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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아마추어 사회학 - 16. ‘나와 같기를’ 바랄 때 생기는 일 본문

연재/배움과 삶

아마추어 사회학 - 16. ‘나와 같기를’ 바랄 때 생기는 일

건방진방랑자 2019. 10. 23. 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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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나와 같기를바랄 때 생기는 일

 

 

이전 후기에서 살펴본 조종사의 생각은 묵자墨子(BC 480~390)겸애설兼愛說을 뺨칠 정도로 동물까지도 두루두루 사랑하고 있구나라고 느껴질 법도 하다.

 

 

과학의 눈으로 새가 나는 것을 보면 덜 힘들게 날 수 있는데도, 더 힘들게 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분명함이란, 과학이란 이름의 폭력

 

하지만 과학이란 잣대, 효율이란 잣대, 분명함이란 잣대는 그걸 사용하는 사람에게만 의미가 있을 뿐, 막상 그 잣대에 들어가야만 하는 존재에겐 폭력일 수밖에 없다. 우린 이미 4대강 공사로 그 폭력성을 두 눈으로 목격하지 않았던가. 4대강 공사는 보를 설치하여 저수량을 늘림으로 하천생태계를 복원한다는 게 그 목적이었다. 어찌 보면 조종사가 여태껏 잘 날라 다니고 있던 비둘기를 보며 학습’, ‘해방이란 원대한 포부를 품었던 것처럼, 전문가들도 강을 보면서 살려야 한다고 생각한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막상 22조를 쏟아 부으며 마무리 지은 공사의 결과는 어땠는가? 매년 여름마다 무상으로 맘껏 제공되는 녹조라떼에 얼굴을 찌푸려야 했고, 그에 따라 사대강이 점차 썩어가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다.

이처럼 조종사도 비둘기를 데려다가 자신이 아는 비행의 상식에 맞게 고쳐주려 노력했다면, 아예 비둘기가 원래 타고난 본능마저 잃어버리고 날지 못하게 됐을지도 모른다.

 

 

사대강 공사는 과학이란 이름으로 자연에 폭력을 휘두른 경우다. 

 

 

이런 예는 맹자라는 책에도 나온다. 인간의 마음으로 자연을 대할 때 어떤 문제가 생기는지, 그리고 그게 얼마나 근시안적인 생각인지를 알려준다.

 

 

송나라 사람 중에 밭에 싹이 잘 자라지 않는 것을 근심하여, (싹이 잘 자라도록) 싹을 뽑아낸 사람이 있었다. (그는) 피곤에 절은 채로 돌아와 오늘 매우 힘들었어. 내가 싹이 잘 자라도록 도와주고 왔거든이라 말했다. 그러자 그 아들이 달려가 밭에 가서 싹을 보니, 싹은 모두 말라 있었다.

宋人有閔其苗之不長而揠之者, 芒芒然歸. 謂其人曰: 今日病矣, 予助苗長矣. 其子趨而往視之, 苗則槁矣. -公孫丑章句上2

 

 

위 원문에서 알묘조장揠苗助長이란 사자성어가 나왔고, 우리가 자주 쓰는 조장(안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이끈다)’이란 단어가 나왔다. 싹은 때가 되면 땅을 뚫고 나오며 시간이 지나야만 자랄 수 있다. 그런데 너무 천천히 자란다고 안타까워한 나머지 인간의 마음으로 돕게 되면 오히려 싹이 자랄 수 있는 환경을 파괴하고 마는 것이다.

언젠가 경수 누나에게 파가 자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파가 조금 컸는데도 여전히 누워 있었기에, “저걸 세워줘야 하지 않아요?”라고 물으니, 누나는 시간이 서서히 지나면서 햇볕을 받다보면 어느 순간 저절로 몸을 일으키거든. 그러니 세워주지 않아도 돼라고 말을 해줬다. 그래서 나중에 보내준 사진을 보니 정말로 파가 서서히 몸을 세우고 있는 모습이었고, 꽤나 감동적이었다.

 

 

파는 저절로 해를 향해 서서히 서기 시작한다. 서서히 서는 쪽파. 

 

 

 

있는 모습 그대로 묘사하라

 

이미 우리는 과학적인 잣대를 대기 전부터, 효율이란 잣대를 대기 전부터, 성장이란 잣대를 대기 전부터, 과학의 언어라는 잣대를 대기 전부터 잘 살아오고 있었다. 그래서 비둘기는 바람을 가르며 아주 편안하게 날아다녔고, 4대강은 굽이치며 주변 환경과 어우러져 아주 넉넉히 흘러갔으며, 싹은 느릴지라도 천천히 커갔고, 사람들은 오해가 있는 말일지라도 자연스럽게 나누며 오해도 하고 그 오해를 풀기도 하며 살아왔던 것이다. 당연히 여기엔 과학이나 이론, 진리라는 게 들어설 여지가 없이 일상 속에서, 삶 속에서 무르익으며 유지되어온 것이다.

 

 

아이들과 과천과학관에 갔었는데, 아이들은 과학관 안에서보다 오히려 놀이터에서 더 재밌게 놀았다. 우린 잘 살아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린 분명함이란, 과학이란, 하나의 방법이란 폭력을 행사할 것이 아니라, 삶 그대로를 보고 느끼려 노력해야만 한다. 생활을 개선하려는 노력이 아닌 생활을 묘사하려는 노력이며, 계몽하려는 노력이 아닌 패턴을 보려는 노력으로 말이다.

 

 

우리의 인간스러움과 그 일상은 전권을 쥔 정답(眞理)에서도, 산산이 부서지는 오답(無理) 속에서도 찾을 수 없다. 넓은 터와 긴 시간의 지평에서 넉넉히 드러나는 일리(一理)들과 그 운용의 묘에서 인간됨의 모습은 제자리를 찾아간다.

빙휴먼의 인간학은 복잡다단한 삶의 구성에 정직하려는 복잡성의 철학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러나 복잡성을 드러내는 노고가 무책임한 애매성의 옹호로 비쳐져서는 곤란하다. 복잡성의 현실과 빙휴먼의 현실이 서로 만나는 방식은 늘 일리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삶의 일상을 통해서 경험하는 현실은 이로정연理路整然한 코스모스kosmos도 아니고 앞뒤의 분별이 서지 않는 카오스khaos도 아니다. 그것은 각자의 터와 역사의 구체성을 좇아 이치를 세우는 일리의 세계(패턴의 세계)인 것이다

-컨텍스트로 패턴으로, 김영민 저, 문학과 지성사, 1997, 150

 

 

김명민 선생의 말을 읽어보면 우리가 왜 아마추어 사회학을 공부해야 하는지?’에 대해 알 수 있다. 우린 각자의 터와 역사의 구체성을 좇아 이치를 세우는법을 배우고 실천하기 위해 아마추어 사회학의 길을 함께 걷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 강의가 모두 끝났을 때 나에게 어떤 변화가 올지, 그리고 어떤 시각이 열릴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저 하품 수련의 역설에서 나온 말처럼 뭐라고 설명할 방법이 없지만 그냥 끌리네라는 심정으로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이로써 알기 어려운 서설이란 전혀 알 수 없던 제목으로 포문을 활짝 연 아마추어 사회학 강의 후기는 끝났다. 중간에 헤매면서 흐름이 끊겨 좌충우돌했지만, 그 또한 복잡다단한 삶의 한 양상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게 나의 의식에 어떤 흔적을 남겼을 것이고, 이 후기 어딘 가에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게 뭔지 역추적을 할 필요는 없다. 그렇게 물들고 물들이며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린 늦은 밤 서서히 오는 졸음을 쫓아가며 열심히 강의를 듣고 있다. 왠지 모르지만, 그냥 끌리기에 가는 거다. 

 

 

 

인용

목차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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