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세존이시여!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냈으면, 마땅히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이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하오리까?”
世尊! 善男子善女人,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應云何住? 云何降伏其心?”
세존! 선남자선녀인,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 응운하주? 운하항복기심?”
지혜는 마음의 문제다! 2-2절에서의 질문의 내용을 보다 구체화시키고 있다. 물론 여기의 라집역도 산스크리트 원문과는 크게 차이가 있다. 그러나 산스크리트 원문의 맛보다 라집본의 맛이 더 명료하고 그 의취가 깊다.
‘선남자선여인(善男子善女人)’이란 불전에서 매우 관용구적인 표현으로 쓰인다. 특별히 선택된 승가의 멤버가 아니라는 뜻이다. 쉽게 말하면, ‘보통사람들’의 뜻이고, 여기서는 ‘보살’(구도자求道者)의 다른 표현으로 등장한 것이다. ‘선남자(善男子), 선여인(善女人)’의 원어는 ‘kula-putra, kula-duhitṛ’이다. ‘kula’는 ‘가족(家族)ㆍ종족(種族)’ 특히 ‘양가(良家)’의 의미며, ‘선(善)’과 정확히 대응되지는 않는다. ‘kula-putra’는 ‘좋은 집에서 태어난 아들’이며, ‘kula-duhitṛ’는 ‘좋은 집에서 태어난 딸’이다. 그러니까 ‘선남자(善男子)ㆍ선여인(善女人)’은 ‘양가집 청년ㆍ양가집 규수’ 정도의 의미가 정확히 대응된다.
그런데 여기 ‘선남자선여인(善男子善女人)’의 의미 속에는 암암리 대승보살이 다 죽어가는 늙은이들의 운동이 아니라, 생기팔팔한 젊은 이들의 운동이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대승운동은 젊은 운동이요, 찌들리고 병든 사람들이 주창(主唱)하는 운동이 아니라, 제대로 된 집안에서 태어난 유족하고 너그럽고 건강한 젊은이들의 아주 상식적 운동이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이 내 말을 듣는 ‘늙은이’들이 서러워할 것은 없다. 어차피 모든 늙은이들이 선남자(善男子), 선여인(善女人)이 아니었든가? 대승운동은 영원히 젊은이들의 운동이다. 이들 젊은이들의 생각이 바르게 되어야만 비로소 늙은이들의 바른 삶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육조(六祖)가 선남자(善男子)를 평탄심(平坦心)ㆍ정정심(正定心)이라 하고, 선여인(善女人)를 정혜심(正慧心)이라 운운(云云)한 것은 일고의 가치가 없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는 『반야심경』 덕분에 우리 입에 많이 익은 단어다. ‘아뇩다라’는 ‘anuttarā’의 음역이다. 그것은 an(부정)과 uttara(보다 높은)의 합성어인데, ‘보다 높은 것이 없는’의 뜻이다. ‘무상(無上)’으로 번역된다.
‘삼먁’은 ‘samyak’의 음역인데, 이것은 보통 형용사로서 ‘완벽하다(complete)’는 의미인데, ‘samyañc’에서 왔다. 이것을 더 나누면 ‘sam+i+añc’로도 나누어 진다. 여기에는 ‘같이 간다(going together)’라는 의미가 있다. 한역(漢譯)하여 ‘정편(正徧)의’, ‘정편(正遍), ‘정등(正等)’이라 하는데 ‘편(徧)’의 의미 속에는 ‘두루두루 간다.’ ‘두루 미친다’의 뜻이 내포되어 있다.
‘삼보리’는 ‘saṃbodhi’인데 ‘각(覺)’, ‘정각(正覺)’의 뜻이다. ‘bodhi’가 원래 ‘각(覺)’의 뜻이다. ‘sam’은 ‘함께(together)’, ‘완전한(complete)’, ‘같은(same)’ 등의 뜻이 있는데, 이것은 일반적으로 접두사로서 어간의 의미를 강화시키는 작용이 있다. 매우(very), 아주(very much), 철저하게(thoroughly), 완전하게(perfectly), 아름답게(beautifully)의 뜻이 있다.
우리가 한문번역에서 ‘삼(三)’자 때문에 ‘셋’이라는 양수개념을 생각하기 쉬운데, 그것과는 전혀 관계없는 ‘sam’의 음역이라는 것을 항상 상기하는 것이 좋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는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이요 ‘무상정편지(無上正遍知)’이다. 따라서 ‘발(發)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心)’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빼면 발심(發心)이 되는데, 이것은 즉 ‘더 이상 없는 바른 깨달음을 향하는 마음을 낸다’고 하는 뜻이다. 그러한 발원을 하는 모든 선남선녀들이 곧 보살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 보살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떻게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 것인가?
‘응운하주(應云何住)’는 명본(明本)대장경에는 ‘운하응주(云何應住)’로 되어 있고 세조본(世祖本)은 명본(明本)을 따랐다. 양자(兩者)가 상통(相通)하는 어법이라 하겠지만, 문법적으로 따지자면 ‘응운하주(應云何住)’가 더 순조롭다. 항상 해인사본을 기준으로 삼는 것이 최선이다. 우리 해인사본 자체 내에 있어서도 17분 1절에는 ‘운하응주(云何應住)’라는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 라집(羅什)은 『금강경』 기자(記者)들의 표현관습의 다양한 맥락을 존중하고 있는 것이다. ‘운하(云何)’는 ‘어떻게’ 이다. ‘주(住)’는 ‘살다’, ‘머문다’인데 사실 그 실 내용은 다음의 ‘항복기심(降伏其心)’인 것이다. ‘주(住)’는 내가 여기 ‘살다’로 번역했지만, 사는 방식을 말하는 것은 아니고, ‘마음을 둔다’라는 뜻이다. 내 마음을 어디에 어떻게 두어야 하는 것인가? ‘항복기심(降伏其心)’은 산스크리트 원문에는 ‘마음의 상태를 어떻게 유지해야 하는가?’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번역하면 그 의미가 너무 밋밋해서 중국인의 가슴에 퍼뜩 쉽게 와 닿지 않는다. 그래서 인간의 욕망과의 갈등구조로 그 문의(文義)를 정확히 노출시킨 것이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욕망의 항복! ‘마음을 항복받는다.’ 그 얼마나 쉽게 전달될 수 있는 표현인가? 라집(羅什)한역의 파워는 바로 이러한 직설적 스밈에 있다. 외국인인 그는 중국인의 마음을 너무도 잘 이해한 천재였다. 오히려 후대의 중국인들이 중국인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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