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애쓰지 말고 즐기라
주최 측에선 강연의 제목을 ‘대안학교 아빠로 사는 것’으로 잡았지만, 준규쌤은 ‘대안학교’라는 명칭과 ‘아빠’라는 명칭을 재정의하며 강연을 시작했다. 네 번째 후기에서 밝혔다시피 그런 식의 좁은 시좌로는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다 담을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준규쌤은 아예 강연 제목을 ‘발신자에서 수신자로’라고 새롭게 정해서 오셨다.
발신자란 무언가 메시지를 말하는 사람이고, 수신자는 그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둘은 항상 쌍으로 있을 때만 존재의 의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너의 자리에 서 있을게. 너는 나의 자리에 오렴. 니가 발신해 그러면 나는 수신자가 될게.”라는 말을 통해 수신자가 된다는 게 어떤 것인지 어렴풋이 알려주긴 했지만 구체적으로 알려주지 않은 채 강연이 끝나니, 강연을 들은 사람들은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마침내 여덟 번째 후기에서 발신자와 수신자의 관계를 좀 더 명확하게 설명하며 그게 왜 자녀교육과 깊게 연관되어 있는지도 밝혔다.
▲ 따스한 봄날 경기소리전수관도 열기로 꽉 차 오르고 있다.
대안학교 학생은 진로와 부모의 욕망 추구에 대해
어느덧 질의응답 시간도 끝을 향해 다가가고 있다. 마지막으로 마이크를 잡은 분은 “대안학교를 졸업한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하시나요? 발전방향은 어떤 것이며, 한계가 있다면 어떤 것인지 듣고 싶습니다”라는 대안학교의 진로에 대한 불안을 그대로 담은 질문을 했다.
아마도 대안학교든 일반학교든 부모의 가장 큰 걱정은 진로에 대한 것이리라. 왜냐하면 학교 교육의 결과가 ‘상급학교 진학’이란 한정된 진로 모델만을 가지고 있으며, 대부분의 학부모도 그런 생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학교에서 부모님들과 상담을 하다보면, ‘기승전-공부’의 얘기로 흐르지만, 이때의 공부란 입시공부로 바꿔 말해도 이상하지 않다. 그러니 ‘대학진학’이 중심으로 자리 잡는 이상 ‘수능’이든 ‘입학사정관’이든 ‘수시’든 대학 맞춤형 교육이 모든 교육에 대한 생각을 덮을 수밖에 없다.
준규쌤은 “대부분의 대안학교가 대입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쩔 수 없이 텍스트 위주의 공부를 하게 되는 거죠”라고 명확히 밝힌 후에, 결론적으로 “부모 자신의 욕망을 스스로 손가락질하지 말고, 그걸 최대한 살리세요. 천민자본주의의 욕망이 자식에게 해를 끼치지나 않을까 걱정하며 거세해왔고 그래야 잘 클 수 있다고 생각해왔는데,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맘껏 욕망하시고 그걸 이루세요. 대학원에 간다던지, 산티아고의 트래킹 코스를 걷는다던지 맘껏 하세요. 그때 자식이 초등학생 이상의 나이라면 멀티 아이덴티티가 있기에 충분히 부모의 모습을 보며 취사선택할 수 있을 겁니다. 대안학교에 보낸 용기로, 부모 또한 용기 내어 욕망대로 살아도 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자식의 미래를 위해 부모는 욕망대로 살면 끝!
이건 파격이며, 부모님들을 충격으로 도가니로 몰아넣는 얘기였다. 소위 잘 나가는 대부분의 부모들이 자신의 허영이나 욕심 때문에 아이들에게 ‘다 너 잘 되라고 하는 거야’라는 미명으로 공부지옥으로 밀어 넣고 있다. 그래서 아이들이 불행해진 시대가 된 것이다. 산업혁명기엔 저임금 과노동으로 불행의 시대를 살던 아이들이, 지금은 학원을 뺑뺑이 돌며 불행의 시대를 살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시대에 준규쌤은 ‘그런 걱정하지 말고 부모의 욕망대로 사세요’라고 외치는 것이니, 잘못 말한 게 아닌지 의아스럽기까지 했다. 이 말을 자칫 오해하면 ‘대부분의 부모들처럼 그렇게 학습매니저가 되어도 괜찮습니다’라는 말이 되기도 하니 말이다.
하지만 이 말은 결코 그런 말이 아니라는 게 중요하다. 이미 강연장에 모인 분들은 자식을 대안학교에 보내며 스스로의 욕망을 거세해 왔고, 자식을 위해서면라면 모든 것을 희생해 왔다. 그걸 통해 이미 대부분의 부모들과 같은 욕망을 지닌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충분히 보여주며 살아온 분들이다. 즉,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이 있는 분들이고, 그런 과정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억누르는 데 철저했던 분들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정도의 이해가 있었기 때문에, 준규쌤은 과감하게 “부모의 욕망대로 사세요”라고 목소리를 높일 수 있었던 것이다.
▲ 강연이 끝을 향해 간다. 이 순간 준규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준규쌤과 공자 교육법의 공통점, ‘대상 맞춤형 교육’
이런 말을 들을 때면 많은 생각이 든다. 지금 사회가 요구하는 부모상은 ‘자식을 위해 헌신하는 부모’, ‘자식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아는 부모’, ‘자식의 미래를 위해 모든 정보를 알고 이끌어줄 수 있는 부모’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준규쌤은 사회가 요구하는 부모상과는 전혀 다른 부모상을 말하고 있으니, 생각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 심지어 자식에게만 맞춰진 안테나를 거두고 자신을 위해 살라는 말까지 하는 것이니, 망치로 고정관념을 박살내야만 겨우 알아들을 수 있는 말임에 분명하다.
그럼에도 뜬소리로 들리지 않는 이유는 뭐니 뭐니 해도 부모의 성향에 따라 해준 말이기 때문이다. 만약 입시설명회에 참석하는 분들에게 강연을 했다면 준규쌤은 여기서 말한 것과는 반대되는 얘기를 했을 것이다. 이건 공자의 제자 교육법과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공자도 제자의 성향에 따라 같은 질문에도 다른 대답을 했던 적이 있다.
자로가 “들으면 행동해야 합니까?”라고 물으니, 공자가 “아빠와 형이 있는데, 어찌 그것을 듣고 행하겠느냐?”라고 대답했고, 염유가 “들으면 행동해야 합니까?”라고 물으니, 공자가 “들었으면 행동해야지.”라고 대답했다. 어느 날 공서화가 “자로가 ‘들으면 행동해야 합니까?’라고 물었을 땐, 선생님이 ‘아빠와 형이 있는데 어찌 그것을 듣고 행동하느냐?’라고 대답했고, 염유가 ‘들으면 행동해야 합니까?’라고 물었을 땐, 선생님이 ‘들었으면 행동해야지’라고 대답했는데, 저는 (선생님의 이렇게 다른 대답을) 이해할 수가 없기에, (그 까닭을) 감히 묻겠습니다.”라고 말하니, 공자는 “염유는 머뭇거리기 때문에 행동하도록 했고, 자로는 성급하기 때문에 한 발짝 물러서게 했다”고 대답했다.
子路問:“聞斯行諸?” 子曰:“有父兄在, 如之何其聞斯行之?” 冉有問:“聞斯行諸?” 子曰:“聞斯行之.” 公西華曰:“由也問聞斯行諸, 子曰 有父兄在; 求也問聞斯行諸, 子曰 聞斯行之. 赤也惑, 敢問.” 子曰:“求也退, 故進之; 由也兼人, 故退之.” -『論語』 「先進」 21
이 대답에서도 알 수 있듯이, 대상의 성향에 따라 같은 질문에도 전혀 다른 대답을 해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준규쌤도 오늘처럼 아이들의 성장을 위해 욕망을 제거하는 것에 능숙한 학부모를 대상으로 강연할 때와, 자신의 욕망을 위해 아이들을 내모는 학부모를 대상으로 강연할 때의 내용은 다른 거였다.
▲ 함께 삶이란 파도에서 표류하던 우리들. 이제 각자의 자리로 나가 삶을 살 차례다.
애쓰지 말고, 노력하지 말고 그저 삶을 살아내다
질의응답이 끝나고 준규쌤은 “‘내가 발신을 잘 했더니 잘 컸어’, ‘내가 발신을 못했더니 잘못 컸어’라는 말엔 모두 ‘아이의 성장은 모두 부모 탓’이라는 생각을 기반으로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말들은 모두 잘못된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사회는 비문자 사회로 급속하게 변하고 있고, ‘시간의 중첩으로 내일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거부하는 아이들이 급속하게 늘고 있습니다. 이런 아이들을 대할 때는 지금과 같은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이 필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아이를 드문드문 관찰하고, 부모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하나 생각하고 살면 그걸로 이미 충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덧붙여 ‘소통은 오해일 뿐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어른이라고 할 수 있고, ‘난 소통을 잘하는 사람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라는 말로 강연을 정리했다.
애초에 ‘소통했다’는 말이 오해일 뿐이라면 소통하려 애쓸 필요 없이, 그저 자신의 말을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면 된다. 그러려면 부모는 자식에 대한 관심을 거두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 되는 것이다. 결국 이 말은 ‘부모이지만 부모이기를 거부할 수 있느냐?’의 논의라고 할 수 있다. 부모의 상을 철저히 거부할 때 자식은 생득적으로 타고난 그대로의 것을 억압하지 않고 자유롭게 나래를 펼 수 있다는 말이다.
강연장을 나가는 사람들은 무언가 알게 되어 시원한 느낌을 받았다기보다, 무언가를 버려야 한다는 생각에 무거운 마음을 느꼈을 것이다. 그래도 어떨 텐가? 우린 토요일 오후에 봄기운을 만끽하며 이곳에 왔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삶의 파도 한 가운데서 표류한 것일 뿐인데 말이다. 함께 표류하던 우리는 그렇게 강연장을 빠져 나왔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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