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비고츠키 강의를 듣기 전, ‘레드 썬!’
얼굴엔 미소를 머금고 마음엔 어떤 흥분을 느끼며 손은 신나게 타이핑을 친다.
예전엔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되게 부담스러운 일이었고, ‘잘 써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기에 한 줄, 한 문단을 써나가기가 힘들었다. 그도 그럴 듯이 나 혼자만 볼 생각으로 쓰는 글이라면 막 쓰면 되지만, 누군가와 함께 공유하기 위해 쓰는 글이라면 ‘나의 무식을 남에게 알리지 마라!’라는 부담감으로 쓸 수밖에 없다.
▲ 간단한 돌멩이 하나 던져진 데서부터 시작된다. 그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헉’에서 ‘그까이꺼’로
글을 쓴다는 게 고통의 대명사로 느껴지던 시기를 지나며 점차 알게 되었다. ‘누군가 시킨 것도 아니고 내가 좋아서 하는 건데, 무에 그리 스트레스 받고 그러냐’는 마음의 소리(조석님께 양해를)를 듣게 된 것이다. 물론 마음의 소리가 들렸다고 한 순간에 글을 쓴다는 게 쉬워질 리는 없지만, 그게 하나의 계기가 되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그래서 그때부턴 일상의 자잘한 이야기인 이사한 이야기, 학교에서 놀러 간 이야기 등 누가 봐도 ‘저런 시답잖은 얘길 뭐 하러 쓰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글을 쓰게 되었다. ‘숭고한 소재만 글로 써야 한다’는 생각을 버렸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써 나가다 보니, 이젠 좀 더 가볍게, 그러면서도 하고 싶은 이야기를 거침없이 쓰게 되더라. 물론 저번 우치다 쌤의 후기는 2주일간 온갖 부담을 느끼며, 혹 우치다쌤을 왜곡하는 건 아닌지 걱정을 해가며 썼었다. 지금도 어떤 글이냐에 따라 부담의 차이는 있지만, 그럼에도 예전에 비하면 ‘부담 넣어둬 넣어둬~’하는 수준이라 할 수 있다.
▲ 한 땐 글을 쓰는 게 날 살리는 일이었고, 한 땐 부담으로 망설여지는 일이었고, 이젠 나름 즐거운 일이다. 카자흐스탄 여행기를 쓰며.
신나게 달리는 후기를 바라며
후기를 시작도 하기 전에 글 쓰는 것에 대해 썰을 풀고 있으니, 그 이유가 궁금할 것이다. 물론 나의 의중을 간파하신 분은 ‘지 자랑할라고 그라는 거고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겠지만, 이번 후기의 성격을 좀 명확하게 하기 위해 자질구레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4년 전에 썼던 비고츠키 후기는 ‘잘 써야 한다’는 부담과 교육학의 내용하고는 완벽하게 다른 비고츠키를 ‘잘 전달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무거워질 대로 무거워진 상태에서 썼다. 그러다 보니, 이 글은 후기도 아닌 것이, 강의 내용도 아닌 것이 ‘누구냐 넌?’이라 정체를 물어야 하는 글이 되었다. 이젠 시간도 흘렀고 (3년이면 서당개 풍월 읊는다는데 나도 ‘비’ 정도는 읊을 수 있겠지ㅡㅡ;;) 글 쓰는 것에 대해서 부담도 적어졌기 때문에 이번엔 사명감도 넣어놓고, 부담감도 내려놓고 ‘거침없이’ 신나게 후기를 써보고자 한다.
정자程子라는 해괴한 존칭을 지닌 중국철학자는 『논어論語』라는 책을 읽고 난 후 어떤 변화가 있는지 단계별로 서술했는데, 최고의 경지는 깨달음에 기뻐하며 ‘자기도 모르게 손으로 춤을 추고 기뻐 발을 구르는 것手之舞之足之蹈之者’이라고 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이 후기도 그처럼 손으로 춤을 추고, 발을 구르며 쓰는 후기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신나게 달려볼까.
▲ 2012년 1월, 강의 때의 결연한 포즈.
동섭쌤과의 인연, 그리고 그 후
2011년에 단재학교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듣게 된 강의가 박동섭 쌤(교수는 기술자적인 측면이 강하고, 선생은 선지자적인 측면이 강하다. 고로 이제부터 박동섭 센세せんせい라고 내 맘대로 부른다)의 강연이었다. 그땐 초임교사였고 교육학으로 배운 교육상식이 전부였던 ‘뼝아리’ 시절이었기에 동섭쌤의 강의는 힘겹기만 했다. 그때 들었던 생각은 ‘내가 지금까지 배운 교육학, 비고츠키, 교사학은 뭐지?’라는 거였다. 열심히 삐아제Jean Piaget(1896~1980)와 비고츠키Vygotsky(1896~1934)를 비교하며 외웠고 근접발달영역ZPD이 단골 문제였기에 돼지꼬리 땡땡을 치며 보고 또 봤는데, 기존의 앎이 새로운 앎을 견인하며 돕기보다 오히려 방해물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기존의 알던 것을 제거하고 난 자리에 남은 건 ‘나는 누구인가? 여긴 어디인가?’하는 혼란이었다. 그렇게 6번의 강의를 무사히 들으며 기존의 알던 것들을 지워나갔다.
▲ 당연한 듯 둘을 비교하고 차별을 두며, 그 내용만을 외웠었다. 그러면서도 '이걸 왜 배우지?'라는 생각은 없었다.
그 후로 동섭쌤의 강의는 들을 수 없었다. 전국구 스타강사가 되셔서 홍길동 뺨치며 심산유곡까지 찾아다니며 강의를 하는 비인간적인 스케쥴(인간에 대해 말하는 사람이 비인간적인 스케쥴이라뇨)을 소화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때부턴 감히 내가 범접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렇게 나도 학교에 적응하는 시간을 보냈고, 교육 경험을 쌓아가며 평행선처럼 각자의 영역에서 살아가게 되었다. 간혹 우치다쌤이란 또 다른 인연으로 한 번씩 마주치긴 했지만, 처음 강의를 듣던 때처럼 술도 마시며 편하게 얘기할 시간도 없었다. 그는 바람이 되어 한 번씩 ‘바쁘다고 전해라’라는 소식만 간간히 들려줄 뿐이었다.
▲ 나 뜻하지 않게 연수 받으러 온 것이었다더라.
‘박동섭MKⅡ’와 ‘좀 더 건빵다워진 건빵’의 재회!
어느덧 4년이 흘렀다. 동섭쌤은 그 기간 동안 많은 변화와 학문적인 성장이 있었다고 하더라. 어제 점심시간에 학생식당에서 어색한 듯, 반가운 듯 갑작스럽게 만나서 강의실로 이동할 때 “왜 비고츠키 두 번째 이야기는 안 쓰시는 거예요?”라고 물으니, “그간 많은 변화가 있었잖아요. 우치다 선생님을 만난 것이 가장 큰 변화죠. 아마도 책을 쓴다면 그런 것들을 녹여낸 책을 쓰게 될 거예요”라고 대답해주셨다. 그 말은 곧 우치다쌤을 만나기 전의 박동섭과, 만난 후의 박동섭 사이엔 엄청난 간극이 있다는 말처럼 들렸다. 그만큼 강한 영향력을 주고받으며 ‘박동섭MKⅡ’로 거듭났다는 얘기다. 할렐루야~
그런데 4년이 흐르며 나 또한 많은 부분에서 달라졌다. 나이 먹은 건 안 비밀~ 흠칫 뿡! 학교에서 아이들을 만나며 ‘서술이 곧 처방이다’라는 말의 꼬랑지 정도는 알게 되었으며, 고민하지 않으면 ‘백인남성의 언어’를 마구잡이로 쓰게 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고, 지적폐활량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우치다쌤의 강연록을 정리하며 우치다란 깊고 깊은 샘물에 발가락 정도는 담글 수 있었다. 현장에서의 경험과 박동섭-우치다라는 이론이 나를 할퀴고 지나가며 나는 좀 더 ‘건빵’스러워졌다고 할 수 있다(자랑질을 어디서~).
그래서 강의를 들으러 오면서 무척이나 궁금했다. ‘박동섭MKⅡ’와 ‘좀 더 건빵다워진 건빵’이 만나면 어떤 스파크가 튀고, 어떤 이야기들이 샘솟을지 말이다. 에피쿠로스 형님이 말했듯 원자의 작은 엇나감이 지구 생성의 시초가 되었다고 하듯, 우리의 작은 마주침이 어떤 연쇄 반응을 만들어낼지 기대되었다.
▲ 이제 만나러 갑니다.
‘모르는 게 약’이 되는 동섭쌤의 강의
동섭쌤이 모처럼만에 서울 근교에 강의를 하러 온다고 하여 반가운 마음에 찾아간 것이다. 강의실엔 사람들이 꽉 차 있다. 어떤 자리인지 모르고 왔는데, 알고 보니 교사 연수 프로그램 중 한 꼭지를 맡으신 거더라.
오전에도 그곳에서 강의를 들었는지, 강의실 안은 후끈후끈 했다. 자리에 앉아 마음을 다듬는다. ‘귀 쫑긋 세워 볼까?’라는 생각을 하며 말이다.
간혹 ‘동섭쌤의 강의를 듣기 위해서 비고츠키에 대한 기초적인 상식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라고 고민하는 분도 있을 것이다. 그런 분들에게 ‘어떤 선입견도, 어떤 지식도 없으면 오히려 듣기 편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겠다. 때론 모르기 때문에 잘 이해되는 강의도 존재한다. 아니, 아마도 진정한 강의란 백지상태의 나를 인정할 때, 비로소 알게 되는 강의일 것이다. 그러하기에 오히려 세상에 흘러 다니는, 특히 교육학의 비고츠키에 대한 짜투리 지식을 알면 알수록, 동섭쌤이 이야기하는 비고츠키는 ‘점점 멀어지나 봐’가 될 뿐이다. 서두에서 밝혔다시피, 4년 전의 나도 그것 때문에 꽤나 힘들었었다. 배운 게 있고 아는 게 있는데, 동섭쌤은 ‘이걸 보는 순간 모든 기억이 사라집니다. 레드 썬!’이라고 강의를 통해 쉼 없이 외치기 때문이다. 그러니 강의를 들으러 오시는 분들은 오히려 맘 편하게 ‘난 모든 걸 잊어버리러 간다’는 마음가짐으로 강의를 들으러 오면 된다.
다음 후기엔 본격적으로 강의 내용을 다룰 것이다. 2번째 후기의 제목은 ‘박동섭, 그~를 조심(우치다쌤 죄송합니다. 제가 작명실력이 형편없어서 막 가져다 씁니다. 거듭 죄송!)’이다. 다음에 보아요.
▲ 당당하다. 뜨거운 열기에 하나의 열기를 더하며.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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