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장 9. 어떤 인생을 살 것인가
武王末受命, 周公成文ㆍ武之德, 追王大王ㆍ王季, 上祀先公以天子之禮. 斯禮也, 達乎諸候ㆍ大夫, 及士ㆍ庶人. 父爲大夫, 子爲士, 葬以大夫, 祭以士. 父爲士, 子爲大夫, 葬以士, 祭以大夫. 期之喪, 達乎大夫. 三年之喪, 達乎天子. 父母之喪, 無貴賤一也.” 무왕(武王)은 말년에 명(命)을 받았고 주공은 무왕(武王)의 덕을 완성하였다. 저 멀리 윗 대(代)에 있는 선조분들에게 천자(天子)의 예(禮)로써 제사를 드렸으니 이러한 예(禮)는 제후(諸侯)와 대부(大夫)와 사(士), 서인(庶人)에까지 미친다. 아버지가 대부(大夫)이고 아들이 사(士)일 경우, 장(葬)은 대부(大夫)의 예(禮)로 하고, 제(祭)는 살아 있는 아들이 하니까 사(士)의 예(禮)로 한다. 아버지가 사(士)이고 아들이 대부(大夫)일 경우는 장(葬)은 사(士)의 예(禮)로 하고, 제(祭)는 대부(大夫)의 예(禮)로써 한다. 1년상은 대부(大夫) 작위까지 적용되고, 3년상은 천자(天子)에게 적용되는데, 부모상의 경우는 작위가 있고 없음에 관계없이 동일하다. 此言周公之事. 末, 猶老也. 追王, 蓋推文ㆍ武之意, 以及乎王迹之所起也. 여기서는 주공의 일을 말했다. 말(末)은 늙어서란 말이다. 추왕(追王)은 대개 문무의 뜻을 미루어 왕의 자취가 일어난 것까지 이르는 것이다. 先公, 組紺以上至后稷也. 上祀先公以天子之禮, 又推大王ㆍ王季之意, 以及於無窮也. 선공(先公)은 고공단보의 아버지인 조감으로부터 윗대인 후직에까지 이르는 것이다. ‘상사선공이천자지례(上祀先公以天子之禮)’라는 것은 태왕과 왕계의 뜻을 확충하여 무궁한 조상에게까지 미치는 것이다. 制爲禮法, 以及天下, 使葬用死者之爵, 祭用生者之祿. 조공이 예법을 제정하여 천하에 미치게 하여 장례엔 죽은 이의 벼슬을 이용하고 제례엔 살아있는 자식의 벼슬을 이용한다. 喪服自期以下, 諸侯絶, 大夫降; 而父母之喪, 上下同之, 推己以及人也. 右第十八章. 상복은 1년상 이하부터 제후는 입지 않고 대부는 기간을 축소하며, 부모의 상은 윗사람이나 아랫사람이 같으니, 자기를 미루어 남에게 미치는 것이다. |
‘무왕말수명 주공성문무지덕(武王末受命 周公成文武之德)’
무왕(武王)은 86세가 돼가지고 쿠데타에 성공하고 명(命)을 받았습니다. 늙은이가 다 되어가지고 혁명에 성공한 것이죠. 그런데 주공(周公)은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의 덕(德)을 종합한 사람입니다.
『논어(論語)』 「술이(述而)」에 “꿈에서 항상 周公을 보는데 요즘은 周公이 나타나지 않는다[子曰 甚矣 吾衰也 久矣 吾不復夢見周公].”라고 탄식했지요. 여러분도 어떤 학문분야에서 이왕 전공을 한다면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택해야 합니다. 나는 왕부지(王夫之)를 한때 전공했는데, 역시 위대한 선택이었다고 판단합니다.
왕부지(王夫之)는 40년 동안 혼자 돌산에서 살면서 그 위대한 저술을 했거든요. 내가 앞으로 어떤 삶을 살게 되든지 간에, 역시 그런 사람의 삶, 경건함, 위대함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고개 숙여지는 바가 있거든요. 인생의 중요한 고비 고비마다 왕부지(王夫之) 생각나서, 이 이상 더 행복할 게 있냐고 나를 추스리고는 진리탐구에 몸을 바치게 됩니다. 여러분들도 항상 그러한 삶의 파라곤(Paragon)을 제대로 가지고 있으라고. 김영삼이나 김종필 같은 사람들을 파라곤(Paragon)으로 삼는 그런 수준에서 우리나라의 정치가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 문제가 큰 겁니다. 패라곤, 즉 모범으로 삼고자 하는 ‘본(本) 받고 싶은 인간’이 너무 없다는 반증일 거예요. 그러나 공자(孔子)에게는 주공(周公)이라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항상 문명의 운영에 대한 향심(向心)이 있었지요.
최근, 나한테는 다시 교수로 복귀하지 않겠느냐는 유혹이 많아요. 내가 교수로 못갈 건 없습니다. 한의대를 졸업하고 나서 어디든 교수로 갈 수는 있는데, 여러 가지 진로를 생각하게 되요. 가만히 앉아서 생각하다가 보니, 스피노자(Spinoza)가 암스테르담의 다락방에 앉아가지고 안경의 렌즈를 갈면서 『에티카(Ethica)』를 쓰고 있는데, 하이델베르그 대학에서 교수로 와달라고 초빙을 했던 일화가 떠올랐습니다. 그때 스피노자는 단호하게 그 요청을 거절했어요. 화란에서 파문당하고 핍박받는 유태인으로서의 스피노자, 렌즈 쪼가리나 갈고 있는 이런 사람을 교수로 모셔가려고 하는 자세는 유럽지성계의 훌륭한 점이지요. 그런데 스피노자는 거절합니다. 그런 내용을 담은 편지가 남아 있어요.
이런 일화를 떠올리면서, ‘과연 내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느냐?’ 가만히 생각을 해본 거예요. 내가 세칭 일류대학 교수가 되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될 수도 있어요. 배제는 안 합니다. 그러나 무언가 본질적인 삶의 가능성,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되는가를 깊게 깊게 고민할 수밖에. 이것이 성인(聖人)의 길이고, 문화창조의 하나의 뜻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결정하기를, “나는 당분간 그저 도올서원이나 하자! 그리고 유유작작 유유자적하게 뒷산을 산보나 하고 살자!” 이게 내가 내린 결론입니다. 성급하게 빨리 움직일 필요가 없단 말입니다. 가능성을 너무 좁히지 말자! 이거예요. 김용옥이 한 번 사서(四書)를 번역했다고 하면 기똥차지 않겠어요? 여태까지 한민족이 맛볼 수 없었던 고전의 맛 하나만 남겨놔도 보람이 있는 삶을 살다가 죽는 것입니다. 그런 프라이드(Pride)가 있어야 사는 거예요. 그런 게 제일 중요한 겁니다. 그래서 나는 요새 아주 마음이 편하고 여유가 있어요. 어디 소속되어 있는 놈들은 개혁바람에 자리가 날라갈까 전전긍긍하질 않나, 정년퇴임 후에는 어떡하나 이러고 저러고. 걱정꺼리가 늘 뒤따라 다닙니다. 나는 정년퇴임을 30대에 해 버렸으니까, 무엇에 연연할 게 없어요. 이 얼마나 멋있습니까? 난 부교수도 아니고 고려대학 정교수까지 다 해 본 놈인데, 내가 지금 와서 또 어딜 간다고? 어디 총장으로 오라고 해도 나는 갈 수 없다!
나는 하루의 생활에서 구체적으로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무한히 기쁘고 뿌듯합니다. ‘컬츄럴 히어로(Cultural Hero)’ 성인(聖人)들이 한 것과 같은, 무언가 본질적인 것을 해야 되지 않을까? 전에 말했듯이, 여러분들이 졸업하고 돈도 벌고 하면 도올서원을 멋들어지게 같이 짓자고! 거기서 소림사(少林寺)에서처럼 쿵후를 하자 이거야. 그게 제일 진실한 삶의 모습인 것 같습니다.
‘추왕태왕왕계(追王大王王季)’
주공(周公)은 무엇을 했느냐? 태왕(大王), 왕계(王季)를 추왕(追王)했지요. 왕(王)으로 추봉하고 시호를 드린 것입니다. 저번에 귀신이 생김으로써 역사의 지속(continuity)이 가능해졌다고 말했듯이, 주공(周公)은 이런 식으로 역사적 정통성을 확립해 나가는 거예요. 그전에는 그런 관념들이 없으니까.
‘상사선공 이천자지례(上祀先公 以天子之禮)’
이것은 주자 주를 보면, ‘선공 조감이상지후직야(先公 組紺以上至后稷也)’라고 했는데, 후직(后稷)이라는 것은 농사짓는 신(神)이든가 그런 것이겠지요. 그러니까 선공(先公). 즉 조감(組紺)·후직(后稷)이라는 것은 아주 새까맣게 올라가는 선조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까지 천자(天子)의 예(禮)로써 제사를 지냈지요.
‘사례야 달호제후대부급사서인(斯禮也 達乎諸侯大夫及士庶人)’
여기서 예(禮)라는 것은 지금 주공(周公)이 최초로 중국문명의 기초를 만들어간 그 예(禮)를 말하는 겁니다. 이 문장에서, 제후(諸侯)·대부(大夫)·사(士)·서인(庶人)이라는 것으로 중용(中庸)이 성립한 시대의 정확한 신분구조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후(諸侯)·대부(大夫)·사(士)·서인(庶人)은 중앙(中央)의 위계질서를 제외한 지방의 제후국(諸侯國) 내에서의 위계질서입니다. 중앙에는 공(公).후(侯).백(伯).자(子).남작(男爵)의 작위(爵位)가 있고, 제후국(諸侯國)의 경우에는 노(魯)나라면 노나라의 제후(諸侯)가 있고, 제후(諸侯) 밑에 대부(大夫)들이 있고, 대부(大夫) 밑에 사(士)가 있고, 사(士) 밑에 서인(庶人)이 있지요.
여기서 사(士)라는 것은 ‘선비[士]’라고 번역하면 안 됩니다. 이 ‘사(士)’는 당시의 특수한 신분을 일컫는 호칭이거든요. ‘선비 士’는 ‘조선시대의 사(士)의 용법’에 따라 규정된 의미일 뿐입니다. 천자문(千字文)에 나오는 훈(訓)이라는 것은 조선조의 용법을 나타내는 것일 뿐이예요. 이것을 일본에서는 ‘사무라이 士’로 읽습니다. 전혀 달라요. 여기서 사(士)는 선비가 아니라 서인(庶人) 위에 있는 어떠한 위계를 말합니다. 사(士)를 백 명 내지 천 명 거느리는 사람을 대부(大夫)라고 한다고 했어요. 따라서 사(士)는 굉장히 낮은 신분임을 짐작할 수가 있죠. 우리가 사졸(士卒)·병사(兵士)라고 할 때의 용법과 같다고 보면 됩니다. 요즘 군대에서의 하사(下士) 정도가 되는 거지요. 서인(庶人)은 일등병 정도고. 조선조에서 말하는 선비는 『중용(中庸)』에서 말하는 위계로 본다면, 최소한 대부(大夫) 정도가 될 겁니다.
‘달호(達乎)’라는 것은, ‘이들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었다(universally applied to these people)’는 이야기입니다(父爲大夫 子爲士 葬以大夫 祭以士 父爲士 子爲大夫 葬以士 祭以大夫 期之喪 達乎大夫 三年之喪 達乎天子 父母之喪 無貴賤一也).
이미 얘기했지만, 고례(古禮)에는 사람의 죽음을 하늘[魂]과 땅[魄]이 서로 떨어져 나가는 것이라고 인식됩니다. 그래서 사람이 죽자마자 지붕으로 흰옷을 던지는 풍습은, 말하자면 하늘로 가는 길에 하얀 카펫트를 깔아주면서 편안히 올라가라는 의미였던 거죠. 더 오래된 풍습은 시체를 그 자리에, 즉 땅바닥이나 방구들 밑에 직접 파고 묻는 겁니다.
우리나라에도 전라도나 황해도 해변가의 마을에는 ‘초분’이란 게 있었는데, 죽은 사람을 마당에 뉘고 가랑잎을 덮어서 썩혔거든요. 옛날 사람들은 인간의 삶이란 반드시 ‘집‘이라는 일정한 공간의 조건을 가진다고 생각했어요【현대인의 삶은 이런 문명의 기본정서를 상실해 버렸다. 요즈음의 신도시의 거대한 아파트 단지를 보면, 그게 완전히 ‘베드 타운(bed town)’, 즉 잠만 자고 나오는 곳이지 도저히 사람이 제대로 살 수 있도록 조건화되어 있는 곳이 아니라는 느낌을 단박에 받을 수밖에 없도록 꾸며져 있다. 우리의 조상들은 정신력 하나만 가지고 버틴 신기한 삶을 산 사람들이 결코 아니라는 상식적인 사실에 눈을 돌려야 할 것이다. 자연과 문명이 서로 어그러지지 않도록 애썼으며, 또한 문명 속에서 살면서 후손들이 그 문명의 조건에 알맞도록 성장할 수 있는 기본적인 삶의 터전을 성실하게 일구고 살았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의식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집의 구조와 질서, 공간의 처리방식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안에서는 ‘배움’이라는 현상이 일어나지 않고서는 못 배길 그런 물리적 조건을 기본적으로 닦아 놓고 살았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그 집에 살던 사람이 죽으면 반드시 그 사람이 평소에 살던 그 땅에 묻어서 죽은 사람의 신기백(神氣魄)가 구들 밑이나 마당의 흙으로 환원되었다가, 다시 아이가 태어날 때 계속 이어지게 했던 겁니다. 이처럼 백(魄)을 그 집안에서 순환시킨다는 생각이 이 같은 풍습으로 정착된 겁니다. 옛 사람들한테는 ‘이사’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더구나 지금의 ‘아파트’같이 공중에 붕 떠있는 ‘하늘의 집’ 같은 건 상상할 수도 없었어요. 반드시 땅의 조건 위에서, 집안 대대로 백(魄)을 순환시켰습니다. ‘삼일장(三日葬)’은 3일 동안 시체를 집안에 놔뒀다가 장지(葬地)로 가는 걸 말하고, ‘9일장’은 9일 동안 그렇게 한다는 건데, 이처럼 차이가 나는 이유는 간단한 거예요. 서민들이야 동네사람들이 모여서 금방 장사를 끝낼 수 있지만, 천자(天子)가 죽었는데 저 멀리 광동지방의 제후가 찾아오려면 엄청난 시간이 걸릴 터이므로 높은 사람일수록 상(喪)의 기간이 길어질 것 아닙니까?
사람이 바로 죽고 난 다음 지내는 예식(禮式)을 상례(喪禮)라고 하고, 상(喪) 기간이 지나고 정해진 ‘묘지’에 묻는 것을 상례(葬禮)라고 하고, 그 뒤에 집에서 신주(神主)만 놓고 지내는 예식(禮式)을 제례(祭禮)라고 합니다. 이렇듯, 상(喪)ㆍ장(葬)ㆍ제례(祭禮)는 분명하게 구별되는 것입니다. 또 사람이 바로 죽었을 때, 그 사람이 사(死)했다고 하고, 장례를 치른 뒤라면 망(亡)했다고 합니다. 지금의 ‘사망(死亡)’이란 말도 따지고 보면 의미가 다른 두 글자의 조합이지요.
다시 원문의 풀이로 돌아가서, 장례까지는 죽은 사람의 작위에 걸맞게 하고, 제례는 백(魄)이 없어진 상태에서 신주(神主)만 놓고 산 사람이 지내는 것이므로 산 사람의 작위에 맞게 례(禮)를 차리라는 것입니다. “1년 상(喪)은 대부(大夫)에까지 미치고, 즉 서인(庶人)ㆍ사(士)ㆍ대부(大夫)에까지 미치고, 3년 상(喪)은 천자(天子)에게 적용된다”고 했어요. 그런데 ‘부모의 상’은 귀천 없이 한결같은 것[無貴賤一也]이라 했는데, 이것은 주공(周公)이 자신의 개인적 아픔의 경험을 전 인민에게 보편화시킨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주자 주에, “부모의 상(喪)은 신분이 높거나 낮거나 똑같은데, 자기를 미루어 남에게 미친다는 말이다[父母之喪 上下同之 推己以及人也].”라고 했거든요. 이처럼 유교는 천자니 대부니 그런 작위(爵位)에 중요성을 두는 게 아니라, 부모와 자식 간의 1대 사이를 굉장히 중시(重視)하고 있어요. 부(父)와 자(子)를 중심개념(center concept)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 특기할 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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