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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복음한글역주, 제31장 - 선지자와 고향, 그리고 의사와 의사를 아는 자들 본문

고전/성경

도마복음한글역주, 제31장 - 선지자와 고향, 그리고 의사와 의사를 아는 자들

건방진방랑자 2023. 3. 21. 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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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자와 고향, 그리고 의사와 의사를 아는 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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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예수께서 가라사대,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2의사는 그 의사를 아는 자들을 고치지 아니 한다.”

1Jesus said, “A prophet is not acceptable in the prophet's own town; 2a doctor does not heal those who know the doctor.”

 

 

4복음서에 공통으로 나오고 있는 이 유명한 말의 한 원형을 우리는 도마복음에서 발견하게 된다. 우선 4복음서의 문구들을 한번 살펴보자.

 

 

(13:57)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6:4)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4:23~24) 23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원아! 너를 고치라하는 속담을 인증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의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하리라.” 24또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4:43~45) 43이틀이 지나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며, 44친히 증거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힘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 45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

 

 

4개의 파편을 비교해보면 공관복음서(마태ㆍ마가ㆍ누가)는 한결같이 예수가 자기 자신의 고향인 나사렛에 와서 예수의 전력이나(일개 동네 목수였다), 부모나 가족관계를 잘 아는 사람들에 의하여 배척당한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뱉어놓는 이야기로서 구성되어 있다. 예수의 동선은 가버나움과 나사렛 주변, 그러니까 갈릴리 지방 내에 국한되어 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특이하게 이 사건을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돌아가는 과정에다가 설정해놓고 있다. ‘고향이라는 의미가 결코 나사렛이라는 좁은 지역에 한정되지 않는다.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예수는 사마리아를 경유하게 되었고, ‘야곱의 우물주변에서 사마리아의 여인에게 영생의 샘물을 선사케 되는 그 유명한 사건을 체험한다. 그리고 사마리아를 떠나 갈릴리로 돌아가면서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공관복음서는 선지자가 고향에서 존경(환영) 받지 못한다는 메시지를 예수 자신이 처한 곤요로운 상황을 정당화하는 메시지로서 긍정하고 있지만,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서의 의미맥락을 객관화시키면서 그 메시지를 부정한다. ‘선지자가 고향에서 존경받지 못한다는 통념에 대한 반역을 일으킨다. 즉 예수는 이러한 통념과는 달리 고향에서 영접을 받았다는 것이다. 혹자는 이러한 통념을 거스르는 상황을 무마하기 위하여, 요한복음의 고향(파트리스, patris)’은 나사렛을 가리킨 것이 아니라, 그의 출생지인 베들레헴이나, 유대 지방(Judea), 혹은 그의 정신적 고향(spiritual homeland)이자 유대교의 센터인 예루살렘을 가리킨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저자는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근본적으로 전제하지 않을 뿐 아니라, 다윗의 혈통과 관련된 베들레헴 탄생의 사실을 정면으로 거부한다(7:42), 전후 문맥으로 볼 때 파트리스(고향)는 사마리아라는 이방지역에 대한 유대인들의 본고장(his own country), 즉 유대 지방과 갈릴리 지방을 폭넓게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예수는 유대인들과 대적적 관계에 있는 사마리아 지방의 사람들에게도 환대를 받았으며, 또 유대인들의 본고장인 유대지방이나 갈릴리에서도 환대를 받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선지자는 고향에서 대접을 받지 못한다는 통념은 역전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도마복음 로기온과 요한복음 기사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요한복음 기자는 공관복음서의 논리를 여유롭게 역전시킬 수 있을 만큼, 거리를 가지고 자기의 드라마를 꾸며나가고 있다. 그러나 선지자가 고향에서 대접받지 못한다는 예수의 메시지는 빼놓을 수 없을 만큼 중요하게 회자되었던 로기온자료였음에 틀림이 없다.

 

공관복음자료와 도마자료를 비교하여 보면, 도마자료에 가장 근접하는 것은 누가자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마태와 마가는 모두 밖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다라는 이중부정의 표현을 취하여 결국 존경을 받는다는 사실에 대한 강조를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맥락적으로 볼 때, 이 메시지는 어디까지나 고향사람들에 의하여 배척당한 사실을 전제를 하고 있는 것이므로 이러한 이중부정의 표현은 심히 에두른 표현일 뿐 아니라 문맥을 명료하게 드러내지 않는다. 마태와 마가는 누가와는 다른 전승에 기초해 있거나, 누가와 같은 계열의 로기온을 오사하거나 와전시킨 것일 수 있다. 공관복음서 중에서는 누가가 가장 오리지날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재미있는 사실은 마태와 마가에는 의원’(의사)에 관한 말씀이 빠져있는데, 누가에는 의원에 관한 로기온이 들어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누가의 맥락은 명료하지 않다. ‘의원아! 너를 고쳐라(Physician, heal yourself)’라는 속담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떠한 주석가도 명료하게 해석하지 않는다. ‘의사여! 남 잘 고친다고 자랑 말고, 네 병이나 고쳐라라는 야유 섞인 말인지(공동번역), ‘딴 데서 행한 기적을 고향에서도 행하여 보이라라는 뜻에 상응되는 어떤 의사의 기적적 과시를 함축하고 있는 말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유대인 속담에, ‘의원아! 네 발 저는 것이나 고쳐라(Physician, heal your own limp).’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불트만은 아랍 격언(Arabic proverb)으로서 타인은 잘 고치지지만 자기 자신은 병이 난 의사(A doctor who cares other people and is himself ill).’ ‘놀라운 것은 안과의사가 되려는 사람이 눈병자라는 사실이다(A wonderful thing is a man with diseased eyes who proposes to be an oculist).’와 같은 용례를 든다.(The History of the Synoptic Tradition 107). 아마도 자신의 병신됨이라는 것은 자기 고향에서의 행위와 연결되는 어떤 의미체계일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맥락으로 해석해도 그 전후의 인과관계가 그다지 명료하지는 않다. 여기 의사가 하나의 주제로 거론된 것은 단지 선지자가 고향에서 배척받는다는 사실에 상응하는 또 하나의 메타포로서, 예수의 삶과 관계없는 객관적 담론으로서 제시된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예수의 삶의 행위와 관련되어 있다. 실제로 예수가 한 일이란 예언자적인 언행과 병든 자를 고치는 일이었다. 예수는 선지자였고 의사였다.

 

불트만은 이 도마복음서의 구절에 해당되는 옥시린쿠스의 사본을 보았고, 도마복음서의 로기온자료야말로 누가자료의 원형에 해당되는 것이라고 간주하였다. 그렇게 되면 누가가 도마자료를 잘못 베낀 것이 된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불트만의 이러한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누가자료를 보고 도마가 자료를 구성한 것처럼 생각한다. 이것은 도마자료를 공관복음자료의 원형으로 보기를 꺼려하는 편견의 소산일 뿐이다. 도마자료에 의하여 기존의 공관복음서의 권위가 훼손되는 것을 암암리 꺼려하는 것이다. 그러나 독자들이 이 로기온자료에 한하여 공관자료와 도마자료를 비교하여 본다면, 어느 것이 더 시대적으로 앞서는, 더 소박하고 의미가 명료한 원형인지 쉽게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도 이러한 편견 때문에 도마복음서의 진가가 묵살되고, 후대의 영지주의문헌이라는 개념적 규정 속에 묶여있는 것이다. 도마복음서의 필사시기와 무관하게, 그 로기온의 전승은 최소한 큐복음서와 같은 시기의, 혹은 그보다 빠른 또 하나의 자료체계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마가 1:1-6을 읽어보면, 마가는 이러한 맥락없는 로기온을 바탕으로 하여 예수가 고향으로 들이기는 내러티브를 구성했다는 것을 확연하게 알 수 있다.

 

선지자가 고향에서 대접을 받지 못한다거나, 의사가 자기를 너무도 잘 아는 환자를 잘 고치지 못한다는 일반적 논의와 관련하여 우리는 예수의 행한 일들의 허구성을 적나라하게 지적할 수도 있다. 점쟁이가, 점쟁이를 개인적으로 너무도 잘 아는 사람들 앞에서는 점을 치기가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점친다는 것 자체가 이기 때문이다. 여기 문제가 되고 있는 맥락도 비슷하다. 예수가 행한 일의 대부분이 상식적 사태가 아닌, 상식적 인과를 거부하는 기적적 사태이기 때문이다. 갈릴리 호수의 풍랑을 잦게 하고, 악령들을 돼지떼 속으로 집어넣어 버리고, 예수의 옷에 손을 댄 여인의 병을 낫게 하고, 죽은 야이로의 딸을 살려내는 등등의 일들을, ‘저 놈이 요셉의 아들 목수놈 아니야?’ ‘에미가 마리아고, 그 형제들이 우리와 같이 사는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이 아닌가?’라고 코웃음치는, 어릴 적부터 보아온 고향 촌로들 앞에서 그러한 기적을 행하기는 실로 어려운 것이다. 촌로들의 상식이 문제가 아니라 예수의 기적이 더 큰 문제일 수도 있다.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고향으로 돌아와 정의로운 판결을 내리는 암행어사 이몽룡을 고향 사람들이 배척할 리 만무하다. 이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주유천하, 기나긴 고난의 행군 끝에 고향으로 돌아온 공구(孔丘)를 노()나라 사람들은 환대하였고 그를 국부(國父)로 모시었다. 오늘날의 국회의원도 국회에서 정의로운 발언을 하면 누구보다도 고향사람들이 먼저 그를 아끼고 사랑한다. 어찌 선각자가 고향에서 대접받지 못한다는 논리가 보편적 정칙일 수 있을까보냐? 돌아온 예수의 화려한 행적이 더 큰 문제가 아니겠는가?

 

이러한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는 도마복음의 깊은 의미맥락을 철저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선 도마복음에는 기적을 행하는 등등의 내러티브(사건기술양식)가 전제되어 있질 않다. 그러므로 사복음서는 그 내러티브가 로기온의 내용을 규정해버리지만, 도마복음 속의 살아있는 예수의 말씀은 그러한 드라마적 맥락의 한 요소가 아니라 진리를 발견하는 사람들에게만 그 의미가 드러나는 은밀한 그 무엇이다. 따라서 해석자가 어떠한 맥락에서 이 말씀을 이해하는가에 따라 그 의미는 달라질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이 공유하는 상식적 도덕의 축적을 성취해온 사람은 물론 고향에서 배척받을 일이 없다. 그러나 인간의 도덕이 꼭 그가 처한 시대의 상식적 인과와 일치되는 것은 아니다. 상식적 도덕의 인과를 뛰어넘는 행위도 때로는 상식에 쩔어버린 정체된 역사를 변혁시키는 힘이 된다. 예수의 기적은 마술이 아니라 이러한 의 상징적 표현일 수도 있다. 고향사람들은 과거에 자기들이 알았던 인간의 모습에만 집착하여 그 인간이 현실적으로 성취하고 있는 힘의 리얼리티를 인정하지 못한다. ‘우리가 잘 아는 아무개라고 말하지만, 이란 살아움직이는 진리의 앎이 아닌, 이미 시간 속에 형해화되어버린 죽어버린 앎이다. 실제로 그들은 예수가 누구인지를 모르면서 잘 안다고 떠벌리는 것이다.

 

초등학교동창회를 나갔을 때, 지금 나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초등학교시절에 그들이 알았던 만을 가지고 우정과 의리와 애정을 운운하는 환경에 봉착했을 때, 누구든지 깝깝한 느낌만 들 것이다. ‘요셉의 아들인 동네 목수와 지금 아버지의 아들로서 은밀한 말씀을 전하고 있는 예수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예수가 말하는 진리는 이러한 가족관계로부터의 단절과 해탈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Th.16, 55, 99, 105). 따라서 여기 궁극적인 주제는 단독자인 예수의 실존적 고독이다. 예수는 자기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의 사람들의 인식의 한계와 투쟁하고 있는 것이다. 술취한 사람들, 가슴속이 눈멀어 보지 못하는 사람들의 거짓된 인식과 타협하지 못하는 예수의 고독이 여기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고독은 예수라는 실존의 고독인 동시에 예수운동에 참여하는 모든 방랑자의 고독이기도 했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러한 고독을 자기 삶 속에서 실천함으로써 진리의 길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바알베크 바카스신전의 내부 모습. 바알베크에서는 작은 신전(Small Temple)’이라고 부르지만 아테네의 파르테논신전보다도 크다(길이 69m, 36m), 로마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게 조각된 신전으로 알려졌다. 아직도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밖에는 33개의 계단(3단식)이 있고, 내부는 프로나오스와 나오스(지성소)로 나뉘고 그 사이는 두 단의 계단이 있다. 세부적으로 아름다운 조각이 많이 있으며 전체적인 짜임새가 탁월하다. 혹자는 이 성전이 비너스/아스타르테에게 바쳐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옆의 주신전인 주피터 신전의 짝으로 지어졌으며 주피터컬트 신자들의 이니시에이션의 용도로 쓰인 곳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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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성서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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