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경지의 『사기』 읽는 방식을 비판하다
아마 경지가 지난번에 연암에게 보낸 편지 내용 중에 “「항우본기」를 읽을 땐 제후들의 군대가 자신의 보루에서 초나라 군대의 전투를 구경하던 광경을 떠올려 보아야 하고, 「자객열전」을 읽을 땐 고점리가 축을 타던 장면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라는 말이 들어 있었던 모양이다. 이 두 장면은 그 핍진한 서사敍事로 인해 사마천의 귀신같은 필치가 잘 드러난다고 예로부터 칭송되어 왔다.
사실 『사기』를 읽을 때 단순히 그 줄거리에 정신이 팔리거나 흥미로운 일화에 매료되는 독자도 없지 않다. 경지의 말은, 상상력을 발휘하여 『사기』의 내용을 추체험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니, 이런 종류의 독자보다는 그 수준이 훨씬 높다고 할 수 있다. 경지도 자기 딴에는 그럴 듯한 말을 하노라고 이런 말을 한 건지 모른다. 하지만 연암은 경지의 이 말이 늙은 서생의 진부한 말에 불과하다고 타박을 주고 있다. 『사기』를 그런 식으로 읽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고, 그리 높은 경지도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읽어야 높은 경지가 될까?
- 태사공太史公: 사마천을 말한다. [본문으로]
- 제후들의 군대가 자신의 보루에서 초나라 군대의 전투를 구경하던 광경: 「항우본기項羽本紀」에 나오는 다음 이야기를 말한다. “진秦나라 말기에 항우는 작은 아버지 항량項梁과 함께 봉기하여 초나라 군대를 이끌고 각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항우가 거록鉅鹿이라는 곳에서 진나라 군대와 싸울 때 여러 제후국의 군대들은 항우의 위엄에 놀란 나머지 보루에서 전투를 관전만 했을 뿐 감히 참전하지 못했다.” [본문으로]
- 고점리高漸離가 축筑을 타던 장면: 「자격열전刺客列傳」에 나오는 다음 이야기를 말한다. “위魏나라의 자객이었던 형가荊軻는 연燕나라 태자 단丹의 부탁을 받고 진시황을 암살하기 위해 역수易水라는 강가에서 장도에 오르는데, 이때 그의 벗인 고점리가 축이라는 악리를 타며 이별의 슬픔을 연주하자 형기는 ”바람소리 쓸쓸한데 역수가 차갑구나. 장사壯士는 한 번 가면 다시 오지 못하리“라는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랫소리가 얼마나 비장했던지 태자 단을 비롯해 형가를 전송하기 위해 나온 사람들의 머리카락이 모두 빳빳이 섰다고 한다. 형가는 노래가 끝나자 표표히 진나라를 향해 떠나갔다. 이 대목은 장도에 오르는 자객 형가의 비장한 모습을 잘 그려 놓았으며 사마천 글쓰기의 특징을 약여하게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해서 전통 시대의 문인들로부터 늘 칭송받아 왔다.” [본문으로]
- 부엌에서 숟가락 줍는 것: 크게 어렵지도 의미 있지도 않은 일을 해 놓고선 자랑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본문으로]
2. 작가는 고심 때문에 글을 쓸 수밖에 없다
이 단락의 첫 문장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경지의 『사기』 읽는 방식은 그 글만 읽는 것이요, 작가의 ‘마음’을 읽는 것은 못 된다는 것이다. 요컨대 글의 거죽만 읽었지 글 쓴 사람의 마음자리를 읽지 못했다는 말이다.
전통적인 어법으로는 글쓴이의 마음자리를 특히 ‘고심苦心’이라고 한다. 고심이라는 말은, 작가의 고민이라든가 현실에 대한 입장, 삶과 세계에 대한 감정을 두루 포괄하는 말이다. 요컨대, 그것은 삶과 세계에 대한 작가의 근원적이거나 실존적인 태도와 관련되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작가의 글쓰기가 이루어지는 원점 혹은 어떤 최저 지점을 뜻한다.
작가는 바로 이 고심 때문에 글을 쓸 수밖에 없다. 그것은 사회적 의제議題나 이념과 관련된 것일 수도 있고, 개인적 상처와 관련된 것일 수도 있다. 연암은 사마천이 쓴 글의 거죽을 더듬는 게 능사가 아니요, 그 글에 내재되어 있는, 혹은 그 글의 가장 깊은 밑바닥에 깃들여 있는 사마천의 고심을 읽어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참고로 말해, 연암은 「본래의 선비原士」라는 글에서 ‘고심’과 관련해 이런 말을 하고 있다.
성인聖人의 글을 읽어도 성인이 고심한 바가 과연 무엇인지를 느껴 아는 자는 드물다. 주자朱子는 이렇게 말했다.
“중니는 지극히 공변되고 진심으로 정성을 다한 분이 아니겠으며, 맹자는 세차게 주먹을 휘두르고 크게 발길질한 분이 아니겠는가?”
주자와 같은 분이야말로 성인의 고심을 이해했다 할 만하다.
夫讀聖人之書, 能得其苦心者鮮矣.
朱子曰: “仲尼豈不是至公血誠, 孟子豈不是麁拳大踢.” 如朱子, 可謂得聖人之苦心矣.
3. 『사기』를 쓸 때 사마천의 마음과 나비를 놓친 아이의 마음
어린아이가 나비를 잡는 광경을 보면 사마천의 마음을 알 수 있사외다. 앞다리는 반쯤 꿇고 뒷다리는 비스듬히 발꿈치를 들고서는 손가락을 ‘丫아’자 모양으로 하여 살금살금 다가가 잡을까 말까 주저하는 순간, 나비는 그만 싹 날아가 버리외다. 사방을 돌아봐도 아무도 없자 씩 웃고 나서 부끄럽기도 하고 분이 나가도 하나니, 이것이 바로 사마천이 『사기』를 쓸 때의 마음이외다. 見小兒捕蝶, 可以得馬遷之心矣. 前股半跽, 後脚斜翹, 丫指以前, 手猶然疑, 蝶則去矣. 四顧無人, 哦然而笑, 將羞將怒, 此馬遷著書時也. |
갑자기 문의文意가 바뀌어 나비 잡는 어린아이 이야기가 나온다. 이 이야기는 나비를 잡으러 살금살금 다가갔다가 막판에 놓쳐버린 아이의 복잡한 심리를 잘 묘파해내고 있다. 생각해보면 정말 그랬다. 어린 시절 나비나 잠자리를 잡기 위해 얼마나 그런 포즈를 취했던가. 숨까지 멈춘 채 집게처럼 벌렸던 두 손가락을 딱 합칠라 치면 어떻게 낌새를 알아채고 나비는 싹 날아가 버리지 않던가.
그때의 마음이라니! 왠지 맥이 탁 풀리고, 이상하게도 자책감 같은 게 엄습하기도 했다. 이 이야기는 어린 시절의 그런 경험을 떠올리게 한다. 짧은 문장 속에 이처럼 절묘하게 서술해놓고 있음을 보면 연암도 나처럼, 그리고 누구나처럼, 어린 시절 이런 경험을 했던 게 분명하다.
그건 그렇고, 이 단락에 제시된 나비 잡는 어린아이의 이 비유는 대체 무엇을 말함인가? 우선 이 단락이 ‘마음 읽기’의 중요성에 대해 말해 놓고 있는 1단락의 첫 문장과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이 비유는 사마천의 마음, 사마천의 고심이 어떠한가를 말하기 위한 것이다. 이와 관련해 나비를 놓친 아이의 마음을 형용하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부끄럽기도 하고 분이 나기도 하나니(將羞將怒)”가 그것이다. 부끄럽다는 것은 수치심을 말한다. 분이 난다는 것은 분만憤懣을 말한다. ‘분만’이라는 말은 지금은 어려운 말이 되어 버렸지만 예전에는 많이 쓰던 말이다. 그것은 분이 쌓여 가슴이 답답한 상태를 이르는 말이다. 요컨대 수치심과 분만감憤懣感이 사마천의 고심을 이룬다 할 터이다.
연암은 이 두 가지가 『사기』라는 저술의 가장 밑바닥에 놓여 있는 마음이라고 본 셈이다. 요컨대, 사마천이 실존적으로 이런 마음 때문에 『사기』를 저술했다고 본 것이며, 세상을 바라보는 사마천의 눈, 그리고 인간이 만들어 온 저 장구한 역사라는 파노라마를 읽는 사마천의 눈에는 이런 마음이 자리하고 있다고 본 것이다.
4. 수치심과 분만감으로 쓴 『사기』
『사기』라는 저술의 심연에는 어찌해서 수치심과 분만감이 깃들여 있는 것일까?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선 사마천의 생애를 간단하게라도 살펴두지 않으면 안 된다.
사마천 시대의 군주인 무제武帝는 영토 확장에 혈안이 된 전제군주였다. 그는 하루가 멀다 하고 정복 전쟁을 벌였다. 베트남을 침공하고 한반도를 침략했다. 그리고 흉노와 줄창 싸웠다. 당시 이릉李陵이라는 20대의 용맹한 장수가 있었다. 그는 흉노와 싸워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지막 전투에서 불행히 흉노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혼신의 힘을 다해 싸웠으나 부하들이 전멸해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무제는 이릉이 자결하지 않고 포로가 되었다고 해서 그의 구족九族을 멸해 버렸다.
사마천은 당시 궁정의 역사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아버지 사마담司馬談으로부터 이 직책을 물려받았다. 사마천은 이릉과 아는 사이가 아니었지만 무제의 이런 조처가 부당하다고 생각하여 무제에게 자신의 생각을 아뢰었다.
무제는 격분했고 사마천은 그날로 투옥되어 궁형에 처해졌다. 궁형이란 거세去勢, 즉 남자의 생식기를 제거하는 잔인한 형벌이다. 하지만 정해진 보석금을 내면 감옥에서 풀려날 수 있는 길이 없지 않았다. 그래서 사마천은 평소 알던 친구들에게 좀 도와 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사마천은 이때 세상에 대한 통절한 경험을 했고, 이 경험은 『사기』의 글쓰기에 여러 가지 방식으로 투사되어 있다.
『사기』가 목숨을 아끼지 않고 남을 돕는 협객적 인간을 더없이 훌륭한 인간으로 찬미하고 있음도 이와 관련된다. 사마천은, 궁형을 당하는 건 남자로서 너무나 수치스런 일이니 처음엔 자결을 하려고 생각했다. 하지만 며칠 밤을 꼬박 세우며 고민한 결과 아버지가 쓰다 만 『사기』를 완성하기 위해 죽어서는 안 된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그는 결국 궁형을 받았고, 석방되어 『사기』를 완성하였다.
바로 이런 개인적 배경 때문에 『사기』의 가장 깊숙한 밑바닥에는 수치심과 분만감이 깃들일 수밖에 없었다.
사마천 글쓰기의 원점을 이룬다고 할 이런 마음을 나비 잡다 놓친 아이의 마음에 비유하고 있는 연암의 발상은 기발하고도 날렵하다. 연암이 지닌 비범한 감수성의 일단을 보여준다고 할 만하다. 요컨대 연암은 이 단락에서, 『사기』를 읽을 때 그 글 속에 알게 모르게, 혹은 미묘하고 은밀하게, 투사되어 있는 사마천의 마음을 읽어내는 일, 그리하여 그런 마음과 교감을 나누는 일이야말로 『사기』 독서의 가장 높은 경지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5. 높은 수준의 글을 쓰도록 만드는 결락감
연암은 10대 때부터 『사기』에 매료되었다. 연암 문장의 드높은 기세는 『사기』가 보여주는 기운찬 문장과 상통하는 점이 많다. 연암과 사마천은 그 문장만 상통하는 것이 아니라, 글쓰기의 심리적 기저에 있어서도 상통하는 점이 없지 않다.
앞서 말했듯 사마천 글쓰기의 기저부에는 자욱한 분만감이 깔려 있는데, 연암 글쓰기의 밑바닥에도 이 비슷한 감정이 자리하고 있다. 연암은 자신의 글쓰기를 ‘유희遊戲’라고 표현한 적이 있는데, 이는 분만감의 표현에 다름 아니다. 뜻을 얻지 못한 채 소외되어 있던 연암으로서는 울분을 품을 수밖에 없었으며 이런 감정으로 인해 그의 글은 더욱 파격적이고 불온하게 되어 갔다. 사마천과 연암은 둘 다 ‘결락감缺落感’을 지녔다는 점에서 또 다른 공통점을 갖는다.
‘결락감’이란 무엇을 말함인가?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 뭔가 결여되어 있다는 느낌, 뭔가 박탈되어 있다는 느낌, 뭔가가 없다는 느낌, 이런 걸 결락감이라 한다. 작가는 결락감이 있을 때 창조력을 발휘할 수 있다. 안락하고 편안하기만 해서는 진정한, 그리고 높은 수준의 글이 나오기 어렵다. 이점에서 결락감의 반대편에 있는 감정은 ‘포만감’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궁형을 당한 사마천은 어떤 의미에서 지독한 결락감을 안고 글을 썼을 터이다. 사마천이 『사기』를 쓴 것을 두고 전통적으로는 ‘발분저서發憤著書’라고 이른다. ‘발분저서’란 ‘분발하여 저술한다’는 뜻이다. 사마천은 왜 분발하여 저술에 힘썼을까? 결락감 때문이었다. 이처럼 ‘발분저서’는 기본적으로 결락감에서 비롯된다. 등 따시고 배부르고 모든 걸 소유한 사람이 왜 발분저서를 하겠는가. 다산 정약용이 18년간의 유배 생활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저술에 힘을 쏟은 것 역시 발분저서의 예에 해당한다. 연암은 다산처럼 유배를 당하지는 않았으며, 다산처럼 절체절명의 처절한 상황에 놓인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그의 글쓰기가 심한 결락감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는 서로 비슷한 점이 없지 않다.
사마천, 연암, 다산 이 세 사람은 인간 기지로가 전공 분야와 관심이 제각각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발분저서를 했다는 점에서는 공통된다. 연암이 사회적 주변인들, 사회적 비주류에 속한 인간들과 유유상종하면서 그들에게 관심과 따뜻한 눈길을 보내거나 동병상련의 감정을 가질 수 있었던 것도 기실 따져보면 연암이 지닌 이 심한 결락감과 관련이 없지 않다.
이러했으므로 연암은 사마천의 마음을 잘 알아볼 수 있었다고 여겨진다. 이 글 1단락에서 사마천의 글에 대한 경지의 논평을 한 마디로 가소롭다고 치부하고 있음도 이 때문일 것이다.
사족이지만 한마디 덧붙인다. 이 단락의 나비 잡는 아이의 비유를 시니피앙(記標)과 시니피에(記義)의 관계로 설명하거나 데리다Derrida의 차연差延(디페랑스defferance) 개념을 빌려 와 ‘대상을 글로 포착했다 싶으면 대상은 그 순간 벌써 미끄러져 나가 버린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고 야단스럽게 해석하는 연구자들이 있다. 이는 망발이다. 식자우환識字憂患(아는 게 곧 병이다)이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다. 한문 문리도 부족하고, 문맥도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으며, 생각도 짧고, 동아시아 문화에 대한 이해도 부족하다. 이를 메우기 위해 함부로 외국의 권위에 기대고 있으나, 맞지 않는 옷을 걸치고 있는 형국이라 우스꽝스럽기만 하다. 이러니 우리 학문이 여전히 식민성을 못 벗었다는 게 아닌가.
이 단락의 내용과는 별 관계가 없는 이야기지만, 만일 연암의 언어관을 설명하기 위해 굳이 외국의 권위를 끌어올 양이면 데리다가 아니라 18세기 말 19세기 초에 활동한 독일의 언어철학자 훔볼트Humboldt(1767~1835)를 거론하는 게 나을 것이다. 언어와 사물 간의 내적 긴장, 그 합치를 주장했다는 점에서 둘 사이에는 서로 통하는 점이 없지 않으니까.
연암의 각종 글에 대한 해석에는 이런 망발이 비일비재하니 이런 걸 갖고 열을 낼 일은 아니지만 해도 해도 너무 심한 것 같아 한마디 해둔다.
6. 총평
1
연암은 글의 거죽만 읽으려 들지 말고 글에 깃들여 있는 글쓴이의 마음을 읽으라고 말하고 있다. 연암의 이 말은 우리가 연암의 글을 읽을 때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연암이 쓴 글들의 거죽만 보고 이러쿵저러쿵 말하거나 환호할 것이 아니라, 그 심부深部에 깃들여 있는 연암의 마음, 연암의 고심을 읽어내는 일이 중요하다. 연암의 글을 피상적으로 읽고 망발을 일삼거나 대중을 위한다면서 혹세무민하는 사람들은 없는가? 혹 그런 사람이 있다면 연암의 이 말에 두려움을 느껴야 마땅하리라.
2
이 글 2단락의 나비 잡는 아이의 비유는 그 표현이 썩 참신하다. 연암은 글쓰기에서 비유나 은유를 퍽 잘 활용했는데, 이런 데서 연암의 기발한 상상력이 잘 드러난다.
3
연암이 인간 심리를 포착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지녔음은 앞에서도 지적한 바 있지만 이 글의 비유에서도 그 점이 잘 확인된다.
인용
지도 / 목차 / 작가 / 비슷한 것은 가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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