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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연암을 읽는다 - 20. 경지에게 보낸 답장 첫 번째 본문

책/한문(漢文)

연암을 읽는다 - 20. 경지에게 보낸 답장 첫 번째

건방진방랑자 2020. 3. 30.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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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지란 누구인가?

 

 

이 편지는 경지京之라는 사람에게 보낸 답장이다. 경지가 누군지는 확실치 않다. 나는 그가 혹 당대의 저명한 서예가이자 퉁소 연주자인 이한진李漢鎭(1732~?)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고 있다.

이한진은 호가 경산京山이고, 자는 중운仲雲이며, 본관은 성주星州이다. ‘경지는 그의 또 다른 자가 아닐까 한다. 이한진은 감역監役이라는 말단 벼슬을 지냈을 뿐이다. ‘감역이라는 벼슬은 대개 문과에 급제하지 못한 양반이 음직蔭職으로 하는 벼슬이다. 홍대용과 박지원도 감역 벼슬로부터 벼슬을 시작했다. 이한진은 전서篆書와 퉁소에 능하고 아취가 있었으며, 성대중成大中(1732~1809)홍대용이덕무박제가ㆍ홍원섭洪元燮(1744~1807) 등과 교유했다.

 

성대중의 문집인 청성집에 실려 있는 글인 유춘오의 악회를 기록하다에 의하면, 이한진이 홍대용ㆍ김억ㆍ홍원섭과 더불어 남산에 있던 홍대용의 집인 유춘오에 모여 퉁소를 연주했다고 하며, 같은 책에 실려 있는 양양 부사로 부임하는 연암을 전송하는 글에서는, 문장으론 박지원이 뛰어나고 전서로는 이한진이 뛰어나다고 했다. 이한진은 영조 때의 저명한 문인화가인 이인상李麟祥(1710~1760)의 전서를 계승했다. 이인상의 전서는 그 인간을 반영하여 내면미內面美와 고결함이 대단히 높다. 이한진의 전서는 그만큼은 못하지만 문기文氣가 썩 높다.

 

홍대용은 17671112일 부친상을 당해 고향에 내려가 삼년상을 치른 후 1770년에 다시 서울로 올라온다. 유춘오 악회는 1770년에 개시되어 홍대용이 처음으로 벼슬에 나간 1774년까지 성황을 이루었다고 보인다. 당시 연암은 1768년부터 1771년까지는 백탑 부근에 살았고, 1772년부터는 전의감동에 살았다. 백탑 부근이든 전의감동이든 남산 기슭의 유춘오까지는 멀지 않은 거리였다. 연암은 이 시절 울적함을 풀기 위해, 그리고 학문적 담토談討를 위해, 자주 유춘오를 찾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하여 그의 사상과 예술은 더욱 더 난숙爛熟되어 갔을 터이다. 이 시기 연암은 유춘오라는 문화적ㆍ예술적 공간을 통해 이한진과도 친분을 쌓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2. 첫 시작부터 본론으로 들어간 편지

 

 

전의감동 시절 연암은 자신이 살던 집 건물에 방경각放瓊閣이라는 이름과 영대정映帶亭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지금 전하는 연암의 문집에는 방경각 외전放璚閣外傳이라는 이름하에 양반전등 이른바 9九傳을 수록해놓고 있다. 연암은 전의감동에 살 때 이전에 창작한 전들을 모아 방경각 외전이라는 책을 엮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의감동 시절 연암은 이 책 말고 또 하나의 창작집을 스스로 엮었으니, 영대정잉묵映帶亭賸墨이 그것이다. ‘영대정 잉묵이란 영대정에서 엮은 하잘 것 없는 편지글이라는 뜻이다. ‘하잘 것 없는이라는 말은 겸사로 한 말이다. 연암 자신의 편지글 모음집인 이 책은 정확히 177210월에 편찬되었다. 연암은 이 책에 자서(映帶亭賸墨自序)를 붙였는데 그 말미에 한 책을 필사해서 방경각 동쪽 다락에 보관한다. 임진년(1772) 초겨울 상순에 연암거사燕巖居士가 쓰다(於是抄寫一卷, 藏棄于放瓊閣之東樓. 歲壬辰孟冬上瀚. 燕巖居士書)”라는 말이 있어 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경지에게 보낸 답장은 바로 이 책의 맨 앞에 실린 편지다. 1772년이면 연암이 36세 때다. 그러므로 이 편지는 적어도 연암 36세 이전의 편지랄 수 있다. 대체로 30대 전반의 어느 시점에 쓴 편지가 아닐까 추정된다.

한편, 이덕무의 친한 벗 중에 윤병현尹秉鉉이라는 이가 있는데, 이 분이 경지景之라는 자를 사용했다. 윤병현은 서출로 짐작된다. 이 편지의 경지가 혹 윤병현일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지만, 이 편지가 영대정잉묵映帶亭賸墨의 맨 앞에 실려 있다는 점으로 봐서, 그리고 편지의 문투나 분위기로 봐서, 수신인은 적어도 연암과 동격의 위치에 있던 사람이라고 해야 할 듯하고, 이 점에서 고아한 선비로 알려져 있는 이한진 쪽에 좀 더 마음이 쏠린다.

 

 

이별의 말 정다웠지만, 옛말에 천리 밖까지 따라가 배웅할지라도 끝내는 헤어져야 한다고 했거늘 어쩌겠습니까. 다만 한 가닥 아쉬운 마음이 떠나지 않고 착 달라붙어 있어, 어디서 오는지 자취가 없건만 사라지고 나면 삼삼히 눈에 아른거리는 저 허공 속의 꽃 같사외다[각주:1].
別語關關, 所謂送君千里, 終當一別, 柰何柰何. 只有一端弱緖, 飄裊纏綿, 如空裡幻花.

이 편지는 일반적인 형식을 따르지 않고 있다. 일반적으로 편지는 그 서두에 의례적인 말이 나오게 마련이다. 하다못해, 주신 편지를 잘 받았다든지, 보내신 편지를 받들어 읽고 답장을 쓴다든지 하는 이런 말이 서두에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이 편지는 그런 게 전혀 없다. 편지의 첫 글자에서부터 곧바로 마음속의 진정을 토로하고 있다. 이 점에서 이 편지는 격식과 의례를 따르기보다 마음의 진실을 따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편지란 의례적이고 사무적이며 반말만 가득한 것이 될 수도 있지만, 이처럼 더 없이 정답고 진실한 의사소통의 방식이 될 수도 있다. 요컨대 쓰기 나름인 것이다.

아마도 연암과 경지는 얼마 전에 이별했던 듯하다. 두 사람은 이별할 때 너무 아쉬워 다정한 말들을 서로 주고받았던 모양이다. “이별의 말 정다웠지만(別語關關)” 운운한 말은 그래서 한 말일 터이다. 하지만 집에 들어와 가만히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아쉬움이 가느다란 실처럼 마음속에 연면히 자리하고 있어 도무지 사라지지 않는다. 그건 마치 불교에서 말하는 허공 속의 꽃(空裡幻花)’처럼 손에 잡히지도 않고 실체도 없는 것이건만 눈앞에 삼삼히 어른거리며 마음을 떠나지 않는다. 이 단락은 이런 연암의 마음을 시적인 언어로 잘 그려내고 있다.

 

 

 

 

  1. 공리환화空裡幻花: ‘환화幻花’는 ‘허공 속의 꽃’이라는 말로 실체가 없는 가상假像을 일컫는 불교 용어다. ‘공중화空中花’라고도 한다. 『능엄경楞嚴經』에 나오는 ‘제이월第二月’이라는 말과 같은 뜻으로, 있는 듯하나 실제로는 없는 사물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이다. 미망에 빠진 중생들은 늘 망령되이 가상을 진상眞像으로 믿는바 이것은 마치 눈이 흐릿한 사람이 공중에 꽃이 있고 하늘에 달이 둘 있다고 오인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본문으로]

 

 

3. 석별의 아쉬움을 잇는 사이이야기

 

지난번 백화암百華菴[각주:1]에 앉아 있을 때 일이외다. 암주菴主[각주:2]인 처화處華가 멀리 마을에서 들려오는 다듬이 소리를 듣고는 비구[각주:3] 영탁靈托에게 이렇게 게[각주:4]를 읊더이다.
탁탁 하는 방망이 소리와 툭툭 하는 다듬잇돌 소리, 어느 것이 먼저인고?”
그러자 영탁은 합장하며 이렇게 말했사외다.
먼저도 없고 나중도 없으니 그 사이에서 소리가 들리옵나이다.”
頃坐百華菴, 菴主處華, 聞遠邨風砧, 傳偈其比丘靈托曰: “椓椓礑礑, 落得誰先?” 托拱手曰: “不先不後, 聽是那際?”

갑자기 문세가 확 전환되면서 앞서 말똥구슬서문蜋丸集序에서 봤던 것과 같은 이상한 일화가 제시되고 있다. 뭘 말하려는 걸까?

처화가 툭 던진 물음은 방망이 소리가 먼저냐 다듬잇돌 소리가 먼저냐는 것이다. 어느 것이 먼저일까? 방망이 소리일까, 다듬잇돌 소리일까? 영탁의 대답이 절묘하다. 어느 것이 먼저랄 게 없으며 소리는 그 사이에서 난다는 것. ‘사이라는 말의 원문은 . ‘말똥구슬서문蜋丸集序에 나온 이나 과 동일한 개념이다. 말똥구슬서문蜋丸集序이라는 글을 읽을 때 이미 자세히 살핀 바 있지만, 황희 정승은 이가 옷에서 생기는 것도 아니요 살에서 생기는 것도 아니며, 옷과 살 사이()’에서 생긴다고 하지 않았던가. 소리가 방망이도 아니요 다듬잇돌도 아닌 그 사이에서 난다는 영탁의 대답은 황희 정승의 말과 동일한 논리이자 어법이다. ‘을 강조하는 연암의 독특한 사유 구조가 금강산 유람 중에 접한 불교 체험과 관련된다는 사실이 이 단락을 통해 확인된다.

 

그런데 백화암 암주라고 한 처화는 준대사와 같은 사람인가 다른 사람인가? 정확히 알 수 없다. 우리는 앞에서 관재라는 집의 기문觀齋記을 읽은 바 있는데, 그 글에는 연암이 백화암을 처음 찾아가 준대사와 그의 동자승이 서로 문답을 주고받는 것을 목도하는 장면이 나온다. 당시 연암은 준대사가 설파한, ‘이름이란 아무 실체가 없으며 그림자와 같은 것이라는 메시지에 강한 인상을 받았던 것 같다. 이로 보면 연암이 백화암에 묵을 때 선승에게서 받은 영향은 비단 한둘이 아니다. 그래서 연암 사유의 전개 과정에서 백화암 체험이라는 모티프를 하나 특별히 내세움직하다. 연암의 사유 태도에 유의해서 말한다면 이 백화암 체험을 계기로 연암은 마침내 중년기로 넘어간다고 할 수 있을 터이다. 이처럼 연암의 백화암에서의 선 체험은 그의 생애를 구획 짓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그건 그렇고, 이 글은 편지 아닌가? 연암은 편지에서 왜 이런 말을 갑자기 하는 걸까? 더구나 앞 단락에서는 석별을 아쉬워하는 말을 너무나 시적인 어조로 말해놓지 않았던가. 이 단락은 그것과 무슨 상관이 있는 걸까? 생각이 빠른 독자라면 이런 의아심을 가질 법하다. 하지만 연암의 글은 기복起伏과 반전反轉, 전후 조응前後照應이 많아 끝까지 읽지 않으면 안 된다. 끝에 가서 비로소 쫙 하나로 꿰지는 경우가 많으니까.

 

 

 

  1. 백화암百華菴: 내금강 마하연에 있던 암자이다. 연암은 29세 때인 1765년 가을에 금강산 일대를 유람하던 중 이 암자에 묵은 적이 있다. [본문으로]
  2. 암주菴主: 암자의 주인 노릇하는 승려를 말한다. [본문으로]
  3. 비구比丘: 남자 중을 이르는 말인데, 여기서는 암주 처화의 상좌上佐(=제자 중)를 가리킬 터이다. [본문으로]
  4. 게偈: 산스크리트어 가타gāthā를 한자음으로 표기한 것이다. 한어漢語로는 ‘송頌’이라 번역한다. 산스크리트어와 한어를 합쳐 ‘게송偈頌’이라고도 한다. 부처를 찬양하거나 깨달음을 읊은 말이다. 여기서는 깨달음을 읊은 말에 해당한다. [본문으로]

 

 

4.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 곳

 

 

어제 당신께서는 정자 위에서 난간을 배회하셨고, 저 역시 다리 곁에 말을 세우고는 차마 떠나지 못했으니, 서로간의 거리가 아마 한 마장쯤 됐을 거외다. 모르긴 해도 우리가 서로 바라본 곳은 당신과 제가 있던 그 사이 어디쯤이 아닐까 하외다.
昨日足下, 猶於亭上, 循欄徘徊, 僕亦立馬橋頭, 其間相去已爲里許. 不知兩相望處, 還是那際.

당시 연암은 경지와 유별留別했던 듯하다. 떠나는 사람이 남아 있는 사람에게 작별을 고하는 것을 유별이라 하고, 남아 있는 사람이 떠나는 사람을 전송하는 것을 송별이라 한다. 연암이 떠나왔으니, 연암은 유별한 게 되고, 경지는 송별한 게 된다.

 

두 사람 모두 작별이 퍽 아쉬웠던 모양이다. 경지는 말을 타고 떠나가는 연암을 정자 위 난간에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연암은 연암대로 발길이 잘 떨어지지 않아 가다가 잠시 다리 위에 말을 세우고는 서성거리고 있다. 연암은 떠나가는 자신을 경지가 정자 위에서 줄창 응시하고 있음을 몸으로 느껴 알고 있으며, 경지 역시 천천히 말을 몰아가고 있는 연암의 뒷모습에서 연암이 지금 어떤 마음인지를 느끼고 있다. 이 단락의 첫 문장은 그 점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 단락의 두 번째 문장이자 마지막 문장인 모르긴 해도 우리가 서로 바라본 곳은 당신과 제가 있던 그 사이 어디쯤이 아닐까 하외다(不知兩相望處, 還是那際)”라는 말은 무슨 말일까? 말을 타고 가던 등 뒤로 경지의 시선을 계속 느끼던 연암은 사오백 미터쯤 가서 다리 곁에다 말을 세우고는 고개를 돌려 정자 위의 경지를 쳐다보았을 테고, 경지도 눈을 떼지 않고 떠나가는 연암을 계속 보고 있던 터이니 두 사람의 시선은 급기야 사로 마주치게 되었을 것이다.

바라보는 두 시선은 어디서 만났겠는가? 연암에게서 만났겠는가, 경지에게서 만났겠는가? 이도 저도 아니며, 두 사람이 있는 곳 사이의 어느 지점일 터이다. 두 시선은 바로 이 지점에서 융합되어 말할 수 없이 애틋한 정을 만들어냈을 터이다. 연암이 말하고자 한 바는 바로 이 점이다.

그런데, 이 문장 속의 사이라는 말은 2단락에 나온 사이라는 말과 똑같은 말이다. 그러므로 2단락에서 제시된 선문답은 이 단락의 진술을 이끌어내기 위한 복선과도 같은 것이다.

 

이 글은 1단락과 2단락은 이 마지막 단락에 와서 하나로 합쳐진다. 앞에서 말한 대로 글 끝에 와서 비로소 하나로 쫙 꿰지고 있는 셈이다.

 

 

 

 

 

 

5. 총평

 

 

1

그리움이라든가 누군가에 대한 애틋한 마음은 모두 망상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설사 망상이라 할지라도 그립고 아련한 마음을 우리는 어찌할 수가 없다.

 

 

2

이 글은 짤막한 편지지만 글 쓴 사람의 진정이 오롯이 담겨 있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여운이 참 깊다. 일생에 이런 편지를 한 통이라도 받을 수 있다면 그런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리라.

 

 

3

옛날의 편지에는 크게 보아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격식을 갖추어서 쓰는 비교적 긴 편지이고, 다른 하나는 크게 격식을 따지지 않고 안부나 소회所懷를 전하는 짤막한 편지이다. 전자는 보통 라고 부르고, 후자는 간찰簡札이나 척독尺牘이라고 부른다. 경지에게 보낸 답장 세 통은 모두 후자에 속한다. 척독은 에 비해 글쓰기가 자유롭고 격식에 크게 얽매이지 않기 때문에 문예미를 구현하고 있는 것들이 종종 있다. 중국의 경우 송대의 소동파蘇東坡(1036~1101)와 황정견黃庭堅(1045~1105)이 문예미가 빼어난 척독을 잘 쓴 것으로 유명한데, 조선의 경우 추사 김정희의 척독이 세간에 널리 알려져 있다. 연암의 척독은 추사가 남긴 것처럼 그렇게 많은 것은 못 되나, 그 문예미의 높이에 있어서는 오히려 추사의 것을 능가한다.

 

 

 

 

 

인용

지도 / 목차 / 작가 / 비슷한 것은 가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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