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밤과 쌀 같은 문집을 내밀며
소천암小川菴이 우리나라의 민요와 민속, 방언과 속기俗技를 두루 기록하였는데, 심지어 종이연에도 계보가 있고, 아이들 수수께끼에도 풀이를 달아 놓았다. 후미진 뒷골목의 흐드러진 인정과 익숙한 모습들, 문에 기대서거나 칼을 두드리거나, 어깨짓으로 아양 떨고 손바닥을 치며 맹세하는 시정市井 사람들의 모습이 실려 있지 않은 것이 없는데다 제각금 조목조목 엮어 놓았다. 입과 혀로는 분변하기 어려운 것도 반드시 드러내었고, 생각이 미치지 못하던 바도 책을 열면 문득 실려 있다. 무릇 닭 울고 개 짖으며 벌레가 날고 좀이 꿈틀대는 것도 모두 그 모습과 소리를 얻었다. 이에 있어 십간十干으로 배열하고는 이름 지어 『순패旬稗』라 하였다. 小川菴雜記域內風謠民彛方言俗技, 至於紙鷂有譜, 丱謎著解. 曲巷窮閭, 爛情熟態, 倚門鼓刀, 肩媚掌誓, 靡不蒐載, 各有條貫. 口舌之所難辨, 而必則形之; 志意之所未到, 而開卷輒有. 凡鷄鳴狗嘷, 虫翹蠡蠢, 盡得其容聲. 於是配以十干, 名爲旬稗. |
『순패旬稗』는 어떤 책인가? 소천암小川菴이란 이가 우리나라의 민요와 민속, 방언과 속기俗技를 적어 놓은 책이다. 종이연의 종류와 아이들 수수께끼, 민간의 노래와 사투리에서부터, 닭 울고 개 짖는 자질구레한 일들까지 실려 있지 않은 것이 없다. 장사치들이 제 손바닥을 치면서 한 푼도 남지 않는다고 엄살을 떠는 이야기며, 몸 파는 여자가 어깨 짓을 하면서 남정네를 유혹하는 모습도 이 책을 펴면 만날 수가 있다.
하루는 소매에서 꺼내 내게 보여주며 말하였다. “이것은 내가 아이 적에 장난삼아 써본 것일세. 그대는 홀로 먹을 것에 강정이란 것이 있는 것을 보지 못했는가? 쌀가루를 술에 재었다가 누에 만하게 잘라 따뜻한 구들에 말려서는 기름에 지져 부풀리면 그 모양이 고치와 같게 되지. 깨끗하고 예쁘지 않은 것은 아니나 그 속은 텅 비어 아무리 먹어도 배가 부르지는 않고, 성질이 잘 부서지는 지라 훅 불면 눈처럼 날려버린다네. 그런 까닭에 무릇 사물 중에 겉모습은 예쁘지만 속이 텅 빈 것을 강정이라고들 말하지. 이제 대저 개암과 밤, 찹쌀과 멥쌀은 사람들이 천하게 여기는 바이나, 실지가 아름답고 참으로 배를 부르게 한다네. 그래서 하늘에 제사지낼 수도 있고, 큰 손님에게 폐백으로 드릴 수도 있지. 대저 문장의 방법도 또한 이와 같다네. 그런데도 사람들은 개암이나 밤, 찹쌀과 멥쌀을 낮고 더럽게 여기니, 그대가 나를 위해 이를 변론해주지 않으려나?” 一日袖以示余曰: "此吾童子時手戱也. 子獨不見食之有粔米余乎? 粉米漬酒, 截以蚕大, 煖堗焙之, 煮油漲之, 其形如繭. 非不潔且美也, 其中空空, 啖而難飽, 其質易碎, 吹則雪飛. 故凡物之外美而中空者, 謂之粔米余. 今夫榛栗稻秔, 卽人所賤. 然實美而眞飽, 則可以事上帝, 亦可以贄盛賓. 夫文章之道, 亦如是, 而人以其榛栗稻秔, 而鄙夷之. 則子盍爲我辨之?" |
뜬금없이 이 책을 가져온 소천암은 연암에게 다짜고짜 이렇게 말한다.
“자네, 강정을 먹어본 적이 있던가? 쌀가루를 술에 재어 구들에 말린 후 기름에 튀겨 내면 누에고치 모양이 된다네. 깨끗하고 예뻐 먹음직스럽긴 해도, 속이 텅 비어있어 아무리 먹어도 배는 부르질 않지. 그뿐인가? 이게 잘 부서져서 훅 불면 눈가루 같이 날려 버린다네. 그래서 사람들이 겉만 번지르하고 실속은 없는 것을 두고 ‘속 빈 강정’이라고 말하지 않던가? 개암이나 밤, 찹쌀과 멥쌀 따위는 흔히 보고 늘 먹는 것이어서 사람들이 우습게보지만, 이것을 먹으면 배가 부르고, 또 몸에도 이롭단 말일세. 그래서 제사상에도 오르고 폐백 음식도 이걸 쓰지 않던가? 나는 글 쓰는 일도 이것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네. 겉만 번지르하고 알맹이는 없는 그런 글보다, 겉보기엔 평범해 보여도 읽고 나면 생각에 잠기게 하고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그런 글이 정말 좋은 글이란 말이지. 정말 중요한 것은 그 안에 담긴 알맹일 거란 말일세. 그런데 사람들은 속빈 강정만 예쁘다 하고, 개암이나 밤, 찹쌀과 멥쌀은 낮고 더럽다하여 거들떠보지도 않으니 어찌 하겠나? 자네 생각을 말해주지 않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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