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누구나 쓰는 말이 들어 있지 않은 편지 모음집
근엄하고 엄숙한 것이 예禮이기는 하다. 옷소매를 넓게 펴고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예는 예이다. 그러나 자식이 부모를 섬기는데 있어서는 그것이 예가 될 수가 없다. 어버이를 기쁘게 하려고 나이 70에 때때옷을 입고서 재롱을 떨었다는 노래자老萊子의 이야기를 꺼낼 것도 없다. 진정한 효孝는 어버이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일 뿐, 근엄한 것과는 관계가 없다. 다소 경망스레 보이더라도 어버이가 기뻐하신다면 그것이 예인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지가 않다. 『예기禮記』에 그렇게 나와 있으니,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우긴다. 사서四書에 적혀 있으니 어버이에게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비례非禮가 된다고 우긴다. 그렇지만 그 사서 가운데 『논어』를 보면 공자께서도 농담을 하지 않으셨던가 말이다. 『시경』에도 늦잠 투정하는 남정네의 애교가 실려 있지 않던가 말이다. 어떻게 모두 융통성 없이 곧이곧대로만 하는가? 뻗을 자리를 보고 뻗어라. 그것은 결코 아무 때나 휘둘러도 좋을 전가傳家의 보도寶刀가 아니다.
편지글도 이와 다를 것이 없다. 한유韓愈가 쓰고 소동파蘇東坡가 쓰고, 황산곡黃山谷이 썼다 해서 내가 꼭 써야 할 이유는 없다. 소동파 이전에, 황산곡 이전에도 ‘우근진’이 있었던가? 그 이전에도 편지글은 있었다. 그렇지만 ‘우근진’ 없이도 잘만 썼다. 그런데 왜 지금만 꼭 ‘우근진’이 있어야 한다는 말인가? 정작 한유는 ‘무거진언務去陳言’ 즉 글을 쓸 때 진부한 말을 제거하기에 힘쓰라고 하였다. 그런데 후인들은 한유가 그렇게 썼으니까, 소동파가 그렇게 썼으니까 하면서 그 말을 앵무새처럼 되뇌인다. 잘못 되어도 한참 잘못 되었다.
우연히 책 상자를 살펴보다가, 때가 마침 추운 겨울인지라 바야흐로 창문을 발랐는데, 예전에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글로 끼적거리다 남은 것을 얻으니, 모두 50여칙이었다. 어떤 것은 글자가 파리 대가리만 하고, 어떤 것은 종이가 나비 날개처럼 얇다. 어떤 것은 장독 덮개로 쓰기에는 조금 남고, 어떤 것은 대바구니에 바르기에는 부족하였다. 이에 뽑아서 한 권을 베껴 쓰고 방경각放瓊閣의 동루東樓에 보관해 두었다. 임진년(1772) 10월 초순, 연암거사는 쓴다. 偶閱巾笥, 時當寒天, 方塗窓眼, 舊與知舊書疏, 得其副墨賸毫, 共五十餘則. 或字如蠅頭, 或紙如蝶翅, 或覆瓿則有餘, 或糊籠則不足. 於是抄寫一卷, 藏棄于放瓊閣之東樓. 歲壬辰孟冬上瀚. 燕巖居士書. |
추운 겨울날 창문을 바르려고 종이를 꺼내다가 함께 옛날 벗들에게 부치느라 써둔 편지의 초고 뭉치가 나왔다. 그래서 버리기 아까워 수습한 것이 바로 『영대정승묵映帶亭賸墨』이다. 내 편지글에는 그 흔해 빠진 ‘우근진’ 하나 없으니 사람들은 대단히 잘못되었다고 나무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 말이 추하고 더럽다고 여길 뿐, 그 말 안 들어 간 것이 조금도 부끄럽지가 않다.
▲ 전문
인용
- 『禮記』 「內則」에 “及所, 下氣怡聲, 問衣襖寒”이라 하였고, 「檀弓」上에는 “左右就養無方”의 말이 있다. 어버이를 봉양함에 기운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기쁜 목소리로 덥고 추움을 물으며, 좌우에서 봉양함에 나아감은 곳을 가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본문으로]
- 『論語』 「陽貨」에 나오는 말이다. 子游가 武城의 원이 되었는데, 공자가 그곳에 갔다가 거문고에 맞추어 노래부르는 소리를 듣고는 빙그레 웃으며, 닭잡는데 어찌 소잡는 칼을 쓰느냐고 하자, 子游가 “군자가 도를 배우면 사람을 사랑하고, 小人이 도를 배우면 부리기 쉽다”고 한 공자의 말로 대답하자, 공자가 그의 말이 옳다고 하며 앞서 한 말은 농담이었다고 한 것을 두고 한 말. [본문으로]
- 『詩經』 鄭風 「女曰雞鳴」에 나온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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