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건빵이랑 놀자

속 빈 강정 - 5. 누구나 쓰는 말이 들어 있지 않은 편지 모음집 본문

책/한문(漢文)

속 빈 강정 - 5. 누구나 쓰는 말이 들어 있지 않은 편지 모음집

건방진방랑자 2020. 4. 2. 09:03
728x90
반응형

5. 누구나 쓰는 말이 들어 있지 않은 편지 모음집

 

 

대저 공경한다고 하여 예를 갖춰 서서 엄숙하고 위엄 있는 자태로 근엄하게 서 있는 것은 어버이를 모시는 도리가 아니다. 만약 다시금 옷소매를 넓게 펴서 마치 큰 손님을 보듯 하며 간단히 춥고 더운 것만을 묻고 다시 한 마디 말도 하지 않는다면 공경스럽기는 공경스러워도 예를 안다고는 못할 것이다. 즐거운 낯빛과 기쁜 목소리로 어버이를 봉양함에 곳을 가리지 않는다 함이 어찌 있겠는가?[각주:1] 그런 까닭에 빙그레 웃으면서, 앞서 한 말은 농담일 뿐일세.”라고 한 것을 보면 공자께서도 농담을 잘 하신 것이며[각주:2], “아내가 닭 울었다 하자, 남편은 날이 밝지 않았다 하네는 시인의 척독尺牘일 뿐이다[각주:3].

夫敬以禮立, 而嚴威儼慤, 非所以事親也. 若復廣張衣袖, 如見大賓, 略敍寒暄, 更無一語, 敬則敬矣, 知禮則未也. 安在其婾色怡聲, 左右無方也? 故曰: ‘莞爾而笑, 前言戱耳.’ 夫子之善謔. ‘女曰鷄鳴, 士曰昧朝詩人之尺牘爾.

근엄하고 엄숙한 것이 예이기는 하다. 옷소매를 넓게 펴고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예는 예이다. 그러나 자식이 부모를 섬기는데 있어서는 그것이 예가 될 수가 없다. 어버이를 기쁘게 하려고 나이 70에 때때옷을 입고서 재롱을 떨었다는 노래자老萊子의 이야기를 꺼낼 것도 없다. 진정한 효는 어버이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일 뿐, 근엄한 것과는 관계가 없다. 다소 경망스레 보이더라도 어버이가 기뻐하신다면 그것이 예인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지가 않다. 예기禮記에 그렇게 나와 있으니,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우긴다. 사서四書에 적혀 있으니 어버이에게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비례非禮가 된다고 우긴다. 그렇지만 그 사서 가운데 논어를 보면 공자께서도 농담을 하지 않으셨던가 말이다. 시경에도 늦잠 투정하는 남정네의 애교가 실려 있지 않던가 말이다. 어떻게 모두 융통성 없이 곧이곧대로만 하는가? 뻗을 자리를 보고 뻗어라. 그것은 결코 아무 때나 휘둘러도 좋을 전가傳家의 보도寶刀가 아니다.

편지글도 이와 다를 것이 없다. 한유韓愈가 쓰고 소동파蘇東坡가 쓰고, 황산곡黃山谷이 썼다 해서 내가 꼭 써야 할 이유는 없다. 소동파 이전에, 황산곡 이전에도 우근진이 있었던가? 그 이전에도 편지글은 있었다. 그렇지만 우근진없이도 잘만 썼다. 그런데 왜 지금만 꼭 우근진이 있어야 한다는 말인가? 정작 한유는 무거진언務去陳言즉 글을 쓸 때 진부한 말을 제거하기에 힘쓰라고 하였다. 그런데 후인들은 한유가 그렇게 썼으니까, 소동파가 그렇게 썼으니까 하면서 그 말을 앵무새처럼 되뇌인다. 잘못 되어도 한참 잘못 되었다.

 

 

우연히 책 상자를 살펴보다가, 때가 마침 추운 겨울인지라 바야흐로 창문을 발랐는데, 예전에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글로 끼적거리다 남은 것을 얻으니, 모두 50여칙이었다. 어떤 것은 글자가 파리 대가리만 하고, 어떤 것은 종이가 나비 날개처럼 얇다. 어떤 것은 장독 덮개로 쓰기에는 조금 남고, 어떤 것은 대바구니에 바르기에는 부족하였다. 이에 뽑아서 한 권을 베껴 쓰고 방경각放瓊閣의 동루東樓에 보관해 두었다. 임진년(1772) 10월 초순, 연암거사는 쓴다.

偶閱巾笥, 時當寒天, 方塗窓眼, 舊與知舊書疏, 得其副墨賸毫, 共五十餘則. 或字如蠅頭, 或紙如蝶翅, 或覆瓿則有餘, 或糊籠則不足. 於是抄寫一卷, 藏棄于放瓊閣之東樓. 歲壬辰孟冬上瀚. 燕巖居士書.

추운 겨울날 창문을 바르려고 종이를 꺼내다가 함께 옛날 벗들에게 부치느라 써둔 편지의 초고 뭉치가 나왔다. 그래서 버리기 아까워 수습한 것이 바로 영대정승묵映帶亭賸墨이다. 내 편지글에는 그 흔해 빠진 우근진하나 없으니 사람들은 대단히 잘못되었다고 나무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 말이 추하고 더럽다고 여길 뿐, 그 말 안 들어 간 것이 조금도 부끄럽지가 않다.

 

 

  

 

 

김정희가 아버지께 8살 때 올린 편지   

 

 

인용

목차

원문

작가 이력 및 작품

1. 밤과 쌀 같은 문집을 내밀며

2. 일상을 담아낸 이 글의 가치

3. 알맹이는 갖추되 수사도 신경 쓴 작품집

4. 편지에 으레 쓰던 문장을 쓰지 말라

5. 누구나 쓰는 말이 들어 있지 않은 편지 모음집

6. 연암의 개성 넘치는 표현이 담긴 편지들

  1. 『禮記』 「內則」에 “及所, 下氣怡聲, 問衣襖寒”이라 하였고, 「檀弓」上에는 “左右就養無方”의 말이 있다. 어버이를 봉양함에 기운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기쁜 목소리로 덥고 추움을 물으며, 좌우에서 봉양함에 나아감은 곳을 가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본문으로]
  2. 『論語』 「陽貨」에 나오는 말이다. 子游가 武城의 원이 되었는데, 공자가 그곳에 갔다가 거문고에 맞추어 노래부르는 소리를 듣고는 빙그레 웃으며, 닭잡는데 어찌 소잡는 칼을 쓰느냐고 하자, 子游가 “군자가 도를 배우면 사람을 사랑하고, 小人이 도를 배우면 부리기 쉽다”고 한 공자의 말로 대답하자, 공자가 그의 말이 옳다고 하며 앞서 한 말은 농담이었다고 한 것을 두고 한 말. [본문으로]
  3. 『詩經』 鄭風 「女曰雞鳴」에 나온다. [본문으로]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