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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금강경 강해, 제이십칠분 - 27.1 ~ 如來不以具足相故得阿耨多羅三藐三菩堤 본문

고전/불경

금강경 강해, 제이십칠분 - 27.1 ~ 如來不以具足相故得阿耨多羅三藐三菩堤

건방진방랑자 2022. 11. 23.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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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끊음도 없고 멸함도 없나니

무단무멸분(無斷無滅分)

 

 

27-1.

수보리야! 네가 만약 여래가 상을 구족한 까닭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은 아니다라고, 이와 같이 생각한다면, 수보리야! 간곡히 부탁하노니, 이와 같은 생각을 짓지 말라, 여래가 상을 구족한 까닭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은 아니다라고.

須菩堤! 汝若作是念, 如來不以具足相故得阿耨多羅三藐三菩堤. 須菩堤! 莫作是念, 如來不以具足相故得阿耨多羅三藐三菩堤.

수보리! 여약작시념, 여래불이구족상고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수보리! 막작시념, 여래불이구족상고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여기 쓰인 구족(具足)’의 원어는 ‘saṃpad’인데, 이는 모든 것을 구비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미 20분에서 논의되었다. 무엇인가를 빠뜨리지 않고 있다는 의미다. ‘구족(具足)’ 역시 한역불전(漢譯佛典)에서 유행된 말이며 선진경전에는 보이지 않는다. 한 대(漢代)의 저작인 논형(論衡)』 「정설(正說)에 그 용례가 있다.

 

비구ㆍ비구니들이 입단(入團)과정에서 거치는 완전한 계율을 구족계(具足戒)’라고 하는데 이것도 하나도 빠뜨리지 않은 온전한 계율이라는 뜻이다. 소승 부파불교시대 때부터 이미 자세히 규정된 것인데, 통상(通常) 비구는 250계를 지켜야 하고, 비구니는 348()를 지켜야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인간평등 운운하는 불교이지만, 인도 사회의 관습에서 오는 저질적인 남녀차별의식을 이러한 구족계(具足戒)의 관습에서도 간파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나라 비구사회에 있어서도, 비구니를 깔보는 의식이 암암리 깔려있는 것을 종종 체험하게 되는데, 이런 의식에서 우리는 본질적으로 해방되어야 한다. 조선의 여인은 세계 어느 민족보다도 영특하고 기민하고 참을성 있고 내면의 깊이가 있다. 비구니들 중에서도 앞으로 훌륭한 고승과 학승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우리나라 불교종단은 비구니들의 교육에 보다 깊은 정성을 쏟아야 한다.

 

본 절의 내용은 한문을 오독(誤讀)하기 쉽게 되어 있다. 시중에 통용되는 대부분의 번역들이 산스크리트 원문과 대조하여 그 뜻이 번역되는 미묘한 과정을 면밀하게 살피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한 오류를 답습하고 있는 실정이다. 보통 여래불이구족상고득아다라삼삼보리(如來不以具足相故得阿耨多羅三藐三菩堤)’를 중간의 고() 앞에서 끊어 해석하게 되면, ‘여래는 상을 구족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다라삼막삼보리를 얻었다로 해석하기 쉽다. 그러나 여래(如來) 다음에 오는 ()’은 실제로 문장전체에 걸리는 부정사로 앞의 ()’에 걸리는 것이 아니라, 본동사인 ()’에 직접 걸리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여래는 상을 구족했기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은 아니다가 된다. 결국 둘다 부정이 있으므로 결과 되는 뜻에는 대차(大差)가 없을 수도 있으나 후자의 경우가 의미상으로나 문법 상으로 더 정확한 해석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산스크리트 원문에는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는가? 온전한 모습을 갖춘 것에 의하여 여래는 그 이상 없는 바른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하는가? 그렇지만 수보리야! 너는 그렇게 생각해서는 아니 된다. 로 되어 있다. 라집(羅什)역은 산스크리트 원본의 내용을 축약하면서, 그 원본의 의미 전체를 다시 한 번 부정하는, 부정의 대부정의 묘미를 발하고 있다. 또는 산스크리트 원본과 현장역(玄奘譯)에 즉하여 앞의 불이구족(不以具足)’()’은 연문(衍文)으로 간주할 수도 있다.

 

본절의 뜻은 온전한 상을 구족했기 때문에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을 얻은 것은 아니다라는 그 부정을 또 다시 부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온전한 상을 구족했기 때문에 무상정등각을 얻은 것은 아니다라는 생각은 이미 고도의 자각(自覺)이다. 그러나 그러한 고도의 자각, ‘~이 아니다라는 자각 자체가 해소되어야만 비로소 무상정등각이 드러나는 것이다. 백척간두(百尺竿頭), 수진일보(須進一步)!

 

 

 

 

인용

목차

금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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