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장
세 명의 하나님과 한 명의 인간
제30장
1예수께서 가라사대, “세 명의 신들이 있는 곳에선, 그들은 신들일 뿐이다. 2두 명이나 한 명이 있는 곳에선 나는 그 한 명과 함께 하노라.”
1Jesus said, “Where there are three gods, they are gods. 2Where there are two or one, I am with that one.”
이 장은 관련된 다른 텍스트들을 검토하면 그 의미가 명료하게 된다. 약간의 추측작업(guess work)이 개입되지 않을 수 없겠지만, 도마복음서의 매력은 그 어느 누구도 단안을 내릴 수 없는, 고도의 추상성과 축약성, 간결성을 과시하고 있다는 데 있다. 해석의 독단 자체가 거부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장은 옥시린쿠스 사본이 있다. 그러니까 이 장에 해당되는 오리지날한 희랍어 사본이 있는 것이다. POxy 1,23-30(분류번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예수께서 가라사대, “세 명이 있는 곳에선, 그들은 신과 함께 하지 못한다. 2그리고 오직 한 사람만 있는 곳에선, 나는 말하노라, 내가 바로 그 한 사람과 같이 하리라. 3돌을 들어보아라! 너는 거기서 나를 발견하리라. 장작을 쪼개 보아라! 나는 거기에 있으리로다.”
1Jesus says, “Where there are three, they are without God, 2and where there is only one, I say, I am with that one. 3Lift up the stone, and you will find me there. Split the piece of wood, and I am there.”
이 옥시린쿠스 사본 파편에서 3절은 도마복음 77장 후반(2·3절)에 해당되는 것이므로 일종의 착간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따라서 1·2절과 3절은 일단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옥시린쿠스 사본의 1·2절은 도마복음서 30장 1·2절과 일치하는 내용이다. 구문의 스타일이 거의 비슷하다. 그러나 콥트어 사본이 본래의 희랍어 내용을 변형시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콥트어 사본이 전사과정(傳寫科程)에서 오류가 생긴 것인지, 콥트어 사본의 필자가 의도적으로 어떤 콥트어 공동체의 철학을 반영하기 위한 목적으로 변형시킨 것인지는 단정지을 수 없다. 그리고 또 드문 가능성이긴 하지만, 옥시린쿠스 희랍어 사본도 역시 사본일 뿐이므로 콥트어 사본이 보다 본래적인 모습을 전승하고 있다고도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하여튼 필사의 연대는 옥시린쿠스 사본이 콥트어 사본을 앞지르는 것이므로 옥시린쿠스 사본이 더 원형에 가까운 모습이라고 상정하는 것이 더 상식적일 것이다. 양자를 비교하여 보자!
POxy. 세 명이 있는 곳에선, 그들은 신과 함께 하지 못한다.
Copt. 세 명의 신들이 있는 곳에선, 그들은 신들일 뿐이다.
이 양자를 비교해보면 콥트어 사본의 ‘세 명의 신들’이라는 표현에 나오는 ‘신들(gods)’은 뒤의 ‘신들’과 관련되어 생겨난 연문(衍文)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그 연문을 제거하고 나면 ‘세 명이 있는 곳에선’이라는 구문은 일치될 수 있다. 콥트어 사본의 한국어 번역문에서 ‘그들은 신들일 뿐이다’라는 나의 번역은 맥락을 살린 의역이다. 문자 그대로 하자면 ‘그들은 신들이다(They are gods).’가 된다.
옥시린쿠스 사본의 ‘그들은 신과 함께 하지 못한다’와 콥트어 사본의 ‘그들은 신들이다’는 반대의 의미를 지닌다. 콥트어 사본은 신성이 있고, 옥시린쿠스 사본은 신성이 없다. 그러나 옥시린쿠스 사본도 탈자가 심한 파편으로부터 재구성된 것이므로 혹자는 부정사를 제거하기도 한다. 그러면 옥시린쿠스 사본의 내용은 ‘그들은 신과 함께 한다’가 된다(without God → with God). 그렇게 되면 양자의 의미가 얼추 비슷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텍스트의 일치ㆍ불일치 문제는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옥시린쿠스 사본의 원래 모습은 그 나름대로 명료한 의미를 지닌다고 나는 생각한다. 세 사람과 한 사람이 대비되며, 세 사람은 신과도 함께 하지 못하며, 오직 한 사람만이 예수와 함께 할 수 있다. 개인의 득도가 단체의 득도에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명료하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제2절을 비교하여 보면 콥트어 사본의 ‘두 명이나 한 명이 있는 곳에선’이라는 애매한 표현이 옥시린쿠스 사본에서는 ‘오직 한 사람만 있는 곳에선’이라는 표현으로 명료하게 바뀌어져 있다. 그러니까 여기 원래의 의미의 맥락 속에서 대비된 것은 ‘셋’과 ‘하나’라는 것이다. 나 도올은 ‘셋’은 집단의 상징이고, ‘하나’는 개인, 즉 고독한 단독자의 실존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혹자는(Stevan Davies 등) ‘셋’은 후대의 ‘삼위일체론(Trinitarian doctrine)’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하고, 혹자는(荒井 献) 유대교의 ‘신의 임재(셰키나)’ 사상이 기독교화된 표현이라고 본다. 유대교의 랍비문헌에 의하면 ‘3인’이란 법정을 성립시키기 위하여 필요한 최소한도의 ‘세 명의 재판관’을 의미한다. 재판관이란 하나님의 이름에 의거하여 그 직분을 맡았으며, 또한 하나님의 의지를 대행하여 재판을 행한다. 이러한 재판관이 세 명이 모여야만 합법적인 법정이 열릴 수 있다. 세 명의 재판관이 모여 법정을 열 때만이 비로소 하나님은 그 자리에 임재(臨在)하게 된다는 것이다.
‘삼위일체론’ 운운한 것은 도마복음서의 성립연대를 4세기경으로 낮추어 보는 사람들의 논의일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세 명의 신들이 있는 곳에선 그들이 모두 신들이다라는 표현은 성부·성자·성신 삼위의 일체됨을 거부하는 다신론적인 반격이라는 것이다. 성부·성자·성신 3명이 모두 각자 신들이며 이들은 한 몸이 아니라는 것이다. 공관복음서나 요한복음이나 도마복음에 이미 성부·성자·성신에 해당되는 개념을 찾을 수는 있지만, 이러한 개념은 후대의 논(論)으로서의 실체(ousia) 논쟁과는 전혀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다. 도마복음의 연대를 아무리 내려잡는다 해도, 여기 로기온의 메시지를 삼위일체론에 대한 다신론적 반격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그것은 매우 천박한 개념적 혼동의 오류일 뿐이다. 예수의 ‘아버지’는 어떤 우주의 제1원리로서의 실체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의 숫자적인 논의가 존재론적 단수와 복수의 문제가 될 수는 없다.
임재(셰키나) 사상적 해석은 마태복음 18:19~20과 관련된 것이다. 즉 구약적 임재사상에 관한 두 개의 다른 전승으로 보는 것이다. 초기기독교공동체 내의 유대인 크리스챤에 의한 다른 전승들이 마태와 도마에 각각 기록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19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20두 사람 혹은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마태 기사를 읽어보면 비로소 도마 30장의 의미가 선명하게 부각되는 동시에 양자간에 분명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상식적으로 느낄 수 있다.
마태 기사는 기본적으로 복수적 사태를 긍정하고 있다. 이 복수적 사태의 긍정은 결국 마태가 당면한 교회공동체라는 문제에 관하여 아버지의 임재나 아들 예수의 임재를 복수 사태에 있어서 긍정함으로써 다수의 결속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두 사람이 합심하여 구하면,’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과 같은 표현들은 교회공동체를 이루어 합심해나갈 때 그곳에 아버지나 내가 임재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옥시린쿠스 사본은 그러한 다수 속에 하나님이 임재한다는 것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있다: “세 명이 있는 곳에선, 그들은 신과 함께 하지 못한다.” 신의 임재는 다수 속에 있지 아니 하다. 다수의 연계 속에 신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느슨한 인적 연계(loose association)는 신의 임재의 자리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는 또 자기의 임재를 말한다. 그것은 추상적 임재가 아니라, 살아있는 예수의 ‘함께 함’이다. 예수는 다수의 연계를 부정한다. ‘오직 한 사람만 있는 곳에, 나는 바로 그 한 사람과 같이 하리라!’ 도마는 모두(冒頭)에서 ‘살아있는 예수’를 말했고, ‘해석의 발견’을 말했으며, ‘찾을 때까지 구함’을 말했다. 이 발견과 추구의 과정은 오직 한 사람의 내면 속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고독한 실존의 투쟁을 통해서만 계시(revelation)와 깨달음(enlightenment)은 성취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마태와의 이념적 성취를 놓고 도마가 후대에 영지주의적 이해방식에 기초하여 마태사상을 전도(顚倒)시킨 것으로 보는 학자들도 많지만, 오히려 원래 예수사상에 인간의 고독한 실존과 자각에 대한 깊은 성찰이 있다고 보는 것이 더 역사적 실상에 접근하는 이해일 것이다.
예수운동의 핵심인 나라(천국)사상, 그리고 메타노이아의 사상은 결코 집단을 전제로 한 것이 아니라, 개체를 전제로 한 것이다. 예수가 ‘그 한 사람’을 말했다고 해서 집단을 거부한 것은 아니다. 나라는 일차적으로 개인에게 임재해야 하는 것이며, 그러한 자각적 인간들의 모임에 의하여서만 강력한 사회운동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집단최면적인 임재는 항상 허망한 결과를 낳게 마련이다. 이러한 예수운동의 핵심적 사상이 마태의 집단사상으로 변형되었고, 그러한 집단사상으로부터 교회라는 공동체가 성립한 것이다.
옥시린쿠스 사본의 논지에 의하여 우리는 콥트어 사본의 논지도 재구성할 수 있다. 도마복음의 예수는 ‘하나님’이나 ‘신’에 대하여 종속된 위치로서 자신을 규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예수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유일신론자’가 아니다. 예수는 우주를 지배하는 유일한 하나님이라는 전제로부터 자신의 실존을 도출하지 않는다. ‘천국’이나 ‘하늘나라’도 그는 그냥 ‘나라’라고 말하거나, ‘아버지의 나라’라고 말할 뿐이다【제3장에서부터 이미 ‘나라’라는 주제가 예시되었고 그 개념이 계속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제100장을 보면 ‘하나님’은 ‘카이사’와 ‘나’와 동등한 존재로서 상대화되어 있다. 따라서 ‘세 명의 신들이 있는 곳’에 예수는 관심이 없다. 세 명의 신들은 그냥 신들일 뿐이다. 예수의 구원의 대상일 수 없다. 그것은 객관적인 기술일 뿐이며, 개입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예수가 함께 하고자 하는 것은 신이 아닌 인간이다. 나는 항상 그 한 명의 고독한 인간과 함께 하노라. 여기 ‘함께 하노라’라는 표현도 어떤 구원론적 독단(soteriological dogma)을 전제로 하지 않은 아름다운 표현이다.
‘세 명의 신들’이라는 주어에서 ‘신들’을 연문으로 제거하여 버려도 문맥은 명료해진다. ‘세 명이 있는 곳에선, 그들은 신들일 뿐이다.’ 임재사상으로서 해석하면, 세 명이 있는 곳에 신이 임재하므로 그 세 명은 신들일 뿐이다. 완전한 존재임을 가장하는 세 명의 인간들이며 세 명의 신들이다. 예수는 이런 신들에게 관심이 없다. 그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28장에서 말하는 대로 술취한 인간이며, 가슴의 눈이 멀어 보지 못하는 인간이며, 텅 빈 채 왔다가 텅 빈 채 떠나는 외로운 인간이다. 예수는 바로 이러한 사람의 자식들을 연민하고 이들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위대한 영혼이다. 그 외로운 고독의 개체와 예수는 함께 하고자 하는 것이다. 본 장의 대의는 개인의 해탈ㆍ득도가 단체에로의 신의 임재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며 이것은 예수운동의 갈구하는 깨인 개체들에 대한 격려를 함의하고 있다. 42장에서 말하는 고독한 방랑자의 심상과 일치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Jesus said, “Be passersby.” Th.42).
▲ 모세도 반드시 보았을 사하라사막 기자의 3대(代) 피라미드. 가장 왼쪽에 작게 보이는 것이 가장 높은 것으로 할아버지 쿠푸왕의 것이다. 사막에서 머리를 보호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아랍인의 두건을 두르는 것이라는 지혜를 나는 곧 터득했다. 임진권 기자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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