

이 살아있는 예수를 만나는 대가(代價)는 무엇이냐? 기록을 읽고 해석한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고통스러운 것이다. 기록자 도마는 독자들에게 자기 기록의 해석의 고통에 대한 보상이나 미끼를 던져야 한다. 진리도 알고보면 판촉의 대상이다. 프로모션이 잘돼야 널리 수용되고 오래가는 진리가 되는 것이다. 도마가 판촉의 미끼로 독자에게 던지는 상금은 정말 두둑하다: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많은 주석가들이 제1장에서부터 은밀한 영지와 영생이라는 테마를 끄집어내서 도마복음이 영지주의 문헌임을 입증하려 한다. 그러나 고대사회에 있어서, 인간의 죽음이라는 문제는, 개인주의적 인권의식이 발달한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은 문제가 아니었다. 그리고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 영생이라는 문제는 부활·재림·최후의 심판이라는 황당한 시간의 사건들과 연계되어 있다. 그리고 요상하게도 과학적 상식이 발달한 사회일수록 이런 말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반사적으로 더욱 신화적 사유에 매달린다. 기독교인들이 영생한다는 것은 살아 영생한다는 것이 아니라물론 물리적 영생을 주장하는 광신 사교집단도 일시적으로 현대사회에 성행하기도 한다, 죽되 죽어서 천당에 가서 부활한 예수나 온전하신 하나님과 재결합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후 천상 재결합사상은 구약에도, 즉 유대교전통에도 명시되어 있지 않은 사상이다. 사후의 미래적 삶과 천국의 결합은 아주 기독론적인 초대 교회사상인데, 미안하게도 도마복음은 이러한 초대교회의 재림사상 이전의 기술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생각하는 영생의 개념으로는 도저히 접근해서는 안되는 문헌인 것이다. 도마복음의 예수는 이와 같이 말한다: 아버지의 나라는 이 땅 위에 깔려있다. 단지 사람들이 그것을 보지 못할 뿐이니라(Th.113).

 

인간은 누구든지 물리적으로 죽음을 경험치는 아니한다. 죽는 순간까지 인간은 살아있을 뿐이다. 인간에게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은 인간의 의식 속에서 물리적으로 일어나는 사태는 아닌 것이다. 그것은 순수의식일 뿐이요, 관념일 뿐이다.

 

도마는 죽음을 맛보지 아니한다라고만 기술하였다. 맛본다는 인간의 행위는 삶의 행위이며 생명의 감각적 과정이다. 죽은 사람은 맛볼 수가 없다. 살아있는 자만이 맛볼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죽음을 맛보지 아니한다는 것은 죽지 않는다는 황당한 이야기가 아니라, 맛보는 삶의 행위 속에 죽음이라는 메뉴나 광우병 쇠고기 반찬 같은 것이 들어있지 않다는 뜻이다. ‘죽음을 먹으면 인간은 빨리 죽어갈 것이요, ‘생명을 먹으면 인간은 삶의 희열을 느끼게 될 것이다. ‘죽음을 맛보지 아니한다는 것은 죽음이라는 물리적 사태의 부정이 아니라 삶의

환희를 강조하는 상징적 표현인 것이다.

 

이러한 나의 주석은 결코 궤변(詭辯)이 아니다. 내 해석을 궤변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늘날 기독교의 이해가 얼마나 교조화 되어 있고 얼마나 신화화 되어 있으며 얼마나 영생을 실체화 하고 있나 하는 것을 입증할 뿐이다.

 

도마복음서의 기술은 고도의 은밀한 심볼리즘으로 가득차 있다. 그것이 고대인들의 기술이라고 해서 오늘날 우리의 사유에 못미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오늘날 우리들의 유치한 사유를 반증할 뿐이다. 어찌 고대인들이라고 사람이 죽는다는 이 단순한 사실 하나를 몰랐을 것인가?

 

 

 예수가 혼인잔치에서 어머니 마리아의 요청으로 여섯 개의 돌항아리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이적을 행한 곳이 바로 가나(Cana)라는 곳인데, 이 이적설화는 요한복음에만 나온다. 혹자는 그 잔치가 예수 자신의 혼례장면이 변형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보통 이 가나를 나사렛에서 북쪽으로 고개 두 개 넘으면(7km) 있는 카프르 카나(Kafr Kana)로 알고 있지만 초기기독교사가 유세비우스도 가나는 레바논 두로 서남쪽에 있는 카나(Qana)라고 비정하였다. 카나를 가보면 지금도 초대교회 동굴이 남아있고 그 주변으로 13인물을 나타내는 경주 남산 마애불과도 같은 양식의 바위 부조, 그리고 혼인잔치를 상징하는 매우 질박한 조각들이 원시기독교의 리얼한 모습을 전하고 있다.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성화와 비교하면 얼마나 진실된 모습인가, 참으로 그 태고의 순결이 감동의 시선을 끌게 한다. 가운데 큰 부조가 예수상이고 그 주변에 우리의 도마도 있을 것이다. 최근 2006 7월까지만 해도 이스라엘은 이 지역의 헤즈볼라를 소탕한다는 명분으로 집중포격을 하여 1,500명의 무고한 백성을 죽였다. 구약을 숭상하는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폭력을 정당화시키는 것이 ‘율법’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쇠고기 파동과 같은 사태에서도 우리는 강대국의 율법적 폭력을 감지할 수 있다. 나는 레바논의 카나에서 지금도 핍박받고 있는 예수의 십자가 보혈을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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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성서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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