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장
어떻게 이토록 위대한 부유함이 이토록 빈곤함 속에 거하느뇨?
제29장
1예수께서 가라사대, “육신이 영혼으로 인하여 존재케 되었다면, 그것은 기적이로다. 2그러나 영혼이 몸으로 인하여 존재케 되었다면, 그것은 기적 중의 기적이로다. 3그러나 진실로 나는 어떻게 이토록 위대한 부유함이 이토록 빈곤함 속에 거(居)하게 되었는지 불가사의하게 생각하노라.”
1Jesus said, “If the flesh came into being because of spirit, it is a wonder. 2But if spirit came into being because of the body, it is a wonder of wonders. 3Indeed, I am amazed at how this great wealth has come to dwell in this poverty.”
본 장은 역시 제28장과의 연속적 흐름 속에서 파악되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처음에 언뜻 보면 매우 수수께끼처럼 들리는 표현들이지만, 세 절의 문장 속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명백하게 상호관련된 항목을 추출해낼 수 있다.
부유(富裕) Wealth |
빈곤(貧困) Poverty |
영혼 Spirit(pneuma) |
육신, 몸 Flesh(sarx), Body(soma) |
영혼을 부유한 것으로 보고, 육신을 빈곤한 것으로 보는 사유는 모든 이원론적 사유(dualistic thinking)의 전형이지만 여기 예수의 말씀의 기조는 이 양자의 분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양자의 혼융(渾融)에 있다는 데 그 특색이 있다. 영혼과 육체를 각기 개념화시켜 논의하는 것 자체가 양자를 이원화시켜 생각하는 당대의 통념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양자는 어디까지나 방편적으로 구분되어질 수는 있으나 인간실존에 있어서 실체적 분리될 수는 없는 것이다(distinguishable but not separable), 인간이라는 존재는 영혼과 육신이 하나로 결합되어 있는 한에 있어서만 인간이며, 그 결합된 모습이야말로 바로 인간 현존재인 것이다.
1절 → 2절 → 3절로 진행되어가는 과정은 점차 그 경이로움의 도수가 진해지는 방향으로 그 주절의 표현이 이루어져 있다. ‘기적 → 기적 중의 기적 → 불가사의’라는 표현은 그 경탄의 도수가 강해지고 있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제1절은 ‘육신의 존재케 됨’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제2절은 ‘영혼의 존재케 됨’에 관한 것이다. 이 양자는 실제로 그 강조점에 차이가 있을 뿐 동일한 사태를 다르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제1절의 ‘육신이 영혼으로 인하여 존재케 됨’이란 육신이 영혼을 담지하기 위하여, 그러니까 육신이 영혼의 집으로서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육신이 이와 같이 영혼을 담지하기 위하여 존재케 된 것은 매우 경이로운 사건이라는 것이다. 여기서도 영혼은 육신이라는 담지자가 없이 고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생각이 깔려있다. 그리고 또 여기에는 예수의 수육이라는 사건이 암시되어 있는 것이다. 제28장의 ‘나는 육신으로 세상사람들에게 나타났다’는 메시지를 다시 한 번 표현을 달리하여 말한 것이다.
제2절의 ‘영혼이 몸으로 인하여 존재케 됨’이란 표현에서 주체는 어디까지나 ‘영혼’이다. 그런데 이 영혼이 몸으로 인하여 존재케 되었다는 것은 바로 앞장의 표현 중에서 ‘세상사람들에게 나타났다’라는 측면을 강조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앞 절의 육신(flesh)이 여기서는 몸(body)으로 달리 표현되어 있는데, 여기서 ‘몸’은 실제로 ‘세상사람들’을 지칭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나의 영혼이 세상 사람들로 인하여 구원의 미션을 가지고 이 취한 세상 속에 존재케 되었다는 사실이야말로 기적 중의 기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맥락적 함의를 떠나 ‘육신이 영혼으로 인하여 존재케 됨’과 ‘영혼이 육신으로 인하여 존재케 됨’이라는 두 사태를 동일사태에 대한 강조점의 차이로 볼 수도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이 두 사태에 대한 최종적 경이는 무엇인가? 바로 이토록 위대한 부유함이 이토록 빈곤함 가운데 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위대한 영혼이 빈곤한 육신 속에 자신의 안식처를 만들어 놓고 있다는 인간실존의 사태야말로 최종적 불가사의라는 것이다. 빈곤한 육신이야말로 위대한 풍요로운 영혼의 영원한 동반자이며 고향이며 지향점이며 구속의 대상이다. 이 불가사의는 예수의 실존적 모습인 동시에 우리 모든 인간의 실존적 모습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는 인간을 대상화하지 않는다. 구원의 수단으로 비하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구세주의 의식을 가지고 인간을 굽어보지 않는다. 자신을 포함한 인간 모두의 실존적 모습에 대한 경이로움을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 파로스 등대 자리에 세워진 카이트베이 요새 1층 옥상의 베란다에서 내다보이는 지중해. 이집트 여인들이 한가로운 정취를 만끽하고 있다. 임진권 기자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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