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언덕에 오르려면 뗏목을 버려라
언어로 전할 수 없는 것
『장자(莊子)』 「천도(天道)」편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제나라 ‘환공’이 누각 위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그 아래서 수레바퀴의 굴대를 끼우던 ‘윤편(輪扁)’이 다짜고짜 계단을 올라와 임금에게 물었다. “전하! 지금 읽고 계신 것이 무엇입니까?” “옛 성인의 책이니라.” “그 분은 지금 살아 계신가요?” “죽었지.” “그렇다면 전하께선 옛 사람의 껍데기를 읽고 계신 거로군요.” 제 환공은 화가 났다. 윤편의 수작이 방자하기 그지 없었던 것이다. “네 이놈! 무엄하구나. 그 말이 무슨 뜻인가. 까닭이 있으면 살려 주려니와, 그렇지 않다면 살려두지 않으리라.” 윤편은 대답한다. “저는 저의 일을 가지고 판단할 뿐입니다. 제가 바퀴를 끼운 것이 지금까지 수십 년입니다. 그런데 굴대가 조금만 느슨해도 금세 빠져 버리고, 조금만 빡빡해도 들어가질 않습니다. 느슨하지도 빡빡하지도 않게 하는 것은 제 마음과 손으로 느껴 깨달을 뿐이지요. 그 이치는 제 아들 녀석에게도 가르쳐 줄 수가 없고, 전하께도 알려 드릴 수가 없습니다. 옛 성인들이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해도, 그가 죽으면서 그 말은 다 없어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전하께서 읽으시는 것은 옛 사람의 껍데기 일 밖에요.”
齊桓公讀書於堂上, 輪扁斲輪於堂下.
釋椎鑿而上, 問桓公曰: “敢問公之所讀者, 何言邪?” 公曰: “聖人之言也.”
曰: “聖人在乎?” 公曰: “已死矣.”
曰: “君之所讀者, 古人之糟魄已夫.”
桓公曰: “寡人讀書, 輪人安得議乎? 有說則可, 無說則死.”
輪扁曰: “臣也, 以臣之事觀之, 斲輪徐則甘而不固, 疾則苦而不入. 不徐不疾, 得之於手, 而應於心, 口不能言. 有數存焉於其間, 臣不能以喩臣之子, 臣之子亦不能受之於臣. 是以行七十而老斲輪. 古之人, 與其不可傳也, 死矣. 然則, 君之所讀者, 古人之糟魄已夫.
윤편이 수레바퀴를 깎는 그 미묘한 기술을 어떻게 언어로 전달할 수 있겠는가. 그것이 가능하다면, 누구나 수레바퀴를 깎는 기술을 익힐 수 있었을 것이다. 언어란 이렇게 불완전하다. 이런 불완전한 도구를 가지고 인간들은 자신들의 의사를 전달하려고 한다. 그러니 그 과정에서 오해가 발생하고, 시비가 생겨난다. 그래서 장자는 이렇게 부연한다. “세상에서 귀하다고 말하는 것은 글이다. 글은 말에 지나지 않는다. 말에는 귀히 여기는 것이 있으니, 말이 귀히 여기는 바는 뜻이다. 뜻에는 따르는 바가 있으니, 뜻이 따르는 바의 것은 말로는 전할 수가 없다.”
언어는 뜻을 온전하게 전달할 수 없다는, 이른바 ‘언불진의(言不盡意)’의 생각은 고대로부터 널리 인식되어 왔다. 『주역(周易)』 「계사상(繫辭上)」12에서는, 공자의 입을 빌어 “글은 말을 다하지 못하고, 말은 뜻을 다하지 못한다[書不盡言, 言不盡意].”고 했다. 위 장자의 말과 그 뜻이 같다. 그러고 보면 옛 성인들이 남긴 글은 그들이 전달하고자 했던 뜻과는 두 단계나 떨어져 있다. 그래서 순찬(荀粲)은 “비록 육경(六經)이 남아 있다고 해도, 진실로 성인의 겨와 쭉정이일 뿐[然則六籍雖存, 固聖人之糠秕]”이라고까지 말하였다. 언어 표현이 갖는 한계를 철저히 인식한 발언이라고 할 수 있다.
스승이 미처 전하지 않은 본질을 떠난 다음에 알아채다
백아(伯牙)의 절현(絶絃)은 지음(知音)이던 종자기(鍾子期)의 죽음 때문이었다. 백아가 물 흐르는 것을 생각하며 연주하면 종자기는 곁에서 “강물이 넘실대는 것 같군.” 했고, 산을 오르는 것을 생각하면 종자기는 또한 그 마음을 그대로 읽었다. 그가 죽자 백아는 거문고 줄을 끊고 평생 다시는 연주하지 않았다.
「수선조(水仙操)」란 시의 서문에는 이 백아가 처음 성련(成連)에게서 거문고를 배울 때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성련에게서 3년을 배운 백아는 연주의 대체를 터득하였으나, 정신을 텅 비게 하고 감정을 전일(專一)하게 하는 경지에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성련은 “내가 더 이상은 가르칠 수 없겠구나. 내 스승 방자춘(方子春)이 동해에 계시다.” 하고는 그를 따라 오게 하였다. 봉래산에 이르러 백아를 남겨두고 “내 장차 내 스승을 모셔 오마.”하고는 배를 타고 떠나가 열흘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백아는 너무도 슬퍼, 목을 빼어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단지 파도소리만 들려올 뿐, 숲은 어두웠고 새 소리는 구슬펐다.
그때 백아는 문득 스승의 큰 뜻을 깨달았다. 그는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며 말하였다. “선생님께서 장차 내게 정을 옮겨 주신 게로구나.”하고는 이에 거문고를 당겨 노래를 불렀다.
마지막,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깨달음은 말로는 가르쳐 줄 수가 없다. 마음으로 깨달아 가슴으로 느껴야 한다. 이른바 심수상응(心手相應)이다. 성련은 마지막 단계에서 백아가 강렬한 바램을 가지고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이게 함으로써, 말로는 도저히 전해줄 수 없었던, 마음을 전일하게 하는 최후의 심법을 전수해 주었던 것이다.
유용했던 것들을 버려야 할 때가 있다
석가가 연꽃을 따서는 제자들에게 들어 보였다. 아무도 그 뜻을 몰라 의아해 할 때 가섭만이 빙그레 웃었다. 그리하여 문자로 세울 수도 없고 가르쳐 전할 수도 없는 부처의 정법안장(正法眼藏) 미묘법문(微妙法門)은 그에게로 이어졌다. 염화시중(拈華示衆)의 미소가 바로 이것이다. 언어란 본시 부질없는 것이기에 큰 진리는 언제나 언어를 초월하여 전해지고, 깨달음은 언어의 벽을 허물어야 한다. 그래서 불가(佛家)에서는 ‘사벌등안(舍筏登岸)’의 법을 말한다. 언덕을 오르려면 뗏목을 버려라. 장자(莊子)는 ‘득어망전(得魚忘筌)’을 말한다. 고기를 얻었으면 통발을 잊어라. 또 ‘득의망언(得意忘言)’, 즉 뜻을 얻었거든 말을 잊으라고 주문한다. “지붕에 올라간 다음에는 누가 쫓아오지 못하게 사다리를 치워야 한다. 유용한 진리는, 언젠가는 버려야 할 연장과 같은 것이다.” 이것은 움베르또 에코(Umberto Eco, 1932~2016)의 말이다.
그래서 도연명(陶淵明)은 「음주(飮酒)」시에서 “이 가운데 참된 뜻이 있으나, 말하려 하니 이미 말을 잊었네[此中有眞意, 欲辨已忘言].”라 하였다.
此中有眞意 欲辨已忘言 | 이 가운데 참된 뜻이 있으나, 말하려 하니 이미 말을 잊었네. |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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