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장
세상을 금식하라
제27장
1(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세상으로부터 금식하지 않는다면, 너희는 나라를 발견하지 못하리라. 2너희가 안식일을 안식일으로서 지키지 않는다면, 너희는 아버지를 볼 수 없으리라.”
1(Jesus said,) “If you do not fast from the world, you will not find the kingdom. 2If you do not observe the Sabbath as a Sabbath, you will not see the father.”
우선 우리말의 표현상 좀 어색하고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부터 해석하는 것이 좋겠다. ‘이 세상으로부터 금식한다(to fast from the world)’라는 뜻은 ‘세속적 관심으로부터 자신을 유리시킨다(to separate oneself from worldly concerns)’는 뜻이다. ‘이 세상에 대(對)하여 금식한다(to fast against the world)’라고도, ‘이 세상에 관하여 금식한다(to fast as regards the world)’라고도, 번역될 수 있다. 『자치통감(資治通鑑)』이라는 방대한 역사서를 쓴 송나라의 사상가 사마광(司馬光, 1019~1086)은 『대학』에 나오는 ‘격물(格物)’이라는 구문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격(格)’을 ‘한어(扞禦)한다’라고 풀이했다. 세속적 물사(物事)로부터 철저히 자신을 방어한다, 즉 물(物)의 유혹이 나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차단시킨다는 뜻으로 풀이했다(cf. 도올 김용옥, 『대학·학기 한글역주』 80~96). 여기 ‘이 세상으로부터 금식한다’는 표현은 정확하게 ‘물폐(物蔽)를 한어(扞禦)한다’는 사마광의 격물 해석과 일치한다. 세속적인 물사(物事)로부터 자신을 멀리한다는 금욕주의적 자세를 가리키고 있다.
‘금식’의 문제는 이미 6장과 14장에 나왔다. 거기서는 경건주의를 가장한 종교적 위선을 경계하는 맥락에서 부정적으로 언급되었지만, 여기서는 그러한 부정적 맥락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진실한 금욕주의의 상징체계로서 언급되고 있는 것이다. ‘금식’이란 본시 음식의 양을 조절하든가, 어떠어떠한 아이템의 음식은 먹지 않는다든가 하는 식사에 관한 규정이다. 마찬가지로 ‘세상으로부터 금식한다’는 뜻은 세상을 식사라고 생각할 때에, 세상의 일에 대해서 어떤 것은 취하고 어떤 것은 취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나라의 발견이란 세상으로부터의 물러남(a disengagement from the world)을 요구하는 것이다. 전체 문장의 구조를 일별하면 두 개의 센텐스 사이에는 절묘한 파라렐리즘(parallelism)이 성립하고 있다는 것을 간파할 수 있다. 즉 ‘세상으로부터 금식함’과 ‘안식일을 안식일로서 지킴’이 병행구조로서 의미가 상통하며, ‘나라를 발견함’과 ‘아버지를 봄’이 또 하나의 병행구조로서 의미가 상통하고 있다.
조건절 | 주절 | |
병행구 | 세상으로부터 금식함 To fast from the world |
천국을 발견함 To find the kingdom |
안식일을 안식일로서 지킴 To observe the Sabbath as a Sabbath |
아버지를 봄 To see the Father |
이러한 전체구조를 파악하고 나면 ‘안식일을 안식일로서 지킨다’는 애매한 듯이 보이는 말의 의미도 그 병행구의 맥락 속에서 저절로 명료해진다. 우리는 ‘안식일을 지킨다’는 의미를 세속화된 교회의 논리, 즉 성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교부철학자들의 교회론 이후에 성립한 논리를 가지고서 풀이하는 오류를 통상적으로 범한다. 마치 ‘안식일을 지킨다’ 라는 의미를 ‘꼭 교회에 나가야 한다’는 형식주의적 의례준수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안식일의 본래적 의미는 매우 단순한 것이다. 천지를 창조한 야훼가 너무 피곤했기에 쉰 것이다. ‘안식(安息)’이란 ‘편안하게 쉼’이며 ‘마음의 번뇌가 없이 쉼’이다. ‘쉼’이란 병행구의 맥락에서 드러나듯이 ‘세속적 물사로부터의 리트리트(retreat, 피난처)’이다. 안식일의 본래적 의미는 세사(世事)의 번뇌로부터 완벽하게 손을 떼고 피정(避靜)하는 시간을 갖는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여기 ‘안식일(Sabbath)’의 의미는 유대교의 제식주의적 준수의 대상으로서의 욕례(縟禮)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금욕주의와 관련된 상징성인 것이다. 금식의 대상이 음식에서 세상으로 바뀌었듯이, 안식일의 대상이 제식적 준수에서 세상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안식일을 안식일로서 지킨다’는 것은 안식일이라는 형식적 의미를 넘어서서 그 본래의 피정(避靜)적 의미, 세사(世事)로부터의 리트리트를 삶 속에서 구현한다는 의미가 된다. 마르빈 메이어(Marvin Mayer)는 콥트어의 ‘안식일을 안식일로서’라는 용례에 있어서 앞의 안식일은 ‘삼바톤(sambaton)’이라는 단어가 쓰였고 뒤의 안식일은 ‘사바톤(sabbaton)’이라는 단어가 쓰였는데, 이 두 개의 단어가 의미론적으로 과연 명료하게 구분이 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그 전체의미는 다음과 같이 해석될 수도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한 주일 전체를 안식일로서 지킨다(To observe the whole week as the sabbath)”, 테르툴리아누스(Tertulianus, c.160~after220: 카르타고 중심으로 활약한 교부)는 『유대인을 반박함(Against the Jewish People)』 4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는 모든 비열한 행동으로부터 항상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 제7일에만 지킬 것이 아니라 모든 시간에 걸쳐 지켜야 한다.”
위의 도표에서 알 수 있듯이 ‘안식일을 안식일로서 지킨다’는 것은 곧 ‘아버지를 본다’는 것의 전제조건이다. 즉 아버지를 보기 위해서,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서는 세상으로부터 물러나 안식을 취하는 삶을 구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안식일적 쉼이란 하나님의 비젼의 절대적 요청이다(The Sabbath rest is a prerequisite to the vision of God). 결국 안식일을 안식일로서 지킨다는 것과 세상으로부터 금식한다는 것은 결국 같은 의미이다. 세상으로부터 금식한다는 것에 관하여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 C.150~c.215)의 『잡록(雜錄, Stromateis)』3.15.99.4에 다음과 같은 지복수훈(至福垂訓, a beatitude)이 실려있다: “하늘나라를 위하여 자신으로부터 모든 죄악을 거세한 자들은 복이 있도다. 그들은 이 세상으로부터 금식하는 자들이도다(Those who have castrated themselves from all sin for the sake of heaven's kingdom are blessed: They are the ones who fast from the world).”
이러한 용례들은 도마복음에 수록된 예수운동의 오리지날한 성격이 초기교부들에게 전승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 세상으로부터 금식한다’는 것은, 세상으로부터 제공되는 모든 물질적 유혹에 대하여 금욕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아버지의 나라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주절의 병행구를 해석해보면, ‘나라’를 발견한다는 것은 ‘아버지’를 만난다는 것이다(To find the Kingdom is to see the Father), 다시 말해서 ‘나라’는 어떤 로칼리티 즉 장소의 개념이 아니다. ‘나라의 발견’은 곧 ‘아버지와의 만남’이다. 아버지와 만날 수 있는 상태는 세상으로부터 금식하고, 안식일을 안식일로서 지킬 때만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러한 금욕주의적 사상을 후대의 영지주의적 분위기의 반영으로서 주해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예수운동의 오리지날한 성격 속에 이미 함장(含藏)되어 있다고 본다. 세속에 대한 부정이 없이 천국운동을 운운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은 멸집(滅執)을 니르바나(nirvāṇam)로 해석하는 불교의 사상과도 대차가 없다. 본 27장은 42장의 대명제와 관련하여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방랑하는 자가 되라(Jesus said, “Be passersby.”)”
▲ 나일강 위로 떠오르는 태양의 모습으로 설계된 알렉산드리아의 국립도서관. 벽면에 세계문명을 상징하는 모든 나라의 글자들이 새겨져 있다. 우리나라 글씨로는 ‘세월’이 들어가 있다. 매우 잘 지은 건물이었다. 우리나라 파주 출판도시에 이 정도 수준의 국립도서관이 새로 들어서기를 나는 갈망한다. 사진=중앙일보 임진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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