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내 혀가 있느냐?
언어가 이처럼 불완전한 도구라면 우리는 언어를 통해 자신의 뜻을 전달하려는 노력을 포기해야 할 것인가?
불완전하게 남겨둬 많은 얘기를 담긴다
서진(西晋)의 구양건(歐陽建)은 「언진의론(言盡意論)」에서 이렇게 말한다. “고금에 이름을 바로잡으려 힘쓰고, 성현이 말을 능히 떠나지 못한 것은 그 까닭이 무엇인가? 진실로 이치를 마음에서 얻어도 말이 아니면 펼 수가 없고, 사물을 말에 고정시켜도 이름이 아니면 구분할 수 없다.” 언어가 제 아무리 불완전한 존재라 해도, 인간은 언어를 떠나서는 결코 살 수 없다.
그렇다면 옛 성인의 뜻은 어떻게 전달되는가? 『주역(周易)』 「계사(繫辭)」는 다시 이렇게 말한다. “성인은 상(象)을 세워서 그 뜻을 다하고, 괘(卦)를 세워서 참과 거짓을 다하며, 문사를 이어서 그 말을 다한다[聖人立象 以盡意 設卦 以盡情僞 繫辭焉 設卦以盡其言].” 여기에서 ‘입상진의(立象盡意)’의 말이 나왔다. 말로 뜻을 다 할 수 없다면 형상으로써 뜻을 전달하라는 것이다.
『주역(周易)』에서 입상진의하고 있는 몇 예를 보기로 하자. 중부괘(中孚卦) 구이(九二)의 효사(爻辭)를 보면 “우는 학이 그늘에 있고, 그 새끼가 화답한다. 내게 좋은 술잔 있으니, 그대와 함께 나누리라[鳴鶴在陰, 其子和之. 我有好爵, 吾與爾靡之].”라 하였다. 무슨 말인가? 괘를 풀이하는 사람은 이를 ‘군자는 언행을 조심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한다. 어미 학이 산기슭에서 울면 그 새끼는 어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도 화답하여 운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마음은 뜻 없이 던지는 한마디 말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곤 한다. 좋은 술잔이 있으면 여러 사람이 함께 이것을 가지고 술을 마신다. 이와 같이 아름다운 언행은 여러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러니 군자는 각별히 언행에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 해괘(解卦) 육삼(六三)의 효사(爻辭)는 “짐을 지고 수레를 타니, 도적을 불러들인다[負且乘, 致寇至].”라 하였다. 이 말은 상하의 기강이 문란해지면 외적의 침입을 자초하는 일임을 경계한 것이다. 어떻게 그러한가? 등에 짐을 지는 것은 천한 소인이나 하는 일이다. 수레는 고귀한 신분의 군자가 탄다. 등에 짐을 져야 할 소인이 귀한 사람이나 탈 수레를 탔으니, 그 기강이 문란함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외적이 이 틈을 타서 도발하려 함은 당연하다. 그 분석 유추의 과정이 마치 한 편의 시를 분석하는 것과 방불치 아니한가.
말하는 이의 ‘입상(立象)’이 듣는 이에게 ‘진의(盡意)’되기까지는 이렇듯 몇 차례의 유추와 비약이 감행된다. 그래서 연암 박지원(朴趾源)은 「답이중존서(答李仲存書)」에서 이렇게 말한다. “속담에, 꿈에 중을 보면 부스럼이 생긴다고 하는데 무슨 말인가? 중은 절에 살고, 절은 산에 있고, 산에는 옻나무가 있으며, 옻나무는 사람에게 부스럼이 나게 하니, 꿈속에서 서로 인하게 되는 것이다[鄙言有之, 夢僧成癩, 何謂也? 僧居寺, 寺在山, 山有漆, 漆能癩人, 所以相因於夢也].” 중과 부스럼, 이 두 ‘상(象)’ 사이에는 ‘중 ⇒ 절 ⇒ 산 ⇒ 옻 ⇒ 부스럼’이라는 여러 단계의 유추가 생략되어 있다. 생략된 이 여러 단계를 복원시켜야 만이 올바로 ‘진의(盡意)’할 수 있다.
꿈보다 해몽. 그러나 새로운 의미가 생성된다
『토정비결』이 일러주는 점괘는 모두 ‘입상’만으로 되어 있으므로, 그 안에 담긴 뜻은 그래서 사람마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풀이된다. 그러니 『토정비결』은 언제든지 신통력을 잃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이러한 ‘입상’들은 뒷세상 사람들의 견강부회를 낳게 마련이어서, 뒤에 가면 어느 것이 사실에 가까운지 조차 알 수 없게 되는 경우도 많다.
다른 예로 땅이름을 통해서도 이러한 오해를 보게 된다. 문경에 가면 새재가 있다. 한자로는 조령(鳥嶺)이다. 새재가 먼저고 조령은 한자로 옮긴 말이다. 그러나 조령이 입에 굳어지자, 새도 날아 넘어가지 못하는 고개라는 식의 견강(堅强)이 이루어진다. 새재란 ‘사이재’ 즉 ‘샛 고개’라는 뜻이다. 경상도에서 한양으로 올라올 때에는 이 길이 가장 지름길이므로 생긴 이름이다. 광주 무등산의 ‘무등(無等)’은 향찰(鄕札)식 표기이다. 예전 식으로 읽으면 ‘무돌’이니, ‘무지개를 뿜는 돌’이라는 근사한 뜻이다. 이 산의 옛 이름을 서석산(瑞石山)이라고도 하는데, 이때 서석은 바로 무지개를 뿜는 돌을 달리 말한 것이다. 이것을 한자대로 풀이하려다 보니, 하도 좋아서 등급으로 매길 수 없는 산이라는 그럴듯한 부회(府會)를 낳는다. 모두 입상을 진의하지 못한데서 온 오해들이다.
부드러운 게 강한 걸 이긴다
그러나 이러한 오해의 염려 때문에 입상(立象)을 포기할 수는 없다. 직설적 언어의 나열보다 전달면에서 더욱 훌륭한 효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허균(許筠)의 『한정록(閑情錄)』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다.
상용(商容)은 어느 때 사람인지 모른다. 그가 병으로 눕자 노자가 물었다.
“선생님! 제자에게 남기실 가르침이 없으신지요?”
“고향을 지나거든 수레를 내리 거라. 알겠느냐?”
“고향을 잊지 말라는 말씀이시군요.”
“높은 나무 아래를 지나거든 종종걸음으로 가거라. 알겠느냐?”
“노인을 공경하라는 말씀이시군요.”
그러자 상용이 입을 벌리며 말했다.
“내 혀가 있느냐?”
“있습니다.”
“내 이가 있느냐?”
“없습니다.”
“알겠느냐?”
“강한 것은 없어지고 약한 것은 남는다는 말씀이시군요.”
“천하의 일을 다 말했느니라.”
이렇게 말한 상용은 돌아누웠다.
이것이 입상진의(立象盡意)이다. 여러분은 알겠는가? 상용이 노자에게 준 가르침은 자신의 본바탕을 잊지 말고, 윗사람을 공경하며, 부드러움으로 강한 것을 이기라는 것이니, 사람이 한 평생 살아가며 지녀야 할 마음가짐의 모든 것을 다 말했다고 한 것이다. 언어란 본시 거추장스러운 것이다. 이것을 굳이 억지로 어떻게든 전달하려고 할 것이 아니다. 큰 가르침은 사람마다 일깨워 가르칠 수 없다. 본래 알아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어떻게든 알아듣고, 모를 사람에게는 아무리 친절하게 설명해 준댔자 더 혼란스럽기만 하다.
시를 통해 할 얘기를 남겨두다
허균(許筠)은 또 같은 책에서 이런 일화를 전하고 있다. 손님이 초당(草堂)을 지나다가 문을 두드리며 자연에 묻혀 사는 일에 대해 물었다. 주인은 대답하기 귀찮아 고인(古人)의 시를 가지고 대답하고 만다.
“무엇 때문에 즐겨 숨어 사는가?”
得閒多事外 知足少年中 | 많은 일들 밖에서 한가함을 얻었고 젊은 시절에 만족함을 알았노라. |
“무슨 일을 하면서 하루를 보내는가?”
種花春掃雪 看書夜焚香 | 꽃 심느라 봄날에는 덮인 눈 쓸고 도서(道書)를 읽느라 밤에는 향을 피우네. |
“어찌해야 양생하여 늙음을 마칠 수 있는가?”
硏田無惡歲 酒國有長春 | 글 쓰는 일에는 흉년이 없고 술 나라에는 언제나 봄이라오. |
“어디를 다니면서 무료함을 지우는가?”
有客來相訪 通名是伏羲 | 날 찾아오는 손님이 있어 통성명을 하고 보면 복희씨(농부를 말함)로다. |
옛 사람의 상쾌한 정신의 한 자락을 들여다보게 해주는 이야기다. 『암서유사(庵栖幽事)』란 책에 나온다고 허균(許筠)은 적고 있다.
인용
1. 싱거운 편지
2. 왜 사냐건 웃지요
4. 내 혀가 있느냐?
5. 어부가 도롱이를 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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