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우월의식과 특권의식의 거부가 대승의 출발
불교사적으로 ‘소승’이란 주로 ‘부파불교’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대승이란 이 부파불교를 근원적으로 비판하고 나온 어떤 혁신적 그룹의 운동을 규정하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우리의 소ㆍ대승에 대한 이해는 바로 이러한 역사적 정황에서 규정된 원래의 의미만을 정확히 맥락적으로 파악하고, 그 파악된 의미를 상황적으로, 유동적으로, 방편적으로 적용해야 할 뿐인 것이다. 우선 우리의 논의를 단축하기 위해서 이러한 역사적 정황을 압축시킨 도식을 하나 제시해보자!
소승(hīnayāna) | 阿羅漢(아라한, Arhat) | 八正道(팔정도) |
대승(mahāyāna) | 菩薩(보살, Bodhisattva) | 六波羅蜜(육바라밀) |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도식적 이해 자체가 불교의 근본교의의 이해를 그르치게 할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한다는 데 있다. 지금 내가 이 강의를 하고 있는 곳은 도올서원 제12림이다. 매림마다 우리나라 전국의 각 대학에서 약 150명의 우수한 선발된 젊은이들이 몰려들어 내 강의를 직접 듣고 있다. 벌써 12림이 되었으니까, 이것을 나의 12번째 대설법이라고 한번 비유적으로 상정해보자! 우리 도올서원에서는 내 강의를 수강하는 학생들은 ‘유호례(由戶禮)’로부터 ‘승당례(升堂禮)’라는 과정을 거치게 되며 이 과정을 다 거치면 ‘재생(齋生)’이라는 칭호를 얻는다. 그리고 재생(齋生)생활을 모범적으로 수차에 걸쳐 완수하면 대중의 추천에 의하여 ‘재수(齋秀)’라는 존칭을 얻는다. 현재 2천여 명 정도의 재생이 있으며, 40여 명 정도의 존경스러운 재수들이 있다. 물론 도올서원은 순수한 학술기관이며, 일체의 종교적 행위가 허락되는 곳이 아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깨달음’을 던져준다는 데서는 별 큰 차이가 없을 수도 있다. 아마도 불타의 최초의 승가의 모습도 이와 같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싯달타라고 하는 어떤 실존인물이 있었다고 한다면, 그는 나 도올 김용옥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는 평상적인 인간이었을 것이다. 그대 또한 인간이라면 여기에 이의를 달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 싯달타라는 인간은 그의 삶의 어느 시점에 ‘아뇩다라삼막삼보리’라고 하는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을 얻었고, 그로 인해 주변의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깨달음의 감화를 던지는 훌륭한 인물이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깨달은 자’ 즉 ‘붓다’라고 부르고 그에게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 몰려들었다. 이 몰려든 사람들이 싯달타 주변을 떠나지를 않고 살게 됨에 따라 그들은 자연스럽게 어떤 콤뮤니티 즉 집단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것을 승가(僧伽, saṃgha)라고 불렀다. 아예 집을 떠나(출가出家) 전문적으로 승가에 상주하는 사람들을 남ㆍ녀 구분하여 비구(比丘, bhikṣu)ㆍ비구니(比丘尼, bhikṣuṇī)라고 불렀고, 그냥 가정을 유지하면서 집에서(재가在家) 승가에 다니는 사람들을 우바색(優婆塞, upāsaka, 신사信士)ㆍ우바이(優婆夷, upāsikā, 신녀信女)라고 불렀다. 이 출가이중(出家二衆)과 재가이중(在家二衆)을 합쳐 우리가 초기 승단을 구성한 사부대중(四部大衆, 사중四家, 사부중四部衆)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세에는 항상 이러한 집단이 발생하면 집단의식이 생겨나게 마련이고, 이 집단의식은 항상 그 집단을 성립하게 만든 본래정신과는 무관하게 발전해나가는 상황은 인지상정에 속하는 것이요, 역사의 정칙이다.
도올서원에 모여 내 강의를 듣는 학생들이 자기들은 ‘재생’이라 하고, 나는 일반 대학생들과 다르다라는 의식을 갖게 되고, 나는 도올선생의 강의소리(성聲)를 직접 들었다(문聞)는 강한 프라이드를 갖는다고 생각해 보자!(불교초기집단에서 불타의 소리를 직접 들은 자들을 ‘성문聲聞’[śrāvaka]이라 불렀다). 이러한 프라이드는 어떤 의미에서는 그들에게 권위를 주고 디시플린(discipline, 기강)을 주고 더 열심히 공부하게 만드는 긍정적 효과도 있겠지만, 그것이 도가 지나치고 고착화되고 장기화되면, 그것은 역으로 권위주의(authoritarianism)와 형식주의(formalism)와 차별주의(distinctionism)를 낳게 된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누가 생각해도 바람직하지 않다. 초기의 도올서원의 생동하는 원래 모습과는 다른 모습이 될 것이며, 그것은 분명 개선되어야 할 상황이지만, 기득권자들의 권위의 타성과 관성체계에 의하여 눈덩이처럼 굴러가는 역사가 전개될 수도 있다. 바로 초기 불교승단의 상황은 이와 같은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도올서원의 권위주의자들은 자신의 권위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역으로 ‘도올선생’의 위치를 평범한 교수가 아닌 극존(極尊)의, 범인이 도저히 미칠 수 없는 신비스러운 권위의 상징으로 만든다. 왜냐하면 그렇게 도올을 절대의 자리로 높여놓아야만, 그의 소리를 직접 들은 자기들만의 특수성의 권위가 확보될 것이기 때문이다. 부파불교의 상황은 정확히 이런 상황이었다. 싯달타의 사후, 불교는 아쇼까(Aśoka, 아육왕阿育王, 치세治世 268~232 BC)라는 마우리아왕조 제3대의 명군(名君), 전륜성왕(轉輪聖王)을 만나 크게 그 세를 떨쳤지만, 이러한 세의 확대가 불교승단 내부에 많은 부작용을 가져오게 된 것은 쉽게 생각할 수가 있다. 포만은 부패를 낳게 마련이다. 아쇼까 치세기간에 이미 보수적인 상좌부(上座部, Theravāda)와 진보적이고 자유주의적인 대중부(大衆部, Mahāsāṅghika)의 분열이 생겼고, 이후 이 양대파의 세부적인 분열이 가속화되어 우리가 통칭 ‘부파불교(部派佛敎)’라고 부르는 시대가 연출되게 되는 것이다. 이 부파불교시대를 대변하는, 소위 ‘소승(小乘)’으로 규정되는 대표적인 종파가 바로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Sarvāsti-vādin)’라고 하는 아비달마 교학불교인 것이다.
부파불교의 수도인들이 지향한 이상적 인간상을 우리는 ‘아라한’(줄여 ‘라한’)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아라한이라는 말은 원래 초기 불교집단에서 인간 싯달타를 존경하여 부르던 열 개의 존칭(십호十號) 중의 하나였다.
1) 여래(如來) : 진리에서 온 사람
2) 응공(應供) : 응당 공양을 받을 사람
3) 정편지(正遍知) : 두루 바르게 깨달은 사람
4) 명행족(明行足) : 이론과 실천이 구비된 사람
5) 선서(善逝) : 열반을 자유로이 드나드는 사람
6) 세간해(世間解) : 세상을 잘 아는 사람
7) 무상사(無上士) : 최고의 인간
8) 조어장부(調御丈夫) : 사람을 잘 다루는 사람
9) 천인사(天人師) : 신과 인간 모두의 스승
10) 불타(佛陀) : 깨달은 자, 佛
11) 세존(世尊) : 복덕을 구유한 자
(정확히 11개인데, 십호를 말할 때는 이 중 하나를 뺀다).
이중 두 번째의 ‘응공(應供)’이라는 것이 바로 ‘아라한’인 것이다. 사실 나도 밖에 돌아다닐 때, 누구와 식사를 하게 되면 대강 상대방이 식사값을 치르는 상황이 많은데, 내가 꼭 얌체라서기보다는, 평소 때 내가 많이 베풀고 살기 때문에 그냥 편하게 얻어먹을 수 있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응공(應供) 즉 아라한이란, 얻어먹어도 그것이 업이 되지 않는 사람이란 뜻이다. 그만큼 존경스러운 사람이란 뜻이다. 사실 이것은 뭐 대단히 특수한 존칭이 아니다. 경주 석굴암에도 십대(十大)제자 나한상이 삥둘러쳐 있듯이, 부처의 제자들을 나한이라고 부르기도(십육나한十六羅漢), 불전편찬을 위해 일차결집(一次結集)때 모였던 500인의 제자를 보통 ‘오백나한(五百羅漢)’이라고 부르듯이 그것은 특수명사라기보다는 일반명사였던 것이다.
그런데 부파불교시대에 내려오면 이런 아라한의 의미가 변질되어 수도원에서 고립된 생활을 하는 수도인이 도달하는 최고의 성스러운 경지에 해당되는,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는 무학위(無學位)로서 아주 특수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유학위(有學位)인 1) 예류(預流, srota-āpanna), 2) 일래(一來, sakṛd-āgamin), 3) 불환(不還, anāgāmin)의 세 위(位)를 거쳐 도달되는 사향사과(四向四果)의 극위(極位)로 엄격하게 설정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불타시대에는 불타든 제자든 응공(應供)의 사람들 모두에게 붙여졌던 이 아라한의 명호가, 부파불교시대에는 완전히 불타에서 분리되어 버렸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앞서 든 예대로 도올서원 재생들이 자기들의 권위를 확보하기 위하여 도올을 넘나보지 못할 사람으로 만들어버리는 것과 유사한 상황이다. 즉 부파불교시대에는 인간이 도달하는 최고의 성자의 경지가 아라한이며, 이 아라한은 절대적인 붓다의 경지의 하위(下位)개념으로서 설정된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아무리 수도를 해도 붓다가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부파불교시대에, 즉 서양에서는 ‘그노시스’(영지)를 추구하는 지혜운동이 「요한복음」 사상의 배경을 이루는 것과 동시대에, 바로 불교종단 내부로부터 이러한 아라한의 독주ㆍ독선ㆍ독재의 편협성을 타파하고 누구든지, 즉 출가자(出家者)나 재가자(在家者)나를 불문하고 곧바로 불타가 될 수가 있다고 하는 대중운동이 발생했던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진보세력은 아라한됨을 추구하는 자들을 성문(聲聞), 독각(獨覺=록각綠覺)이라 불렀다. 성문(聲聞, śrāvaka)이란 곧 수도원(사원)내에서 고립된 생활을 하면서 자기들끼리 서로 가르치고 가르침을 받으면서 절차탁마 수행하는 자들이요, 독각(獨覺, pratyeka-buddha)이란 선생이 없이 혼자 산속 같은 데서 도사연하면서 깨달음을 추구하는 자들, 즉 토굴파들을 가리킨 말이었다. 바로 이들 새로운 진보세력이 이 성문(聲聞)ㆍ독각(獨覺)의 이승(二乘)에 대하여 새롭게 내걸은 일승(一乘)이 바로 ‘보살’(bodhisattva)이라는 새로운 개념이었다. 새 포도주는 새 푸대에 담아야 한다! 보살이라는 개념은 곧 그들이 추구하는 새 생명과도 같은 새 포도주를 담을 수 있는 새 푸대였던 것이다. 이 새 포도주를 우리가 보통 대승(大乘)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즉 대승(大乘)이란 보살운동이다. 즉 보살이라는 개념 이전에 대승이 없고, 대승은 보살과 더불어 출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보살이란 무엇인가? 절깐을 신나게 나돌아 다니는 ‘자유부인들’ 인가? 새 절 짓는 개왓장에 큰 이름을 올리는 부잣집 ‘마나님들’ 인가? 아니면 스님들 공양을 지어올리는 절깐 부엌의 ‘공양주들’인가?
‘bodhisattva’는 ‘bodhi’라는 말과 ‘sattva’ 두 마디로 이루어져 있다. ‘bodhi’는 ‘보뎨(菩提, 속음으로 ‘보리’라고 한다)’ 즉 ‘깨달음’이다. ‘sattva’는 ‘살아있는 자者’ 즉 ‘유정(有情)’이라고 번역되는 말이다. 80년대 우리 대학가를 풍미한 노래가사에 ‘산 자여 따르라!’라는 말이 있다. 다시 말해서 ‘깨달음을 추구하는 모든 산 자!’ 그들이 곧 ‘보살’인 것이다!
일설(一說)에 의하면 ‘sattva’는 ‘마음’(심心)의 뜻이 되기도 하고, ‘바램’(지원志願)의 뜻이 되기도 한다. 이 설을 따르면, ‘보살’은 곧 ‘깨달음을 바라는 모든 자’의 뜻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보살운동’의 혁명적 성격은 바로 ‘보살’이 곧 불위(佛位)요. 불승(佛乘)이라는 것이다. 즉 보살이 곧 부처 자신의 원래 모습이라는 것이다. 싯달타가 곧 보살이었고(본생담本生譚), 이 보살은 곧 붓다 즉 각자覺者가 된다는 것이다. 보살은 곧 아라한의 정면부정이다. 아라한이 승가라는 제도의 보호를 받는 특수한 디시플린의 출가자(出家者)에 국한되었다면 보살은 출가자(出家者), 재가자(在家者), 가르치는 자, 가르침을 받는 자를 가리지 않는다. 즉 보살에는 승(僧)ㆍ속(俗)의 이원적(二元的) 구분이 사라지는 것이다. 종교적 세계와 세속의 세계의 근원적 구분이 사라지는 것이다. 모든 차별주의(distinctionism)여! 가라! 떠나가라!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의 ‘보살’에 대한 교과서적 이해는 대강 이러한 것이다. 즉 ‘보살’이란 부처가 될 수도 있는 사람인데, 부처가 아니 되고, 중생의 구제를 위해 사회적으로 헌신하는 자, 소승이 자기 일신만의 구원을 추구하는 데 반하여 대승은 일체중생(一切衆生)과 더불어 구원받기를 원하는 자, 즉 소승은 차안에서 피안으로 자기 혼자만 타는 일인용 보트를 타고 저어가는데, 대승은 많은 사람과 피안으로 같이 가기 위해서 큰 수레, 큰 배가 필요한 자, 그 자가 곧 대승이다!
나는 이러한 규정이 구체적으로 불경에 근거한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의 대ㆍ소승에 대한, 즉 ‘보살’에 대한 이해를 아주 그르치게 만드는 망견(妄見) 중의 망견이라고 생각한다. 우선 인간의 구원은 어떠한 경우에도 홀로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구원의 길에는 일인용(一人用) 보트와 만인용(萬人用) 배가 따로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의 구원의 개인성과 집단성을 기준으로 소ㆍ대승(大乘)을 나누는 것은 극심한 망상이다. 아무리 암자에 홀로 사는 미얀마의 스님이라 할지라도, 낙도에 떨어진 로빈슨 크루소라 할지라도 나 혼자만이 해탈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어차피 해탈의 길에는 인간과의 ‘관계’가 절연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 사람 백 사람 만 사람의 양적 차이에 의해서 아라한과 보살의 차이가 가려질 수는 없는 것이다.
둘째, 부처가 될 수 있는데 부처가 아니 되고 보살노릇한다는 말도 참으로 어색하기 그지없는 억설이다. 부처가 될 수 있으면 언제고 그 자리에서 부처가 돼야지, 어찌 부처가 되면 대중구원을 할 수 없고, 부처가 아니 되고 보살이 되어야만 대중구원이 가능하다는 그따위 엉터리없는 말이 도대체 어떻게 성립가능하단 말인가? 이런 엉터리 없는 망견이 바로 불법을 흐리게 만드는 마장(魔障)인 것이다. 부처가 된다는 것과 보살이 된다는 것은 2원적 구분이 있을 수 없다! 부처가 곧 보살이요, 보살이 곧 부처다! 지장보살이 어찌 부처가 아닐 수 있으리요!
지금 이러한 보살의 사회성에 관한 논의는 원래 인도사상의 회향(廻向, pariṇāma) 개념에서 발전된 것인데, 회향에는 두 가지가 있다. 제1의 회향이란, 선근(善根)을 자기의 ‘행복’의 추구로부터 자기의 ‘깨달음’의 추구로 방향전환하는 것이다. 제2의 회향이란 곧 나의 선근(善根)을 자기의 행복으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 곧 타인의 깨달음과 행복으로 돌리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제2의 회향은 제1의 회향의 전제하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제2의 회향은 제1의 회향의 논리적 결과이다. 즉 성불(成佛)이야말로 보살행의 전제며, 보살행이야말로 성불의 당연한 결과인 것이다. 제1의 회향은 무상정등각을 얻는 것이요, 제2의 회향은 그 얻은 무상정등각을 타인의 깨달음으로 전위시키는 것이다.
아라한의 팔정도(八正道)의 궁극에는 정정(正定, samyak-samādhi)이라고 하는 관조적인 삼매(三昧)가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보살의 육바라밀(六波羅蜜)의 궁극에는 바로 반야(般若) 즉 지혜, ‘쁘라기냐’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제1의 회향의 완성은 바로 이 반야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요, 이 반야를 획득한 자에게만이 제2의 회향이 가능케 되는 것이다. 이 반야를 최초로 명료하게 제시한 경전이 바로 이 『금강경』이라는 희대의 지혜서인 것이다.
소승과 대승의 궁극적 구분 근거가 바로 ‘보살’이라는 새로운 개념이다. 그렇다면 다시 묻건대 보살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일체의 차별주의를 거부하는 일승(一乘, ekayāna)인 것이다. 일승(一乘)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곧 나만이, 혹은 내가 속한 어느 집단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일체의 구분의식이나 우월의식이나 특권의식의 거부를 말하는 것이다. 이 우월의식ㆍ특권의식의 거부가 곧 대승의 출발인 것이다. 이 대승정신이 바로 일승정신이요 보살정신이다. 이 보살정신이 바로 반야사상인 것이다. 그리고 이 반야사상의 최초의 명료한 규정이 바로 『금강경』인 것이다. 따라서 대승의 의미는 금강능단(金剛能斷)의 지혜의 실천, 곧 『금강경』이 설하는 지혜를 실천하는 자에게만이 주어질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소승과 대승의 구분 근거는 사회적 실천의 양의 다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금강지혜의 실천의 유무에 있는 것이다. 아무리 엄청난 양의 사회적 실천을 실현했다 하더라도 금강의 지혜의 실천이 없으면 그것은 대승이 아니라 곧 소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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