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제 목소리를 담아 문집을 지은 낙서야
이씨의 아들 낙서洛瑞가 나이 열 여섯인데, 나를 좇아 배운 지 여러 해이다. 심령이 맑게 열려 지혜가 구슬 같다. 한 번은 자신의 『녹천고綠天稿』를 가지고 와 내게 물었다. “아! 제가 글 지은 것이 겨우 몇 해이지만 남의 노여움을 산 적이 많습니다. 한마디 말만 새롭고 한 글자만 이상해도 문득 ‘옛날에도 이런 것이 있었느냐?’ 하고 묻습니다. 아니라고 하면 낯빛을 발끈하며 ‘어찌 감히 이 따위를 하는 게야?’ 합니다. 아아! 옛날에도 있었다면 제가 무엇 하러 다시 합니까? 원컨대 선생님께서 말씀해주십시오.” 내가 두 손을 이마에 얹고 무릎 꿇고 세 번 절하며 말하였다. “네 말이 참으로 옳다. 끊어진 학문을 일으킬 수 있겠구나. 창힐蒼頡이 처음 글자를 만들 때 어떤 옛날을 모방했던가? 안연顔淵은 배우기를 좋아했지만 유독 저서를 남기지 않았다. 진실로 옛것을 좋아하는 자로 하여금 창힐이 글자 만들 때를 생각하면서 안자顔子가 미처 펴지 못했던 뜻을 짓게 한다면 글이 비로소 바르게 될 것이다. 네 나이 아직 어리니, 남이 성냄을 당하거든 공경하며 사과하여 ‘배움이 넓지 못해 미처 옛것을 살피지 못했습니다’라고 하거라. 그런데도 힐문하기를 그치지 않고 성냄을 풀지 않거든 조심스레 이렇게 대답하여라. ‘『서경書經』의 「은고殷誥」와 「주아周雅」는 삼대三代 적의 당시 글이고, 이사李斯와 왕희지王羲之도 진秦나라와 진晋나라의 시속 글씨였습니다’라고 말이다. 李氏子洛瑞, 年十六, 從不侫學, 有年矣. 心靈夙開, 慧識如珠. 嘗携其綠天之稿, 質于不侫曰: “嗟乎! 余之爲文, 纔數歲矣, 其犯人之怒多矣. 片言稍新, 隻字涉奇, 則輒問古有是否, 否則怫然于色曰: ‘安敢乃爾?’ 噫! 於古有之, 我何更爲? 願夫子有以定之也.” 不侫攢手加額, 三拜以跪曰: “此言甚正. 可興絶學. 蒼頡造字, 倣於何古, 顔淵好學, 獨無著書, 苟使好古者, 思蒼頡造字之時, 著顔子未發之旨, 文始正矣. 吾子年少, 耳逢人之怒, 敬而謝之曰: ‘不能博學, 未攷於古矣.’ 問猶不止, 怒猶未解, 嘵嘵然答曰: ‘殷誥周雅, 三代之時文, 丞相右軍, 秦晋之俗筆.’” |
낙서洛瑞 이서구李書九는 16세의 소년 문사이다. 그가 자신이 쓴 글을 모아 『녹천관집綠天館集』이라 하고는 연암에게 들고 왔다. “선생님! 사람들은 참 이상합니다. 제가 한 마디만 새로운 말을 하거나 못 듣던 이야기를 하면, 자꾸 화를 내니 말입니다. 조금만 낯설면 그들은 제게 이렇게 말을 하지요. ‘옛날에 이런 게 있었니?’ ‘없었는데요.’하면 얼굴이 시뻘개져서는 ‘어찌 감히 이 따위 짓을 하는 게야?’ 합니다. 아아, 선생님! 참으로 답답합니다. 옛날에도 있었다면 제가 무엇 하러 또 한답니까? 말씀 좀 해 주십시오. 선생님!”
“옛날에도 있었다면 제가 무엇 하러 다시 합니까?” 당돌한 제자가 이렇게 물어오자, 연암은 자못 과장스런 제스처를 보이며 이를 부추긴다. “네 말이 참 옳구나. 예전 창힐蒼頡은 천지만물을 관찰하여 그 결과를 글자로 만들었다. 창힐이 이전에는 글자가 없었으니, 그렇다면 창힐이가 만든 글자는 어떤 옛날을 본받았더란 말이냐? 그럴진대 창힐이 글자 만든 일도 ‘어찌 감히 이 따위 짓’이라고 할 수 있을까? 반면에 안연顔淵은 그렇게도 학문을 좋아했건만, 단 한권의 저서도 남긴 것이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를 성인聖人에 버금간다고 높이는 것은 왜일까? 안연의 학문은 문자로 고정되지 않았기에 여태도 살아 있다. 그것은 아직도 확정되지 않은 열려진 텍스트이다. 제자야! 내 말을 잘 들어라. 네가 창힐이 글자를 만들던 관찰의 정신으로, 안연이 미처 글로 펴지 못했던 생각을 담아낼 수 있다면, 네 글이 비로소 바르게 설 것이니라.”
여기서 연암이 말하고 있는, 안연이 미처 글로 펴내지 못했던 생각이란 무얼까? 그것은 바로 변치 않는 알맹이, 즉 성인聖人의 가르침이요 정신이다. 창힐이 글자를 만들 때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것은 이전에는 있지 않았던 전혀 새로운 형식을 뜻한다. 그러기에 창힐이 글자 만들던 때를 생각하면서 안연이 미처 펴지 못했던 뜻을 지으라는 말은 옛 사람의 썩지 않을 정신을 너 자신의 형식에 담아내는 심동모이心同貌異의 심사心似를 추구하라는 말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연암은 한편으로 부추기며 다른 한편으로 제자를 어른다. “얘야! 네 나이 아직 어리니, 사람들이 성을 내거든 공부가 부족해 그렇다고 공손히 사과하거라. 그래도 상대방이 노여움을 풀지 않거든 이렇게 대답하렴. ‘지금 볼 때는 난해하기 짝이 없는 『서경書經』의 「은고殷誥」와 「주아周雅」도 삼대三代 적 당시에는 일반 백성들이 알아듣던 보통 글에 지나지 않았고, 이사李斯의 전서篆書나 왕희지王羲之의 초서草書도 다 그때에는 시속時俗 글씨에 지나지 않았었지요’라고 말이다.”
오늘날 서예를 배우는 사람들은 왕희지의 「난정서蘭亭序」와 「집자성교서集字聖敎序」를 금과옥조로 떠받든다. 이것을 모르고는 행서를 말할 수가 없다. 그뿐인가. 십칠첩十七帖과 상란첩喪亂帖을 곁에 끼고서 초서草書의 교범으로 삼는다. 왕희지 이전에는 전서와 예서 뿐이었다. 당시에 그것은 시쳇말로 젊은 애들 사이에 유행하던 글씨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치는 분명하지 않은가? 진정한 고전은 옛날에 있지 않고 바로 지금에 있다. 우리가 옛것을 흠모하여 그것을 따르고 흉내 낼수록 우리는 옛것에서 멀어진다. 중요한 것은 정신이다.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정신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변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것을 담는 그릇인 형식은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새 술을 헌 부대에 담으려 들지 말아라. 헌 부대는 새 술의 신선한 맛을 묵은 술처럼 만들고 말 것이다. 제 목소리를 찾아라. 그 안에 시간이 흘러도 썩지 않을 정신의 빛을 깃들여라.
▲ 전문
▲한자의 역사는 직선화, 간략화되는 방향으로 진행됐다. 그럼에도 뜻이 통하는 건 정신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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