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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금강경 강해, 제십육분 - 16.1 復次須菩堤 ~ 當得阿耨多羅三藐三菩堤 본문

고전/불경

금강경 강해, 제십육분 - 16.1 復次須菩堤 ~ 當得阿耨多羅三藐三菩堤

건방진방랑자 2022. 11. 23.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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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더러운 업을 항상 깨끗이

능정업장분(能淨業障分)

 

 

16-1.

이제 다음으로 수보리야! 선남자 선여인이 이 경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울 때에 이로 인하여 사람들에게 경시당하고 핍박을 받는다면 이는 전생에 지은, 지옥에 떨어지게 될지도 모르는 죄업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바로 지금 세상의 사람들이 이 사람을 경시하고 핍박하기 때문에 곧 전생의 죄업이 소멸할 것이요. 그래서 반드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깨달음을 얻을 것이다.

復次須菩堤! 善男子善女人受持讀誦此經, 若爲人輕賤, 是人先世罪業應墮惡道. 以今世人輕賤故, 先世罪業則爲消滅, 當得阿耨多羅三藐三菩堤.

복차수보리! 선남자선여인수지독송차경, 약위인경천, 시인선세죄업응타악도. 이금세인경천고, 선세죄업즉위소멸, 당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그 내면적 뜻의 정확한 논리구조에 따라 의역한 것이다. 문법적 구조만 그대로 따르면 무슨 말인지 확연히 이해하기 어렵다.

 

대륙의 합리론 전통과 영국의 경험론 전통을 종합하여 대성한 계몽주의 사상의 완성자(完成者),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는 그의 대저 실천이성비판(實踐理性批判)에서 인간의 도덕적 행위와, 그 행위에 대한 사회적 보상이나 현실적 결과 사이에 존재하는 괴리의 문제를 아주 심도있고 고민스럽게 파헤치고 있다. 간략히 말하면, 도덕(moral conduct)과 행복(happiness)의 괴리의 문제를 분석하고 있는 것이다.

 

우선 칸트는 도덕은 상식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우리의 직관적 상식은 건전한 도덕의 궁극적 기준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다는 것이다. 도덕철학의 임무는 이 궁극적 기준을 명료하게 명시하는 작업일 뿐이다. 칸트는 이것을 정언명령(定言命令, kategorischer Imperativ)이라 불렀다. 그것은 어떤 조건하에서만 타당한 가언명령假言命令(hypothetischer Imperativ)이 아닌 무조건적 명령이요, 절대적 명령이다.

 

칸트는 인간이 결코 행복하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정언명령의 의무를 실천하기 위해서 산다고 생각한다. 과연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만 사는가? 그럼 이 시간에도 이 고생하고 원고 쓰는 짓을 포기하고 저 천고마비(天高馬肥)의 푸른 하늘 아래 신나게 여행이라도 하련만! 하여튼 행복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보다 깊은 고려가 필요하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인 문제는 내가 아무리 나의 도덕의지(ein guter Wille)를 실천하고 산다고 해도, 바로 그러한 삶이 나에게 불행을 가져오는 상황! 이것은 현실적으로 우리가 얼마든지 경험할 수 있는 괴리며, 이 문제로 인해 우리의 모든 억울함의 느낌이 발생한다.

 

칸트는 이 억울함의 느낌을 해소하기 위한 유일한 방도로서 신()을 요청(postulation)‘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신에 의하여 그의 미래적 삶에 있어서 오늘의 선행에 대한 보상이 있으리라는 보장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도덕의 근거를 확보하는데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칸트의 신의 요청은 사실 불교에 있어서 윤회(saṃsāra)의 요청과 동일하다. 무르띠(T. R. V. Murti)바나라스 힌두대학 철학교수. 동국대 원의범 교수의 선생는 불교의 중심철학인 중관사상(中觀思想)의 종합을 칸트의 순수이성적 종합으로 보았지만, 그보다 불교와 칸트가 더 잘 대비될 수 있는 영역은 실천이성 영역인 것이다. 그 불교적 해결의 가장 명료한 논리가 바로 이 161절에 잘 드러나 있다.

 

흔히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말에 좋은 일 하면 손해본다라는 말이 있다.

 

() ()
좋은 일 하면 손해 본다
조건절 주절

 

 

좋은 일 하면, 손해 본다에서 좋은 일 하는 행위는 손해 보는 것의 조건이 되며, 따라서 좋은 일 함이 원인이 되고 손해 봄이 결과가 된다는 것이 우리의 분석의 상식적 구조이다. 그래서 이 인과관계가 억울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윤회연기를 도입하면 이러한 우리의 추론은 단연코 깨어지고 만다. 여기서의 인과관계의 설정이 너무 협애한 현재적 시점에만 국한되어 그 연기적 실상의 전체를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현재 내가 좋은 일을 하고 있는 행위는 미래 어느 시점에선가 반드시 선과(善果)를 거둘 것이며, 현재 내가 손해를 보고 있다는 악과는 과거의 나의 악업(惡業)의 결과일 뿐이라는 것이다.

 

    좋은 일 하면 미래 언젠가
좋은 일이 생기고
과거 언젠가
나쁜 일을 했기
때문이다
손해 보고 있는 것은    

 

 

다시 말해서 우리는 우리의 행위의 인과관계를 기나긴 윤회(saṃsāra)의 과정 속에서 넓게 설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좋은 일 하면 손해본다라는 우리의 현실적 판단은 옳은 듯하지만, 결코 옳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반드시 미신적인 전생이나 후생을 이야기하지 않아도, 나의 삶에 있어서 내가 지금 받고 있는 고통이 곧 나의 현재적 행위의 결과라는 생각을 지양하는데 보다 포괄적인 인식의 지평을 제공하는 훌륭한 논리구조인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좋은 일 해서 손해 보기 때문에 좋은 일을 안할 것이 아니라, 손해 보든 말든 반드시 선업(善業)을 계속 쌓아가는 행위야말로 나의 삶의 정언명령이라는 것이다.

 

이 절은 바로 선남자 선여인이 금강경의 실천으로 인해 현시적으로 핍박을 받는다 해도 그것은 과거 악업의 결과일 뿐, 오히려 그러한 핍박으로 인해 나의 전생의 죄업이 다 씻기고 반드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리라고 하는 희망에 찬 찬란한 멧세지를 우리에게 던지고 있는 것이다.

 

 

 

 

인용

목차

금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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