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이야기를 기록해야 하는 이유
순패서(旬稗序)
박지원(朴趾源)
나의 주변, 우리 일상을 담아내다
小川菴雜記域內風謠民彛方言俗技, 至於紙鷂有譜, 丱謎著解. 曲巷窮閭, 爛情熟態, 倚門鼓刀, 肩媚掌誓, 靡不蒐載, 各有條貫. 口舌之所難辨, 而必則形之; 志意之所未到, 而開卷輒有. 凡鷄鳴狗嘷, 虫翹蠡蠢, 盡得其容聲. 於是配以十干, 名爲旬稗.
지금의 문장들은 강정 같다
一日袖以示余曰: “此吾童子時手戱也. 子獨不見食之有粔𥺌乎? 粉米漬酒, 截以蚕大, 煖堗焙之, 煮油漲之, 其形如繭. 非不潔且美也, 其中空空, 啖而難飽, 其質易碎, 吹則雪飛. 故凡物之外美而中空者, 謂之粔𥺌. 今夫榛栗稻秔, 卽人所賤. 然實美而眞飽, 則可以事上帝, 亦可以贄盛賓. 夫文章之道, 亦如是, 而人以其榛栗稻秔, 而鄙夷之. 則子盍爲我辨之?”
일상의 일을 기록하는 것의 의미
余旣卒業而復之曰: “莊周之化蝶, 不得不信, 李廣之射石, 終涉可疑. 何則? 夢寐難見, 卽事易驗也. 今吾子察言於鄙邇, 摭事於側陋, 愚夫愚婦, 淺笑常茶, 無非卽事, 則目酸耳飫, 城朝庸奴, 固其然也. 雖然宿醬換器, 口齒生新, 恒情殊境, 心目俱遷.
그대 작품인 긴 말하지 않아도 지금 이 순간이 담겨 있다
覽斯卷者, 不必問小川菴之爲何人, 風謠之何方, 方可以得之. 於是焉, 聯讀成韻, 則性情可論; 接譜爲畵, 則鬚眉可徵, 䏁睞道人嘗論: ‘夕陽片帆, 乍隱蘆葦, 舟人漁子, 雖皆拳鬚突鬢, 遵渚而望, 甚疑其高士陸魯望先生.’ 嗟呼! 道人先獲矣. 子於道人師之也, 往徵也哉!” 『燕巖集』 卷之七
▲ 이서지 화백의 '장날'
해석
나의 주변, 우리 일상을 담아내다
小川菴雜記域內風謠民彛方言俗技,
소천암(小川菴)은 조선 땅의 민간가요와 백성들의 사투리, 일상의 기술들을 섞어 기록하였고
至於紙鷂有譜, 丱謎著解.
심지어 종이연의 계보 있음과 아이들의 수수께끼에 해설을 첨가하기도 했다.
曲巷窮閭, 爛情熟態,
굽이굽이 마을 어귀에 후미진 곳까지 따스한 정(情)과 익숙한 태도,
倚門鼓刀,
문에 기대거나 칼을 두드리거나,
肩媚掌誓,
어깨를 들썩이며 애교를 부리고 손바닥으로 맹세하는 것【장서(掌誓): 민간에서 맹세할 때 손뼉을 쳐서 신용을 나타내 보이는 것을 ‘격장위서(擊掌爲誓)’라 한다】을
靡不蒐載, 各有條貫.
수집하여 싣지 않음이 없었고 각각 조목에 따라 통합하였다.
口舌之所難辨, 而必則形之;
입과 혀로 분별하기 어려운 것도 반드시 붓으로 형용했고
志意之所未到, 而開卷輒有.
뜻이 닿지 않는 것도 책을 열면 문득 있었다.
凡鷄鳴狗嘷, 虫翹蠡蠢,
닭이 울고 개가 짖으며 벌레가 날라 다니고 꿈틀꿈틀 대는
盡得其容聲.
모습과 소리를 모두 얻었다.
於是配以十干, 名爲『旬稗』.
이에 십간(十干)으로 배열하고서 『순패』라 이름 지었다.
지금의 문장들은 강정 같다
一日袖以示余曰:
하루는 소매에서 꺼내 나에게 보여주고선 말한다.
“此吾童子時手戱也.
“이것은 내가 어렸을 때에 손장난처럼 쓴 것이네.
子獨不見食之有粔𥺌乎?
자네 유독 먹을 것 중에 강정이 있음을 보지 못했나?
粉米漬酒, 截以蚕大,
쌀을 가루 내어 술에 담가 누에처럼 큼지막하게 잘라
煖堗焙之,
부엌창돌에 그것을 숙성시키고
煮油漲之, 其形如繭.
기름으로 지글지글 구우면 팽창되어 그 모습이 누에고치 같지.
非不潔且美也, 其中空空, 啖而難飽,
깨끗하고 보기 좋지 않음이 없지만 그 가운데는 비어있어 먹어도 배부르질 않고
其質易碎, 吹則雪飛.
겉면은 쉽게 부서져 불어대면 눈처럼 날리네.
故凡物之外美而中空者, 謂之粔𥺌.
그렇기 때문에 모든 물건 중에 겉은 화려하나 속이 텅 비어 있는 것을 ‘강정’이라 하는 거지.
今夫榛栗稻秔, 卽人所賤.
지금의 개암과 밤, 찹쌀, 멥쌀은 곧 사람들이 천하게 여기는 것이네.
然實美而眞飽, 則可以事上帝,
그러나 실제론 아름답고 진실로 배가 불러 귀신에게 제사할 수 있고
亦可以贄盛賓.
또한 귀한 손님에게 폐백으로 줄 수도 있네.
夫文章之道, 亦如是,
무릇 문장의 도란 또한 이와 같아
而人以其榛栗稻秔, 而鄙夷之.
사람들이 개암과 밤, 찹쌀, 멥쌀을 비루하고 쉽게 여기니,
則子盍爲我辨之?”
자네는 어찌하여 나를 위해 변론해주지 않는가?”
일상의 일을 기록하는 것의 의미
余旣卒業而復之曰:
내가 읽기를 마치고 돌려주며 말했다.
“莊周之化蝶, 不得不信,
“장주가 나비로 변한 것은 부득불 믿어야 하지만,
이광이 호랑이인 줄 알고 돌을 쐈더니 화살이 박혔다는 이야긴【이광이 사냥을 나갔다가 풀 속에 있는 바위를 호랑이인 줄 알고 힘껏 쏘았더니 화살이 바위를 뚫고 들어갔으나, 바위인 줄 알고 난 뒤 다시 쏘았을 때는 끝내 화살이 바위를 뚫고 들어갈 수 없었다고 한다. -『사기(史記)』 권(卷)109 「이장군열전(李將軍列傳)」】
終涉可疑. 何則?
끝내 의심할 만하니, 왜인가?
夢寐難見, 卽事易驗也.
자며 꿈꾼 것은 보기가 어렵지만 실제 있었던 일은 증험하기가 쉽네.
今吾子察言於鄙邇, 摭事於側陋,
이제 자네는 일상에서 말을 살폈고, 곁의 비루한 데서 일을 모았으나
愚夫愚婦, 淺笑常茶,
평범한 사람의 시시껄렁한 웃음, 일상속의 차 마시는 일이
無非卽事, 則目酸耳飫,
실제의 일이 아님이 없으니, 시리도록 보고 질리도록 들은 것이라
城朝庸奴, 固其然也.
무식이 넘치는 사람일지라도【성단용노(城旦庸奴): 도형(徒刑)을 사는 무식한 자이다】 진실로 그러려니 한다네.
雖然宿醬換器, 口齒生新,
비록 그러나 묵은 장도 그릇을 바꾸면 입과 이에 새 맛이 느껴지고
恒情殊境, 心目俱遷.
항상스런 정(情)도 환경이 달라지면 마음과 눈이 함께 옮겨간다네.
그대 작품인 긴 말하지 않아도 지금 이 순간이 담겨 있다
覽斯卷者, 不必問小川菴之爲何人,
이 책을 보는 사람은 반드시 소천암이 어떤 사람인지,
風謠之何方, 方可以得之.
민간가요는 어느 지방의 것인지 물을 필요도 없이 곧바로 알 수 있을 것이네.
於是焉, 聯讀成韻, 則性情可論;
이에 읽던 것에 연이어 운(韻)을 이루게 한다면 성정(性情)을 이야기할 만할 것이고,
接譜爲畵, 則鬚眉可徵,
화보를 붙여 그린다면 수염과 눈썹도 증험할 만할 것이네.
䏁睞道人嘗論: ‘夕陽片帆, 乍隱蘆葦, 舟人漁子, 雖皆拳鬚突鬢, 遵渚而望, 甚疑其高士陸魯望先生.’
재래도인(䏁睞道人)【재래도인(䏁睞道人): 귀머거리에다 사팔뜨기를 겸한 도인이란 뜻으로 이덕무의 호의 하나이다. ‘䏁䚅道人’으로 표기하기도 하였다. 재래도인이 했다는 말은 『청장관전서』 권63 선귤당농소(蟬橘堂濃笑)에 나오는 말과 거의 똑같다.】 이덕무가 일찍이 말했었지.
夕陽片帆 乍隱蘆葦 | 석양의 조각배 잠깐 갈대에 숨어 |
舟人漁子 雖皆拳鬚突鬢 | 뱃사공과 어부의 수염은 헝클어졌고 봉두난발이라, |
遵渚而望 | 물가를 따라가며 바라보노라면, |
甚疑其高士陸魯望先生 | 매우 고사(高士) 육구몽(陸龜蒙)인 줄 의심된다오. |
嗟呼! 道人先獲矣.
아! 도인이 먼저 알아챘구나.
子於道人師之也, 往徵也哉!” 『燕巖集』 卷之七
자네는 도인을 스승으로 삼아, 가서 징험해보게나!”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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