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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미학, 언어의 감옥, 입상진의론 - 1. 싱거운 편지 본문

책/한시(漢詩)

한시미학, 언어의 감옥, 입상진의론 - 1. 싱거운 편지

건방진방랑자 2021. 12. 5. 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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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언어의 감옥, 입상진의론(立象盡意論)

 

 

1. 싱거운 편지

 

 

열 두자로 보낸 편지

 

함경도 안변(安邊) 땅에 벼슬 살러 가 있던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이 서울에 있던 백광훈(白光勳)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반가운 마음에 겉봉을 뜯어보니, 딱 열 두 자 한 줄의 사연이 있었다.

 

 

삼천리 밖에서 한 조각구름 사이 밝은 달과 마음으로 친히 지내고 있소.

三千里外, 心親一片雲間明月

 

 

이만한 사연 전하자고 천리 길에 편지를 띄웠더란 말인가. 그러나 음미할수록 새록새록 정감이 넘나는 뭉클한 사연이다. 한 조각구름 속에 밝은 달이라 했으니, 달은 달이로되 구름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달이다. ‘심친(心親)’이라 하여 그밖에 다른 것에는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있음을 보였다. ‘월인천강(月印千江)’이랬거니, 달은 나 있는 안변이나 너 있는 한양이나 가뭇없이 비칠 것이 아니냐. 그래서 널 보듯이 달을 보고, 달 보듯이 너를 생각는다는 사연이다. 그나마도 그 모습은 보일 듯 구름 사이로 숨기 일쑤이니 이 아니 안타까운가. 단지 열 두 자의 편지가 심금을 울린다.

 

노산의 시조에 진달래 피었다는 편지를 받자옵고, 개나리 한창이란 대답을 보내었소. 둘이 다 봄이란 말은 차마 쓰지 못하고라고 한 것이 있지만, 야릇할 손 봉래의 편지여! 삼천리 밖에서 한 조각구름 사이로 얼굴을 빼꼼이 내민 달과 친하다니 말이다. 그리움을, 보고 싶단 말을 이리 말하는 마음. 삼천리 밖에서 보낸 편지치고는 싱거워서 뭉클한 사연이다.

 

 

 

열 두자 편지에 백광훈이 보낸 시

 

一紙書來漢陽春 서울 봄날 한 통의 편지를 받아드니
書中有語只心親 글 속엔 다만 심친(心親)’이란 말 뿐이라.
相思却羨雲間月 그리는 맘, 구름 달을 오히려 불렀구나
分照三千里外人 삼천리 밖 사람에게 나누어 비칠 테니.

 

앞 편지를 받고 쓴 백광훈(白光勳)초춘 득양봉래명부서(初春 得楊蓬萊明府書)라는 시이다. 편지를 손에 들고 그 역시 그리움에 두 눈에 눈물이 글썽글썽했을 그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백광훈의 이별을 말하지 않았지만 이별이 드러난 시

 

백광훈(白光勳)의 시를 다시 한 수 더 감상해 보기로 하자.

 

浮生自苦百年間 뜬 인생 백 년 간을 괴로워하며
說與妻兒各好顔 웃는 얼굴로 식구를 달래었지.
却到金陵城下望 금릉성 아래 와서 올려다보니
白雲猶在九峯山 흰 구름 아직도 구봉산에 걸렸구나.

 

제목은 별가(別家)이다.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으나, ‘부생(浮生, 뜬 구름 같은 인생)’을 탄식하며 자고(自苦, 스스로 괴로워)’한다 했으니, 떠나는 사연이야 짐작할 만하다. 실제로 그는 젊은 날 실의와 곤궁 속에 처가에서 더부살이하는 처지였었다. 이후로도 실의와 좌절은 평생을 두고 따라 다녔지만, 한미한 집안의 선비로 기약 없는 청운(靑雲)의 길을 찾아, 처자식을 처가에 맡겨 두고 길 떠나는 참담함이 1.2구 안에 눈물처럼 배여 있다. 좋은 낯빛으로 떠난다는 말이 그래서 더 안쓰럽다.

 

집을 떠나 재를 건너고 뫼를 넘어, 금릉성 아래까지 와서 참고 참다 집 쪽을 돌아보았다. 산마루가 가로 놓여 있으니 보일 리 없다. 그러나 구봉산엔 흰 구름이 그대로 걸려 있구나. 집을 나설 때 암담하게 막아서던 구봉산. 그때 그 멧부리 위에 걸려 있던 그 구름이 여태도 그곳에 머물러 있다. 1구의 부생(浮生)’4구의 백운(白雲)’이 여기서 다시 만난다. 정처 없이 떠돌아도 좋은 날은 오지 않는데, 저 산마루 위 구름은 공자망(空自忙, 마음이 갈피를 못 잡고 스스로 분주한)’의 부생(浮生)을 비웃기나 하는 듯이, 제가 무슨 바위인양 꿈쩍 않고 있는 것이다. 또 한편, 웃는 얼굴로 헤어졌지만 가슴을 에이는 씁쓸한 느낌, 금릉성을 내려와 구봉산 돌아보니, 올라 올 적 흰 구름이 그대로 걸려 있네. 아직도 가족 생각에 애잔한 내 마음처럼.

 

백광훈(白光勳)은 다정다감한 시인이다. 이런 그이고 보니, 봉래의 앞서의 편지가 있음직도 했겠다. 그의 시를 가만히 읽고 있노라면, 필자는 왠지 그 잔잔한 슬픔에 감염되어 가슴이 뻐근해지는 느낌을 받게 되곤 한다.

 

 

 

 

인용

목차

1. 싱거운 편지

2. 왜 사냐건 웃지요

3. 언덕에 오르려면 뗏목을 버려라

4. 내 혀가 있느냐?

5. 어부가 도롱이를 걸친다

6. 청산 위로 학이 날아간 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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