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장
취하여 목마름을 모르는 자들이여
제28장
1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이 세상 한가운데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나는 육신으로 세상사람들에게 나타났다. 2나는 그들이 모두 술에 취하였음을 발견하였다. 나는 그들 어느 누구도 목마른 자를 발견할 수 없었다. 3나의 영혼은 사람의 자식들을 위하여 고통스러워 하노라.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의 가슴속이 눈멀어 보지를 못하기 때문이요, 또 텅 빈 채 이 세상으로 왔다가, 텅 빈 채 이 세상을 떠나기만을 갈구하기 때문이다. 4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들은 확실하게 취해 있도다. 그들이 그들의 술을 뒤흔들게 될 때에는 그들은 그들의 생각을 바꾸게 되리라.”
1Jesus said, “I took my stand in the midst of the world, and I appeared to them in flesh. 2I found all of them intoxicated, and I did not find any of them thirsty. 3My soul ached for the sons of men, because they are blind in their hearts and do not have sight; for empty they came into the world, and empty too they seek to leave the world. 4But for the moment they are intoxicated. When they shake off their wine, then they will change their ways.”
도마복음에서 소위 ‘영지주의적’ 내음새가 짙게 나는 장이라 말할 수 있을런지도 모르겠다. 요한복음의 로고스기독론적 사유의 기본적 틀이 이미 본 장에 함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도마복음을 후대의 영지주의 계열에서 성립한 문헌이라고 규정할 수는 없다. 영지주의라는 것 자체의 규정성이 애매할 뿐 아니라, 요한복음에 나타나는 영지주의적 2원론의 틀과 여기에 드러나는 영지주의적 사유는 정확하게 부합하지 않는다. 이러한 장을 후대의 영지주의 파편의 삽입이라고 보는 학자도 있겠지만, 원래 예수의 오리지날한 사유의 한 켠에 영지주의적 측면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영지주의의 핵심은 ‘구속신화(redeemer myth)’라 할 수 있는데 불트만은 이것을 너무 특별한 신화적 세계관의 산물로 해석하여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였다. 내가 생각하기엔, 구약의 초월적 인격신관 그리고 지혜문학전통을 플라톤철학과 결합시켜 창조적으로 오석(誤釋)하면 항상 영지주의는 저절로 생겨나게 마련이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이나, ‘동굴의 비유’와 같은 세계관이 당대 헬레니즘의 세계에서 근세의 인식론적 성찰과 같은 형태로서 받아들여졌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것은 또 하나의 신화적 담론으로서 헬레니즘시대의 보편적 틀을 형성했던 것이다. 유대인들은 유일신과 인간세와의 대립적 긴장관계를 영지라는 매개로서 화해시키려고 노력하였고, 영지의 구현체로서의 대속자의 존재를 새롭게 등장시켰다. 영지주의는 구약과 플라톤의 창조적 오석(a kind of creative misinterpretation both of Plato and the Bible)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오석(誤釋)을 또 다시 오석하면 기독교와 같은 1세기 후반의 종교운동이 생겨나는 것이다.
우선 여기 ‘나는 이 세상 한가운데 자리를 잡았다(I took my stand in the midst of the world)’라는 표현은 16장 4절의 ‘홀로 서다’라는 표현과 관련되어 있다. ‘서다’라는 표현은 어떤 확고한 존재의 결단을 나타내고 있다.
‘나는 육신으로 세상사람들에게 나타났다(I appeared to them in flesh)’라는 표현에서 ‘나’는 ‘육신’ 이외의 존재일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세상사람들에게 나타났다’라는 표현은 세상 이외의 곳에서 세상으로 진입하였다는 것을 암시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과연 도마복음 속에서 예수의 자기이해가 육신에 대하여 대자적인 영(靈)으로서 자신을 전적으로 규정하고 있는가, 그리고 과연 이 세계와 이 세계 밖의 어떤 영역을 이원적으로 규정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부정적이다. 도마복음은 세상과 세상 밖을 어둠과 빛으로 대비시키지 않는다. 그리고 세상이 비실재적 폄하의 대상이며, 세상 밖의 빛의 세계만이 실재라고 믿는 플라톤적 가치판단이 여기에는 배제되어 있다. 그러한 플라톤적 사유를 고지식하게 밀고가면 수육(受肉)의 예수는 결국 가현적 존재(docetic being, dokēsis)일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천박한 영지주의에 함몰된다. ‘나는 육신으로 세상사람들에게 나타났다’라는 표현은 결코 영·육과 세상 안·세상 밖이라는 이원적 대립을 전제로 하지 않은 긍정적 표현이다. 물론 그 양자의 구분은 전제되어 있지만 그 구분은 방편적 표현이며 실체적 이분은 아니다. 다음 장(Th.29)에도 이러한 영·육의 착종(錯綜) 문제가 되풀이 되고 있다.
요한복음 1:14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라는 구절에서 명백한 사실은 그 예수는 로고스(빛)이며,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이며, 그는 자기 스스로의 결단에 의하여 세상에 나타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하나님에 의하여 어둠(세상) 속으로 파견되었다는 것이다(요 3:16), 이러한 ‘파견’의 사상이 영지주의의 핵을 이루는 것이지만 그러한 노골적인 영지주의적 신화는 여기에 나타나지 않는다(cf. 딤전 3:16). 예수는 스스로의 결단에 의하여 이 세상 한가운데 자리를 잡았고, 육신으로 세상사람들에게 나타난 것이다. 그러니까 도마복음의 소박한 원형적 사유가 요한복음의 신화적 로고스기독론으로 드라마적 각색을 더하여 간 발전경로를 우리는 쉽게 추론할 수 있다. 도마의 예수는 매우 중립적이며 자신의 실존적 사실만을 기술하고 있다. 자신을 하나님의 독생자라고 떠벌이지 않는다.
도마복음 | 요한복음 |
소박한 원형적 사유 | 진화적 로고스 기독론 |
“나는 육신으로 세상사람들에게 나타났다” | 예수는 로고스로서, 하나님에 의해 어둠 속에 파견됨 |
‘세상사람들이 모두 술에 취하여 있음을 발견하였다’라는 표현은 부정적인 함의를 지닌다. 앞서 도마 13:5에서는 ‘취함(intoxication)’은 매우 긍정적인 함의를 지녔지만, 여기서는 취했다 하는 것은 정신이 흐려지고 진리를 인지할 능력이 사라진 비합리적 탈선(disorientation)의 상태를 가리킨다. 그러나 ‘취함’은 ‘깨임’의 가능성을 내포한 일시적 상태이다. 도마복음에는 인간의 사태에 대한 절대적 규정성이 별로 없다. 따라서 세속적 인간이 어둠의 자식들로서 부정적으로만 규정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구원의 대상으로 비하되고 있는 것만은 아닌 것이다. 인간은 깨임의 가능성을 스스로 구비한 존재이다. ‘술에 취함’은 ‘목마르지 않음’과 연결되고 있다. 여기서 ‘목마름’이란 갈증이라는 생리적 상태로서의 부정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갈망’이며 바람직한 것이다. 도마 1장에 ‘말씀들의 해석을 발견하는 자’라는 표현이 있었고, 제2장에는 ‘구하는 자는 찾을 때까지 구함을 그치지 말지어다’라는 표현이 있었다. 도마복음은 모두(冒頭)에서부터, 발견과 추구를 내걸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여기서 말하는 목마름 즉 갈망과 관련되어 있다. 술에 취하여 있다는 것은 잘못된 방향으로 갈증이 충족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술에 취하여 있는 세상사람들은 목마름을 느끼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것 역시 몽롱한 탈선상태인 것이다.
3절에서 예수는 자신이 이 세상에 서있는 이유, 육신으로 세상사람들에게 나타난 이유, 그 실존적 고뇌를 고백하고 있다. ‘나의 영혼은 사람의 자식들을 위하여 고통스러워 하노라.’ 이것은 불타가 ‘자비(慈悲)’를 말하고 있는 것과 동일한 표현이다. 그러나 자비의 고통이 피조물로서의 인간존재에 대한 존재론적 규정 때문에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자비의 고통은 인간의 탈선상태에 대한 동정과 공감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다. 탈선상태란 ‘가슴속이 눈멀어 보지를 못하는’ 상태인 것이다. 눈은 눈 그 자체로 볼 수가 없다. 눈알을 후벼 파내어 책상 위에 놓을 때 그 눈알이 시력을 갖지 않는다. 시력이란 해부학적으로도 뇌신경 전체와의 관련 속에서만 생겨나는 것이다. 눈은 오직 마음의 눈이 열려 있을 때만이 진정한 시력을 갖는 것이다. 진리를 보지 못하면 비록 눈을 가지고 있어도 그는 장님이다. 취하면 가슴의 눈이 멀어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 ‘사람의 자식들은 ‘인자(人子)’의 복수형이다. ‘인자’가 본시 특수한 용어가 아니었다는 것을 방증하기도 한다. 인자는 사람의 자식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다음에 나오는 표현, ‘빈 채로 이 세상에 왔다가 빈 채로 이 세상을 떠난다’라는 구절은 결코 도가적(道家的) 허(虛)를 말하거나, 무상한 인생에 대한 달관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비었다(empty)’라는 표현은 그 앞의 ‘눈멀어 보지를 못한다’라는 표현과 상통한다. ‘빔’이란 곧 ‘비젼의 공백상태’이며, 쉽게 말하면 ‘골빔’의 ‘빔’이다. 의미없는 허깨비 같은 인생을 말하는 것이다. 아무 의미도 없이 골빈 놈으로 태어나서 골빈 놈으로 뒈질 생각만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다. 그런 골빈당들이 바로 취한 세상사람들이다.
제4절의 시작인 ‘그러나’라는 접속사는 좀 어색하다. 별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이 순간 그들이 확실히 취해있다’는 사실이다. ‘이 순간’이라는 표현은 그들의 취함이 영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예수의 자비는 그들에게 깨임의 기회를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의 자비가 후대 복음서의 사상처럼 일방적인 구원의 논리로 귀결되지는 않는다. 인간의 구원은 의타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의타적 구원은 형이상학적 폭력이다. 인간은 스스로 취함에서 벗어나야 한다. 어떻게 벗어나는가? 술을 흔들어야 한다!
이 마지막의 수수께끼와도 같은 표현은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 술을 흔든다는 것은 술을 휘젓는다는 뜻이다. 여기 헤라클레이토스의 단편 125를 한번 보자!
술은 저어지고 있을 때만 술이다. 저어지고 있지 않으면 그것은 분리된다.
여기 술에 해당되는 되는 단어는 퀴케온(kykeōn)인데, 포도주이지만 우리가 상용하는 막걸리와 같은 걸쭉한 술이다. 희랍인들의 상용음료인데 포도주와 보리 미숫가루와 치즈가루를 혼합시켜 발효시킨 것이다. 이 퀴케온은 항상 휘젓지 않으면 요소들이 다 분리되어 따로놀기 때문에 그 맛이 제 맛이 나질 않는다. 퀴케온은 휘저어져서 잘 혼합되어 있는 상태, 그 모든 대립적 요소들이 융합되어 끊임없이 투쟁하고 있는 상태를, 살아있는 우주의 상태라고 헤라클레이토스는 간주하였다. 그 휘저어져 융합된 상태 속에만 로고스는 깃든다고 보았다. 대립의 화해, 모순 속의 통일성, 투쟁 속의 조화에만 로고스는 내재하는 것이다.
여기 도마 28장의 제일 마지막 구문은 헬레니즘세계에 있어서 파르메니데스(Parmenides)의 전통이 아닌, 헤라클레이토스 전통의 흐름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영·육의 분리나 세계 밖·세계 안의 대립이 아닌, 그러한 대립적 요소들의 융합 속에 비로소 인간의 구원이 있다고 본 것이다. 술 취한 상태, 마음의 눈이 먼 상태는 영과 육이 분리되어 있는 상태이며, 청주와 찌꺼기가 분리되어 있는 상태와도 같다. 이것을 휘저어 하나로 융합시킬 때 비로소 깨이게 되고 사유의 전환이 일어난다. 그 다음에 나오는 구절, ‘그들은 그들의 생각을 바꾸게 되리라’는 보통 ‘그들은 회개하리라(then they will repent)’로 번역되어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번역이다. 여기 콥트어는, 희랍어 단어를 차용하여 쓴, ‘메타노이에인(metanoiein)’이다. 마태복음 3:2에 세례요한이 한 말,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그리고 마가복음 1:15에 예수가 한 말,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라. 그리고 복음을 믿으라”에서 ‘회개하라’로 오역된 말과 동일하다.
메타노이아(μετάνοια, 회개)는 생각(노이아)의 바꿈(메타)일 뿐이다【參見, 도올 김용옥, 『큐복음서』 64~69】. 영·육이 분리되어 있는 상태를 잘 휘저어 하나로 만들면 생각의 변화가 일어난다는 뜻이다. 생각의 변화가 일어나면, 즉 술취한 상태에서 깨어나면, 즉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마음의 상태가 되면 곧 이 세계는 천국으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천국’이란 장소개념이 아니라 ‘아버지의 나라’이며, ‘나라’는 ‘다스림’ ‘질서’를 의미하는 말이라는 것은 이미 누차 상설하였다. 아버지의 질서가 지배하는 세계, 빈 채로 왔다가 빈 채로 떠나는 세계가 아니라 진리와 의미로 충만한 세계로 화(化)하게 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여기 28장도 결코 상투적인 영지주의 틀 속에서 파악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요한복음의 해석의 틀과도 매우 다른 골격을 가지고 있다. 요한복음은 헤라클레이토스의 로고스를 철저히 플라톤화시킨 것이다. 그러나 도마복음은 헬레니즘세계에 있어서 헤라클레이토스적인 건강한 사유와 그 홀리스틱한 측면(holistic aspect)을 보지(保持)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 바알베크의 바카스신전의 지성소(naos)로 올라가는 계단 옆에 새겨져 있는 무희. 내가 이 지구상에서 목격한 가장 아름다운 조각 중의 하나였다. 미소를 띤 얼굴은 황홀경의 엑스타시를 나타내고 다이내믹한 다리의 율동과 살풀이춤의 긴 천과도 같이 몸을 휘감은 천자락의 동작은 우주를 희롱하는 태극 형상이다. AD 150년경 완성된 이 신전은 아테네의 파르테논보다도 크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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