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천지 사이에 있는 게 책의 고갱이
정밀하고 부지런히 글을 읽은 이로 포희씨包犧氏만 한 사람이 있겠습니까? 글의 정신과 뜻이 천지사방에 펼쳐 있고 만물에 두루 있으니, 천지사방과 만물은 글자로 쓰지 않은 글자이며, 문장으로 적지 않은 문장일 거외다. 후세에 글을 부지런히 읽기로 호가 난 사람들은 기껏 거친 마음과 얕은 식견으로 말라붙은 먹과 문드러진 종이 사이를 흐리멍덩한 눈으로 보면서 하찮은 글귀나 주워 모은 데 불과하외다. 이는 이른바 술지게미를 먹고서 취해 죽겠다고 하는 격이니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讀書精勤, 孰與庖犧? 其神精意態, 佈羅六合, 散在萬物, 是特不字不書之文耳. 後世號勤讀書者, 以麁心淺識. 蒿目於枯墨爛楮之間, 討掇其蟫溺鼠渤. 是所謂哺糟醨而醉欲死. 豈不哀哉! |
이 단락의 취지는 앞에서 살펴본 「소완정 기문素玩亭記」에서 나온 내용과 상통한다. 기억을 환기하기 위해 「소완정 기문素玩亭記」의 내용을 아래에 조금 인용해본다.
천지 사이에 있는 게 죄다 책의 정精이라네. 이는 방 안에 틀어박혀 들입다 책만 본다고 해서 찾을 수 있는 게 아닐세. 그래서 포희씨包犧氏가 문文을 살핀 것을 두고, ‘우러러 하늘을 살피고 굽어봐 땅을 살폈다’라고 했는데, 공자孔子는 이러한 포희씨의 천지天地 읽기를 거룩하게 여겨 「계사전繫辭傳」이라는 글에서 ‘가만히 집에 있을 때는 괘사卦辭와 효사爻辭를 음미한다’라고 말했거늘, 무릇 ‘음미한다’라는 것이 어찌 눈으로 봐서 살피는 것이겠나? 입으로 맛봐야 그 맛을 알 수 있고, 귀로 들어야 그 소리를 알 수 있으며, 마음으로 이해해야 그 정수精髓를 알 수 있는 법일세.
夫散在天地之間者, 皆此書之精. 則固非逼礙之觀, 而所可求之於一室之中也. 故包犧氏之觀文也, 曰: ‘仰而觀乎天, 俯而察乎地.’ 孔子大其觀文而係之曰: ‘㞐則玩其辭.’ 夫玩者, 豈目視而審之哉? 口以味之, 則得其旨矣; 耳而聽之, 則得其音矣; 心以會之, 則得其精矣.
이 인용문 중 “천지 사이에 있는 게 죄다 책의 정精이라네(夫散在天地之間者, 皆此書之精)”라는 말은 이 단락에 보이는 “글의 정신과 뜻이 천지사방에 펼쳐 있고 만물에 두루 있으니(其神精意態, 佈羅六合, 散在萬物)”라는 말과 완전히 같은 말이다. ‘책’이라는 단어와 ‘글’이라는 단어는 서로 바꿔 써도 무방하다. 원문은 둘 다 똑같이 ‘서書’다. 이 ‘서’라는 한자는 ‘책’이라고 번역해도 좋고 ‘글’이라고 번역해도 좋다.
2. 맹목적인 독서로 헛 똑똑이가 되다
이 편지글은 그 서두가 퍽 도발적이다. 다짜고짜 “정밀하고 부지런히 글을 읽은 이로 포희씨包犧氏만 한 사람이 있겠습니까?(讀書精勤, 孰與庖犧?)”라고 묻는 말로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인즉슨 포희씨만큼 글을 잘 읽은 사람은 없다는 건데,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일까?
연암의 생각을 따라가면 이렇다. 포희씨는 우주의 삼라만상을 세밀히 관찰하여 그 근본 원리를 8괘라는 기호에 집약해냈다. 포희씨가 삼라만상을 관찰한 행위는 바로 글(혹은 책)을 읽은 것에 다름 아니다. 왜냐면 글의 에센스, 즉 글의 정수精髓(이 단락에서 말하고 있는 글의 ‘정신’이란 바로 이런 뜻이다)는 바로 사물과 세상 속에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삼라만상을 잘 관찰하여 그 정수를 포착해 8괘를 만들어낸 포희씨는 정말 글을 잘 읽은 사람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는 사물이라는 글을 잘 읽어 8괘라는 지극히 오묘하고 창조적인 글을 지어낸 셈이다.
그런데 후세의 사람들, 오늘날의 사람들은 어떠한가? 포희씨와는 달리 남이 써 놓은 글 속에 갇혀 그 글귀나 외고 있을 뿐이다. 남의 글을 열심히 읽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그렇기는 하나 글 밖에 있는 진실, 글과 사물, 글과 세상의 연관성을 따져보는 상상력과 감수성이 작동되지 않는 한 그런 글 읽기는 맹목적이거나 피상적인 것일 수밖에 없을 터이다. 연암은 바로 이런 글 읽기에 대해 통렬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이런 글 읽기는 피상적인 인간, 뭐든지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실제로는 무식한 인간을 만들어내게 마련이다.
연암은 이런 인간을 고작 술지게미를 먹고서 술에 취해 죽겠다고 야단인 그런 인간(哺糟醨而醉欲死)에 비유하고 있다. 술지게미란 막걸리 같은 곡주를 만들 때 술을 짠 뒤에 남은 찌꺼기를 말한다. 약간의 알코올 기운이 들어 있긴 하나 술과는 다르다. 술이 정수精髓라면 지게미는 찌꺼기에 불과하다. 이걸 먹고 술맛을 안다고 한다면, 웃기는 일이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떤 책의 정수를 음미하지 못한 채 그 찌꺼기만 맛보고서 그 책에 대해 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착각도 보통 착각이 아니다. 이런 인간은 대개 나부댄다. 그리고 세상은 이런 나부대는 인간이 지배한다. 책의 정수, 사물의 정수를 알고 있는 인간은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걸까? 그런 인간은 대개 숨어 있어 보통 사람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을뿐더러, 간혹 눈에 띈다 하더라도 말수가 적거나 아예 말이 없다. 슬픈 일이다.
3. 새를 글자 속에 가두다
저 하늘을 날아가며 우는 새는 얼마나 생기가 있습니까? 그렇건만 적막하게도 새 ‘조鳥’자 한 글자로 그것을 말살하여 새의 고운 빛깔을 없애버리고 그 울음소리마저 지워 버리지요. 이는 마을 모임에 가는 촌 늙은이의 지팡이 머리에 새겨진 새 모양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새 ‘조鳥’자의 진부함이 싫어 산뜻한 느낌을 내고자 새 ‘조鳥’자 대신에 새 ‘금禽’자를 쓰기도 하지만, 이는 책만 읽고서 문장을 짓는 자들의 잘못이라 할 거외다. 彼空裡飛鳴, 何等生意? 而寂寞以一‘鳥’字, 抹摋沒郤彩色, 遺落容聲. 奚异乎赴社邨翁杖頭之物耶? 或復嫌其道常, 思變輕淸, 換箇禽字, 此讀書作文者之過也. |
연암은 시선을 갑자기 하늘로 돌리고 있다. 그리하여 앞 단락에서 언급한 천지 사방 혹은 만물의 한 예로서 ‘새’를 들면서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다.
‘새’라는 것은 하나의 글자이다. 우리는 ‘새’라는 이 글자를 어떻게 읽는가? 그냥 ‘새’로 읽을 뿐이다. 이 경우 ‘새’는 형해화形骸化 된다. 그리하여 ‘새’가 가진 구체성과 저 발랄한 개체성, 그 생명의 율동이 모두 소거掃去 되어 버린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있는 사물로서의 새가 지닌 자태라든가 빛깔이라든가 울음소리,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동작들을 얼른 떠올릴 수 없다. 연암은 이런 ‘새’는 죽은 새이고 형해화된 새인바, 그건 비유컨대 촌 늙은이의 지팡이 머리에 새겨놓은 새 모양과 다르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새’라는 말을 다른 말로 슬쩍 바꾸면 어떨까? 이를테면 ‘새’라는 말 대신에 ‘날짐승’이라는 말을 쓰면 어떨까? 그런 잔꾀를 쓴다고 상황이 달라지는 건 아니다. 그럼 어찌해야 하는가? 그래서 글은 다음 단락으로 넘어간다.
이 단락에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점은, 맨 마지막 구절, 즉 “이는 책만 읽고서 문장을 짓는 자들의 잘못이라 할 거외다(此讀書作文者之過也)”를 통해 글 읽기의 문제를 글쓰기의 문제와 연결시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라는 독서의 문제가 어떻게 글을 써야 하는가라는 창작의 문제와 직결된다는 점을 환기시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점, 놓쳐서는 안 된다.
4. 사물을 잘 관찰하는 것이 훌륭한 독서
다시 문세를 전환해 연암 스스로의 경험을 말하고 있다. 어떻게 글을 읽어야 하는가? 어떤 독서가 참된 독서인가? 이 단락은 이 물음에 대해 답하고 있다.
연암의 답인즉슨, ‘사물’을 읽으라는 것이다. 사물 고유의 자태, 낱낱의 사물이 보여주는 개성과 살아 있는 몸짓을 읽으라는 것이다. 요컨대 형해화된 문자나 글 속에 갇히지 말고 그 밖으로 나가 사물 및 세계와 만남으로써 형해화된 문자를 되살려 내라는 것이다. 연암은 사물에 대한 관찰, 즉 사물에 대한 읽기를 통해 사물이 지닌 구체성, 그 생동하는 자태를 문자와 글 속으로 다시 끌고 들어옴으로써 그것이 가능해진다고 보았다.
이것은 결국 상상력과 감수성의 해방으로 연결된다. 요컨대 연암은 남의 글에서 상상력을 배우려 들지 말고, 사물과 직접 대면함으로써 상상력과 감수성을 쇄신하라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이 점에서 글 읽기에 대해 말하고 있는 이 글은 궁극적으로는 글쓰기의 문제를 염두에 두고 있다고 할 만하다. 사물을 잘 관찰하는 것이 훌륭한 독서이고, 훌륭한 독서가 되어야 창조적인 글쓰기가 가능해짐으로써다.
- 문장文章: 아름다운 문채文彩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갖가지 아름다운 문채를 문장이라고 한다면”이라는 말은 그런 맥락에서 한 말이다. [본문으로]
5. 총평
1
이 글은 표면적으로는 글읽기에 대해 말하고 있으나 기실 글쓰기의 문제를 밑바닥에 깔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2
이 글은 문자와 사물의 관계에 대해 연암이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문자를 그냥 문자로만 알아서는 안 되고, 문자에 생기와 온기 및 사물의 다채로운 뉘앙스를 채워 넣을 수 있어야 비로소 문자를 제대로 아는 것이라는 관점은 『과정록』에 나오는 다음의 일화에서도 확인된다.
아버지는 이공(이광려)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대는 평생 독서했는데 아는 글자가 몇 자나 되지요?”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깜짝 놀라며 마음속으로 아버지를 비웃었다.
‘이공이 글을 잘하고 박식한 선비라는 걸 누가 모른단 말야!’
이공은 한참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겨우 서른 자 남짓 아는 것 같군요.”
좌중의 사람들이 또 한 번 깜짝 놀랐지만, 그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지 못했다.
이공은 이 한마디 말로 단박에 아버지와 지기知己가 되어 이후 자주 찾아왔다. 그리고 새로 지은 시문詩文이 있으면 반드시 소매에 넣어 가지고 와서 아버지의 평을 청하였다. -1권 41번
先君問之曰: “君平生讀書, 識得幾個字?” 座客皆大駭, 心笑之曰: “孰不知李公文章博洽士也?” 李公點檢良久語曰: “僅識得三十餘字.” 座客又大駭, 不知其何謂也. 自是李公定爲一言知己, 頻頻來訪, 有新成詩文, 必袖以請評.
3
연암이 강조하는 이런 방식의 글읽기는 ‘자아’의 측면에서 본다면 ‘주체성’의 강조로 연결된다는 점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연암의 경우 이런 의미에서의 주체성은 ‘개아個我’와 ‘국가’의 양 차원에서 모두 문제적이다.
4
이 글은 짧은 편지글임에도 대단히 문예성이 높다. 그 언어는 형상적이고, 생기발랄하며, 경쾌하다. 경쾌하면 경박하기 쉬운데, 이 글은 경박하지 않고 아주 진지하다.
5
김택영은 이 글에 대해 이런 평을 남겼다.
“절묘하여 흡사 소동파의 글 같다.”
인용
지도 / 목차 / 작가 / 비슷한 것은 가짜다
'책 > 한문(漢文)'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희병 - 연암을 읽는다 목차 (0) | 2020.04.18 |
---|---|
연암을 읽는다 - 22. 경지에게 보낸 답장 세 번째 (0) | 2020.03.30 |
연암을 읽는다 - 20. 경지에게 보낸 답장 첫 번째 (0) | 2020.03.30 |
연암을 읽는다 - 19. 『말똥구슬』 서문 (0) | 2020.03.30 |
연암을 읽는다 - 18. 『공작관 글 모음』 자서 (0) | 2020.03.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