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지금을 담아내자 말하던 유한준의 아들
다시 연암이 그에게 보낸 짤막한 편지글을 한 통 더 읽어보자.
어제 아드님이 와서는 글 짓는 것에 대해 물어 보길래, “예禮가 아니면 보지를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도 말며,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말하지도 말라”고 일러 주었지요. 그랬더니 자못 기뻐하지 않고 돌아가더군요. 모르겠습니다만 아침저녁 문안을 여쭐 적에 이 말을 하던가요? 昨日令胤來, 問爲文. 告之曰: ‘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動, 非禮勿言.’ 頗不悅而去. 不審, 定省之際, 言告否. |
「답창애지사答蒼厓之四」이다. 아마도 유한준의 아들이 아버지 편지 심부름으로 연암을 찾아왔다가 문장의 방법을 물었던 모양이다. “선생님! 글은 어떻게 써야 합니까?” 아버지와의 불편함을 눈치 챈 아들의 물음이었으니, 아마도 연암의 귀에 그 말은 순순하게 들리질 않고, “당신이 그렇게 잘났으면 도대체 어떻게 써야 잘 쓴 글이랍니까?” 쯤으로 들렸을 법도 하다. 연암은 눈 하나 깜짝 않고 그 자리에서 이렇게 대답한다. “간단하지. 예가 아니면 보지를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도 말며,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말하지도 말게나. 그러면 좋은 글을 쓸 수 있을 것이야.”
아마도 연암의 본래 뜻은 문장의 테크닉을 향상시키는 기교보다는 마음자리를 바로 갖는 공부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던 듯하다. 문장의 방법을 묻는데 엉뚱한 대답을 하니, 아들은 이 양반이 날 무시해서 놀리나 싶어 화가 나서 갔을 터이고, 연암은 이 일을 편지에서 유한준에게 묻고 있다.
이런 저런 일로 유한준은 연암에게 깊은 유감을 품어, 훗날 그는 연암의 『열하일기』를 오랑캐의 연호를 쓴 ‘노호지고虜號之稿’라고 극력 비방하는데 앞장섰고, 뒤에 연암이 포천에 묘지를 만들자 일족을 시켜 고의로 그 묘자리를 파내 집안 간에 돌이킬 수 없는 심각한 대립을 빚기까지 하였다. 박종채는 『과정록』에서 이때 일을 두고 유한준이 연암이 젊었을 때 자신의 글을 인정해주지 않았던 일에 원망을 품어 꾸민 일이라고 적고 “이 자는 우리 집안 백세의 원수”라고까지 적고 있다. ‘문인상경文人相輕’이라 하여 글 쓰는 이들이 남을 서로 우습게 보는 경향은 늘상 있어온 것이지만, 문장에 대한 견해 차이가 이렇듯 가문간의 극한 대립으로까지 발전한 것은 드물게 보는 심상찮은 일이다.
앞서 불쾌해져 돌아갔던 유한준의 아들은 바로 유만주兪晩柱(1755-1788)였다. 최근 서울대학교 규장각에서 그가 21세 나던 1775년 1월 1일에서부터 세상을 뜨기 두 달 전엔 1787년 12월 14일까지 쓴 13년간의 일기, 『흠영欽英』이 모두 여섯 책으로 영인되어 나왔다. 기록이란 참으로 긴 생명력을 지닌다는 말을 실감케 된다.
이 책에는 흥미롭게도 연암에 대한 알려지지 않은 언급들이 꽤 많이 실려 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그가 쓴 문장에 관한 언급을 보면 오히려 아버지 유한준의 편이 아니고 연암의 생각에 더 가깝다는 점이다. 끝으로 인용하는 한 단락은 앞서 본 「답창애지일答蒼厓之一」에서 유한준을 공박하던 연암의 논리와 꼭 같다. 앞으로 연구자들이 풀어야 할 숙제 하나가 더 늘어난 셈이다.
이른바 문장을 함에 지금 것을 피하고 말은 반드시 진한秦漢의 옛스러움을 답습하며, 우리의 시속時俗을 버리고 이름은 반드시 중국의 고아한 것만을 모방하니 그 촌스러움이 크다 하겠다. 진실로 그 이치를 얻기만 한다면, 비록 우리나라의 일을 기록하고, 우리나라의 사물을 적으며, 우리나라의 말을 쓰더라도 절로 뒷날 반드시 전해질 훌륭한 글이 되기에 해될 것이 없다. 그럴진대 이른바 지금 것이라 해서 반드시 옛것만 못하지 않고, 이른바 시속時俗의 것이라 해서 반드시 고아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은 것을 가지고 촉蜀 땅에 전하게 하면, 촉 땅 사람이 한 번 보고는 문득 우리나라의 글임을 알게 될 터이고, 민閩 땅에 전하게 하면 민 땅 사람이 한 번만 보고도 바로 우리나라의 글임을 알게 될 터이니, 이러한 뒤라야 이를 ‘진문장眞文章’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所謂文章, 避今時而語必襲秦漢之古, 舍東俗而名必倣中國之雅, 其野大矣. 苟得其理, 雖記東方之事, 書東方之物, 用東方之言, 而自不害爲必傳之治文. 則所謂今者, 未必不古, 而所謂俗者, 未必不雅矣. 使如此而傳之蜀, 蜀人一見, 便知其爲東方之文, 傳之閩, 閩人一見, 便知其爲東方之文, 然後斯可謂之眞文章云. (1777년 2월 5일 일기) |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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