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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속 빈 강정 - 2. 일상을 담아낸 이 글의 가치 본문

책/한문(漢文)

속 빈 강정 - 2. 일상을 담아낸 이 글의 가치

건방진방랑자 2020. 4. 2.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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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일상을 담아낸 이 글의 가치

 

 

내가 다 읽고 나서 돌려주며 말하였다.

장주莊周가 나비로 된 것은 믿지 않을 수가 없지만, 이광李廣이 바위를 쏜 것은 마침내 의심할 만하거든[각주:1]. 왜 그렇겠는가? 꿈이란 것은 보기가 어렵지만, 실제 일은 징험하기가 쉽기 때문일세. 이제 자네가 낮고 가까운데서 말을 살피고, 구석지고 더러운 데서 일을 주워 모았으나, 어리석은 필부필부匹夫匹婦들이 천박스레 웃고 일상으로 차 마시는 일은 실제 일이 아님이 없고 보니, 시도록 보고 질리도록 들은 것이어서 거리의 용렬한 자들도 본시 그러려니 하는 것들일세. 비록 그러나 해묵은 장도 그릇을 바꾸면 입맛이 새롭고, 일상적인 정리情理도 경계가 달라지매 마음과 눈이 모두 옮겨가는 법일세.

余旣卒業而復之曰: "莊周之化蝶, 不得不信, 李廣之射石, 終涉可疑. 何則? 夢寐難見, 卽事易驗也. 今吾子察言於鄙邇, 摭事於側陋, 愚夫愚婦, 淺笑常茶, 無非卽事, 則目酸耳飫, 城朝庸奴, 固其然也. 雖然宿醬換器, 口齒生新, 恒情殊境, 心目俱遷.

소천암은 이렇게 연암에게 자신이 지은 책과 함께 화두 하나를 던져 놓고 가버렸다. 순패를 다 읽고 난 연암은 소천암에게 이렇게 대답한다.

여보게, 소천암! 나는 이렇게 생각하네. 꿈에 장자가 나비로 된 것은 믿지 않을 수가 없다고 보네. 장자의 꿈이야 내가 장자가 아닌 이상에야 어찌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증명해 낼 수 있겠는가? 그런데 한나라 때 장수 이광李廣이 밤길을 가다가 범을 보고 화살을 매겼는데, 이튿날 가서 보니 그게 범이 아니라 바위였더란 이야기, 또 그 화살이 바위에 깊숙이 박혀 있더란 이야기는 도대체 믿을 수가 없단 말이야. 아무리 범인 줄 알고 쏘았다 해도 화살이 바위를 꿰뚫는 이치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게 정녕 사실이라면 지금도 그 바위에 화살이 박혔던 자리가 남아 있어야 할 게 아닌가 말이야. 이런 종류의 일은 금세 눈으로 보아 확인할 수 있는 일이기에 사람들이 잘 납득 않는 법이거든.

그런데 자네의 순패는 모두 이광의 화살 같은 것일세 그려. 실려 있는 내용이란 것이 모두 지금 내 눈 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일상의 일들뿐이니, 하나도 신기할 구석이 없는데다, 옳고 그름이 그 즉시 드러나게 되니 말일세. 비록 그렇기는 해도 이것이 아주 의미 없지는 않다고 보네. 해묵은 장도 새 그릇에 담고 보면 새 장 맛이 나고, 평범한 이야기도 장소가 바뀌면 그럴듯한 이야기가 되지 않던가? 나는 자네의 이 책이 바로 새 그릇이요 다른 장소라고 보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이야기, 누구나 으레 그러려니 하고 여기던 일들을 막상 이렇게 갈래를 나누어 꼼꼼히 기록해 놓고 보니, 참으로 보배로운 한 권이 책이 되었군 그래.

자네는 앞서 속빈 강정과 밥 이야기를 했었지? 매일 먹는 밥이고 보니 시큰둥하게 생각하다가 어쩌다 강정을 보면 먹음직스런 생각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나? 그렇지만 속빈 강정만 먹고는 살 수가 없으니 문제가 되지. 늘상 보는 것들은 관심을 끌지 못하고 새로운 것은 호기심을 일으키지만, 새롭다고 해서 곧 가치 있는 것은 아니란 말일세. 말하자면 자네의 이 책은 속빈 강정을 내던지고, 개암이나 밤, 쌀밥 따위의 일상적인 것을 취한 것일세. 그래서 사람들은 그저 우습게 보아 넘기겠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네. 알맹이는 없이 번지르하게 꾸미기에만 급급한 허황한 글놀음 보다야 백번 낫다고 보네.

 

 

 

 

 

 

인용

목차

원문

작가 이력 및 작품

17B6

1. 밤과 쌀 같은 문집을 내밀며

2. 일상을 담아낸 이 글의 가치

3. 알맹이는 갖추되 수사도 신경 쓴 작품집

4. 편지에 으레 쓰던 문장을 쓰지 말라

5. 누구나 쓰는 말이 들어 있지 않은 편지 모음집

6. 연암의 개성 넘치는 표현이 담긴 편지들

 

  1. 한나라 때 이광李廣이 밤길을 가다가 범이 웅크려 있는 것을 보고 화살을 매겨 쏘았는데, 밝은 날 가서 보니 범이 아니라 바위였다. 그런데 화살은 그 바위에 깊숙이 꽂혀 있었다는 것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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