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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복음한글역주, 제26장 - 네 눈에서 들보를 빼라, 그제야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리 본문

고전/성경

도마복음한글역주, 제26장 - 네 눈에서 들보를 빼라, 그제야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리

건방진방랑자 2023. 3. 21.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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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

 

 

네 눈에서 들보를 빼라, 그제야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리

 

 

26

1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는도다. 그러나 너는 네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는도다. 2네 자신의 눈으로부터 들보를 빼낼 때에야 비로소 너는 밝히 보리니, 그제야 너의 형제의 눈으로부터 티를 빼줄 수 있으리라.”

1Jesus said, “You(sg.) see the speck that is in your brother's eye, but you do not see the beam that is in your own eye. 2When you take the beam out of your own eye, then you will see clearly to take the speck out of your brother's eye.”

 

 

큐복음서에 나오는 예수 말씀의 핵심자료에 속하는 파편을 도마복음서에서 발견하는 것은 항상 경이롭고 즐거운 일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료의 대조를 통하여 초기 예수운동으로부터 초기기독교가 어떻게 형성되어갔는지를 명료하게 더듬어볼 수 있다. 우리가 7:3~5, 6:41~42에 나오는 복음서 자료에서 받는 인상은 예수의 말씀이 마치 인류보편을 향해 외치는, 구체적 맥락이 없는 메시지처럼 느껴져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더 강렬한 보편적 진리인 것처럼 해석되어왔겠지만, 당대 팔레스타인의 한 청년 예수의 말이 역사적 맥락을 결여한 그러한 보편적 메시지라고 상정하는 것은 사실 허무맹랑한 것이다. 역사적 예수는 역사적 인간이며, 역사적 인간은 그 인간이 실존한 환경의 제약 속에서 언어를 구성한다. 역사적 예수는 철저히 역사 속에 있을 수밖에 없다. 과연 예수의 세계인식이 어느 정도에 머무르고 있었는지, 과연 그의 인류개념이 어떤 한계를 지니고 있었는지도 항상 생각해봐야 할 문제이다.

 

여기서 우선 는 콥트어로 단수형을 취하고 있으며, 따라서 구체적인 실존을 가리키고 있다. 는 예수 곁에서 생활한 개체일 수밖에 없다. 너는 예수운동에 참여한 도반들(followers)’이다. 25에서 이웃이라는 개념이 형제라는 개념으로 그 외연이 축소되어 있는 사실이 지적되었듯이, 여기서도 너 형제의 관계는 일관되게 지속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큐의 기록자는 도마류의 원자료의 개념을 그대로 계승하였다. 그러니까 형제라는 관계설정은 이 로기온이 예수운동의 참여자들 사이에서 일어난 문제에 대한 예수의 훈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로기온은 개인의 실존적 문제이기보다는 예수운동의 참여자들의 그룹 아이덴티티(corporate identity)에 관한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큐자료를 보자!

 

 

(7:3~5) 3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5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6:41~42) 41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2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

 

 

우선 마태자료와 누가자료를 검토해볼 때 도마자료가 과연 양 자료 중 어떤 자료에 더 가깝게 가는지를 판단하기는 힘들다. 아라이(荒井 献)는 여기 도마자료가 마태자료와 더 친근성이 있다고 말하지만(164)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마태자료와 누가자료 중에서 도마자료와 중복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7:4와 눅 6:42a가 그것이다. 즉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남의 눈의 티를 빼어주겠다는 호의를 베풀려 하는 행위에 관한 것이다. 이러한 행위에 관한 언급은 사실 문맥상으로 볼 때 매우 리던던트(redundant: 불필요하게 중복됨)한 것이다. 문맥을 잘 더듬어보면 이 리던던트한 부분을 큐자료에서 도마가 빼내버리고 기술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도마자료에다가 큐의 기록자가 이 부분을 강조점을 두기 위하여 첨가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도마자료가 큐자료보다 더 앞선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모든 종교운동가들에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남을 구원해주겠다는 열의에 불탄 인간들의 오류에 관한 것이다. 기독교가 매우 열렬한 전도주의나 구세주의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오해되고 있지만 예수운동은 오히려 이러한 과도한 전도주의나 구세주의를 거부하고 있었던 운동이었다는 그 실상이 여기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눈에는 티가 있게 마련이다. 사실 눈에 티가 있어도 시력에는 큰 장애가 없다. 그러나 공연히 남의 눈의 티가 보인다고 그 티를 제거한답시고 달려들었다가는, 그 눈에 말뚝을 박아 영원히 시력을 상실케 하는, 하고 많은 사례를 우리는 목격할 수 있다.

 

길에 지나가는 잘 생긴 여인을 붙잡고 코를 높혀주는 수술을 해주겠다고 꼬여 결국 그 여인의 천연의 미모를 망쳐놓는 성형외과 뚜쟁이의 오류와 동일한 오류를 대부분의 종교운동가들이 범하는 것이다. 예수는 예수운동의 도반들에게 타인의 구원이 아닌 자기의 반성을 강렬하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타인의 눈의 티를 발견하려고 애쓰지 말고, 자신의 눈의 대들보를 없애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공자의 로기온자료에도 다음과 같은 말씀이 중용에 적혀있다.

 

 

활쏘기는 군자의 덕성에 비유될 만하다. 활을 쏘아 정곡에서 빗나갔으면, 항상 그 오류를 되돌이켜 자기 몸에서 찾는다.

, 有似乎君子. 失諸正鵠, 反求諸其身. 중용14.

 

 

그리고 또 말한다.

 

 

군자는 항상 자기 내면을 살펴보아 티가 없어야, 그 마음에서 발출하는 뜻에 부끄러움이 없다. 범인들이 군자에 도저히 미치지 못하는 점은 바로 사람들이 쳐다보지 않는 홀로만의 내면의 덕성에 있다.

君子內省不疚, 無惡於志. 君子之所不可及者, 其唯人之所不見乎! 중용33.

 

 

논어에도 관련된 언급이 전자의 경우 팔일7·16에 있고, 후자의 경우 안연4에 있다.

 

예수의 말은 공자의 반구저기신(反求諸其身)’이나 내성불구(內省不疚)’라는 말과 상통한다. 그리고 중용내성불구를 결국 신독(愼獨, 홀로 있을 때 삼감)’과 연결시켰고, 이것은 대학에서는 혈구지도(絜矩之道)’와 연결되고 있다. ‘혈구지도란 한마디로 말하면 ()’를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지 눈에 들보를 끼고 있는 놈이 내 눈의 티를 빼내주겠다고 덤벼들면 기분이 나쁠 것이다. 따라서 나도 내 눈의 들보를 빼지 않으면서 남의 눈의 티를 빼겠다고 덤벼들면 의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다. 논어』 「안연21에는 공자께서 번지에게 하시는 말씀 중에 이런 말이 있다: “자신의 결점을 공격하고 타인의 결점을 공격하지 아니 하는 것, 그것이 사특함을 닦아 없애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니[攻其惡, 無攻人之惡, 非脩慝與]?” 이와 같이 동···금의 시상은 하나로 상통한다. 오직 후대의 기독교가 이러한 오리지날한 소박한 지헤를 잘못 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은 이러한 논점이 남의 눈에서 티를 빼주는 작업을 포기하라는 명령으로 해석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나의 눈에서 들보가 완전히 제거된 후에만, 그러한 도덕적 순결성이 확보된 후에만 비로소 남의 눈의 티를 제거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수신 - 제가 치국 평천하를 말한다 해서, 수신(修身)이 완료되어야만 제가(齊家)가 시작되고, 제가가 완료되어야만 치국이 시작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논리와 같은 맥락에서 해석되어야 하는 것이다. 예수운동에 참여한 자들은 서로가 서로에게서 눈의 티를 제거해주는 관심을 보임으로써, 그 예수운동의 그룹 아이덴티티가 진보하는 것이다. 그러한 필요성은 있으되, 항상 전제되어야 할 것은 내 눈 속에 더 큰 티, 즉 대들보 같은 말뚝이 들어있을 수 있다는 자성(自省)의 자세를 견지하지 않는 한 아버지의 나라운동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세는 어차피 인간관계로서 형성되는 것이다. 관계 속에서 서로에게 구원의 관심을 보이는 것은 정당하지만, 그 대전제는 항상 자기 눈의 들보를 볼 줄 아는 깨달음이다. 이것을 불타는 ()’이라 표현했고, 공자는 신독(愼獨)’이라 표현했던 것이다. 심리치료사의 대부분이 자기 심리가 병들어 있다. 타인의 구원을 외치는 자들의 대부분이 진정한 구원의 대상이다. 이렇게 밥맛없는 종교행태가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주류라고 말할 수 있는 흐름의 위선을 형성하고 있다. 아마도 초기기독교에도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는 그러한 위선이 판을 쳤던 모양이다. 그래서 공관자료는 이 위선자들아!(You hypocrite!)’라는 표현을 첨가한 것이다.

 

바빌로니안 탈무드』 「아라킨(Arakin)16b에는 이 장의 내용과 비슷한 말이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은 가르침이 있었다. 랍비 타르폰(Rabbi Tarfon)이 말하였다: ‘과연 이 세대 중에서 참으로 충고를 받아들이는 자가 한 사람이라도 있을까? 그에게 누군가 네 눈으로부터 티를 제거하라고 말하면, 그는 곧 네 눈에 있는 들보나 먼저 제거하라고 반박할 것이다.’”

 

그리고 제25장과 제26장에 똑같이 에 관한 비유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도 주목할 만한 텍스트의 사실이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는 공관자료의 표현이 도마 25장에서는 그 사람을 네 눈의 동자처럼 보호하라로 되어 있고, 그에 연이은 26장에서는 눈의 티를 빼다라는 주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25장은 예수운동 참여자들의 호상적 보호를 말하였고, 26장은 예수운동의 참여자들의 내성을 통한 정신적 고양을 말하고 있다. 둘 다 예수운동 참여자들의 그룹 아이덴티티와 관련된 로기온이다.

 

 

이집트 카이로, 콥틱기독교 교황청, 여기에 마가(St. Mark the Apostle)의 몸이 안치되어 있다. 아타나시우스(20대 교황)의 묘도 여기에 있다. 마가는 콥틱기독교의 초대 교황으로 추존되고 있다. 현재 117대 교황은 시누다 3(His Holiness Pope Shenoud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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