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것과 시로 표현하는 것과의 차이를 한시에 담다
手持一卷蘂珠篇 | 손에 한 권 『예주편』을 잡고 |
讀罷空壇伴鶴眠 | 다 읽고 빈 단에서 학을 벗해 잠들었다가 |
驚起中宵滿身影 | 한 밤 중에 몸에 가득한 그림자에 놀라서 깨니, |
冷霞飛盡月流天 | 찬 구름은 흩어진 채 달빛만 흐르네. |
『소화시평』 권상 108번의 마지막 시는 정말 꿈결 같은, 그림 같은, 아니면 매우 몽환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시다. 시 제목만으로도 뭔가 그럴 듯한 게 있어 보인다. 제목이 ‘세 가지로 뻗은 소나무에 걸린 달’이기 때문이다. 보통 이런 제목의 시라면 왠지 소나무와 달에 대해 이야기를 할 것만 같은데 이 시에선 전혀 그러질 않는다.
정황은 이렇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아마도 그 밤은 날던 학도 고이 쉬던 밤이었으리라. 그러다 문득 무언가가 내 곁에 있다는 쌔한 느낌이 들어 잠에서 깼다. 우리는 보통 가위눌릴 때 이런 쌔한 느낌을 진하게 받긴 한다. 그래서 보니 내 몸까지 소나무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는 것이다. 그제야 다시 바깥을 살펴보니 잠들기 전까지 있었던 무수한 구름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환한 달만이 두둥실 세 가지 소나무에 걸려 있는 거였다.
정황은 이렇게 이걸 시로 포착하여 서술하는 방식은 전혀 남다르다. ‘학을 벗해 잠들었다[伴鶴眠]’는 표현이나 ‘한밤중에 몸에 가득한 소나무 그림자에 놀라서 깼다[驚起中宵滿身影]’는 표현이나 ‘찬 구름 흩어진 채 달빛만 흐르네[冷霞飛盡月流天]’라는 표현이 그렇다. 시로 표현할 땐 뉘앙스를 더욱 살리기 위해 마치 자신이 소나무 그림자에 놀라 깬 것처럼 표현하는 것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서 교수님은 4구와 3구 또한 인과관계로 읽을 수 있다고 말해줬다. 즉 3구가 원인이 되었기 때문에 4구와 같은 현실이 빚어질 수 있었다는 얘기다. 구름 한 점 없어 달만 휘영청 뜬 밤이기 때문에 소나무 그림자가 매우 짙게 드리워질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교수님과 한시를 같이 있다 보면 관습적인 해석에서 많이 벗어나게 된다. 소화시평을 배우기 전엔 습관적으로 토를 ‘~하며 ~니라’라는 식으로 2구씩 끊어서 해석했고 그 구절 사이에 관계는 생각해보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교수님은 어느 구절이든 그냥 쓰여진 구절은 없기 때문에 각 구절이 어떤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지 봐야 한다고 누누이 말해준다. 거기에 덧붙여 꼭 두 구 단위로 끊을 필요는 없다는 말도 해줬다. 시에 따라 어떤 시는 4구까지도 하나의 흐름으로 가지고 가야 해석이 더욱 분명해지는 시도 있기 때문이다. 결국 한시라는 건 ‘이 사람이 왜 이런 시를 지었나?’하는 데서부터 고민하며 해석해 나가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럴 때 의미가 더욱 분명하게 파악되고 해석도 훨씬 매끄러워진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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