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문과 인간의 무늬
새 신발을 살 때면 기분이 좋아진다. 무엇이든 새 물건을 산다는 것, 그리고 그걸 처음 사용할 때의 기분은 그 무엇과도 비길 수가 없다. 새것이니 어떤 구김도, 사용한 흔적도 전혀 남아 있지 않고 반짝반짝 빛나며 뻣뻣한 느낌에 기분이 절로 좋아지는 것이다. 하지만 쓰기 시작하면, 새것이 주던 감흥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 금방 구겨지고 더러워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때부턴 마구 잡이로 사용하여 전혀 아끼지 않게 된다. 이렇게만 보면 ‘새것은 언제나 좋고, 헌 것은 언제나 안 좋다’는 표현도 가능하다.
▲ 준규쌤의 오랜만의 강연이다. 나는 처음으로 준규쌤의 강연을 듣게 된다.
헌 것엔 나의 무늬가 들어있다
하지만 그건 사용하기 전까지의 생각일 뿐, 막상 실제로 사용해보면 그렇지 않다. 새것은 내 몸과 상관없는 물건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샀기 때문에 내 물건은 맞지만, 아직은 나의 어떤 흔적도 남아 있지 않기에 내 물건이라 할 수는 없다. 그러니 신는 그 순간에도 뻣뻣하여 발에 안기는 맛이 없고, 걸을 때조차 겉도는 느낌에 불편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얼마 걷지 않았는데도 발은 쉽게 피곤해지고 발목, 발바닥 할 것 없이 아프기만 하니 말이다.
그에 반해 이미 오래 전부터 신고 다녀 더러워질 대로 더러워진 신발은 그렇지 않다. 구김이 많아 보기에 좋지 않지만 나의 걸음걸이에 맞춰 생겨난 주름은 걸을 때 발의 압박을 최소화해주며, 바닥이 닳고 닳아 균형이 맞지 않지만 걷는 습관에 따라 닳은 것으로 한참을 걸어도 피곤하지 않다. 이것으로 보자면, 헌 것이야말로 그냥 시간이 지나며 낡은 것이 아니라, 내 몸에 최적화된 결과라 할 수 있다.
이런 걸 흔히 ‘무늬’라고 부른다. 살아온 방식이 녹아든 신발의 무늬는 그 사람이 어떻게 걸어 다니는지, 어느 정도로 걷는지가 누적된 것이며, 자주 입는 옷은 그 사람이 어느 동작을 자주 하는지, 어떤 습관을 가지고 있는지 반영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옷과 신발의 주름(무늬)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내 물건의 주름을 통해 나는 어떤 사람으로 보일까?
▲ 이사 하려 준비할 때 찍은 신발들. 신발과 옷엔 나의 무늬가 주름으로 남는다.
얼굴을 통해 드러난 무늬
흔히 ‘40대 이후의 얼굴에 대해서는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는 말을 자주 한다. 이 말은 ‘얼굴이야말로 사람의 무늬가 새겨지는 곳’이라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살았느냐 하는 것이 그대로 얼굴에 무늬로 남으니, 허투루 살지 말고 함부로 살지 말라는 경고라고도 할 수 있다. 아마도 늙음을 형벌로 여기는 사회 분위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얼굴에 책임지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성형이 성행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궁금한 점은 ‘왜 40대가 기준점이 됐을까?’하는 점이다. 여기엔 유전적으로 타고 난 얼굴과 생활방식이나 생각에 따라 후천적으로 형성된 얼굴을 나누는 기준을 40년이란 시간으로 보았다는 점이 중요하다. 선천적으로 타고 난 얼굴엔 새 신발처럼 나의 생활방식이나 생각이 스며들만한 여지가 없다. 즉 내 얼굴이지만, 부모의 얼굴이며 자연(유전)의 얼굴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험악한 얼굴일 수도 있고, 정감 가는 얼굴일 수도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타고 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에 반해 40년이 지난 후의 얼굴은 다르다고 할 수 있다(물론 이런 논의에서 성형수술 같은 인위적인 행위는 논외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자연스럽게 변해간 주름만이 삶이 반영된 무늬라 할 수 있다). 어떤 생각을 하며, 어떤 생활방식으로 살아왔느냐 하는 것이 40년이란 시간동안 켜켜이 쌓여 얼굴에 드러난다. 그렇기에 험악한 얼굴이 석굴암의 미소처럼 은은한 미소가 감도는 정감어린 얼굴이 되기도, 감히 접근조차 못할 정도로 더욱 험상 굳어져 살의가 느껴질 정도의 얼굴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새 신발이 헌 신발이 되어가며 구김과 얼룩이 생기듯, 사람의 얼굴도 40년이란 시간을 지내며 자신만의 무늬가 새겨진다. 그 때의 무늬란 바로 그 누구도 아닌 ‘나만의 것’이라 말할 수 있다.
▲ 얼굴엔 그 사람의 삶이 표현되는 공간이다.
언어를 통해 드러난 무늬
하물며 얼굴이 그러한대, 언어는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사람에겐 여러 가지 무늬가 있지만, 그 중에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무늬가 바로 언어라고 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文글월문’이라는 한자는 문장文章, 문자文字와 같은 단어로 주로 쓰여 ‘글’을 표현한 한자로 알고 있지만, 실상은 사람의 가슴에 입묵入墨(문신과 같은 뜻임)한 것을 표현한 글자로 ‘사람의 무늬人文’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여기엔 당연히 글이나 말 속엔 그 사람의 무늬가 들어 있으며, 그걸 통해 그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다는 얘기까지 포함되어 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글이나 말엔 테크닉의 뛰어남이나, 글을 잘 쓴다는 식의 판단 기준이 아니라, 그 사람의 감정이 어떤 방향성으로 드러나며, 근본에 어떤 진실을 담지하고 있느냐가 판단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알기 위해선 요즘 『육룡이 나르샤』라는 드라마로 새롭게 주목받고 있는 정도전의 글을 살펴보면 훨씬 이해하기 쉽다.
해와 달과 별은 하늘의 무늬이고, 산과 천과 풀과 나무는 땅의 무늬이며, 시서와 예악은 사람의 무늬이다. 그러나 하늘은 기로 드러나며 땅은 형체로 드러나며 사람은 도로 드러내는 것이기에 “글이란 도를 싣는 그릇이다”라고 한 것이다.
사람의 무늬가 올바른 도를 얻으면 시서와 예악의 가르침이 천하에 밝아져서 해와 달과 별의 운행이 순조로워지고 만물이 골고루 다스려 진다. - 정도전, 「도은문집서」
日月星辰天之文也; 山川草木地之文也; 詩書禮樂人之文也. 然天以氣; 地以形; 而人則以道. 故曰文者, 載道之器, 言人文也, 得其道, 詩書禮樂之敎, 明於天下, 順三光之行, 理萬物之宜.
정도전이 펼쳐내는 ‘무늬론’의 핵심은 사람의 무늬는 ‘시서예악’의 문학 장르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걸 한문학사에선 ‘문이재도文以載道(글이란 도를 싣는 그릇)’라는 단어로 개념화 시킨다. 물론 글이란 걸 감정을 드러내는 목적이 아닌, 그저 도를 싣는 수단으로 보았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는 말이긴 하지만, 여기선 그런 원론적인 이야기보다 ‘글이야말로 사람의 무늬’라는 말에 집중하여 살펴보아야 한다.
정도전의 논리는 해와 달과 별로 하늘의 무늬가 드러난 것이고 산과 강과 풀로 땅의 무늬가 드러난 것이며, 여러 문학적 양식으로 사람의 무늬가 표현된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런 무늬들은 각자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있어 함께 기를 주고받기에 인간의 무늬가 제대로 드러날 때 하늘의 무늬도 땅의 무늬도 제자리를 잡는다고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을 알고 싶거든 그 사람이 하는 말과 그 사람이 쓴 글을 보면 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걸 통해 100% 그 사람을 알게 된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는 단서가 된다고는 할 수 있다.
▲ 글이나 말, 그런 건 한순간에 꾸민다고 되지 않는 인간의 무늬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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