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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미학, 시안론: 일자사 이야기 - 3. 한 글자의 스승 본문

책/한시(漢詩)

한시미학, 시안론: 일자사 이야기 - 3. 한 글자의 스승

건방진방랑자 2021. 12. 6.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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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한 글자의 스승

 

 

일자사(一字師) 제기(齊己)의 세 가지 일화

 

당나라 때 시승(詩僧) 제기(齊己)가 사방을 유력타가 당시 자고시(鷓鴣詩) 한편으로 정자고(鄭鷓鴣)의 별명을 얻었던 시인 정곡(鄭谷)을 찾아가 5언율시 한 수를 지어 헌정하였다. 대문간에서 명함 대신 시를 들여 놓고 한참을 기다렸으나 안쪽의 기별은 좀체 없었다. 이윽고 문이 열리더니 하인의 전언은 시 가운데 한 글자를 고쳐 가지고 오면 그때 만나 주겠다는 것이었다. 며칠을 고심한 뒤 제기(齊己)는 한 글자를 수정하여 다시 정곡(鄭谷)에게 보냈다. 정곡(鄭谷)은 이를 보고 기뻐하며 그를 기꺼이 맞이하였을 뿐 아니라 평생 시우(詩友)로 교유하였다.

 

뒤에 제기(齊己)가 다시 조매(早梅)시를 지어 정곡(鄭谷)에게 보였다.

 

萬木凍欲折 孤根暖獨回 나무들 모두 얼어 꺾이려 해도 외론 뿌리 따뜻함을 홀로 품어서
前村深雪裏 昨夜幾枝開 앞 마을 답쌓인 깊은 눈 속에 간 밤 몇 가지 꽃을 피웠네.
風帶幽香去 禽窺素艶來 바람도 그윽한 향기를 품고 새들은 흰 떨기를 엿보러 왔네.
明年如應律 先發映春臺 내년 이맘때가 돌아오면은 먼저 피어 춘대(春臺)를 환히 비추렴.

 

시를 찬찬히 읽고 난 정곡(鄭谷)4구의 ()’자를 ()’자로 고쳐야만 조매(早梅)’라 할 수 있을걸세.”라 하니, 마침내 제기(齊己)가 탄복하였다. 쌓인 눈 속에 갓 피어난 매화의 돌올한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데는 확실히 여러 가지의 매화보다 단 한 가지의 매화가 훨씬 함축적이면서도 도약적인 장면을 보여준다.

 

前村深雪裏 昨夜幾枝開 앞 마을 답쌓인 깊은 눈 속에 간밤 몇 가지 꽃을 피웠네.
前村深雪裏 昨夜一枝開 앞 마을 답쌓인 깊은 눈 속에 간밤 한 가지에 꽃을 피웠네.

 

뒷날 제기(齊己)의 시명(詩名)이 높아지자 예전 그가 정곡(鄭谷)에게 그랬던 것처럼 장회(張回)란 시인이 시 한수를 들고 그를 찾아 왔다. 그 시 가운데 살적은 시들어 다해가는데, 구불구불 수염만 흰 것이 없네[蟬鬢雕將盡, 虬髭白也無].”라는 구절이 있었다. 제기(齊己)가 한 번 읊조리고는 ()’자가 좋지 않으니 ()’으로 고침만 못하리라고 충고하였다. 귀밑머리는 시들어 다 빠졌는데 수염만 희지 않다함은, 차라리 구불구불 수염도 검은 것이 없구려로 함만 못하다는 말이다. 장회(張回)는 이에 사례하고 그를 일자사(一字師)’로 섬겼다. 제기(齊己)는 이래저래 일자사(一字師)’와 관련된 세 번의 일화를 남긴 셈이다.

 

蟬鬢雕將盡 虬髭白也無 살적은 시들어 다해가는데, 구불구불 수염만 흰 것이 없네.
蟬鬢雕將盡 虬髭黑也無 살적은 시들어 다해가는데, 구불구불 수염도 검은 것이 없구려

 

 

 

한 글자에 시의 생동감이 달라진다

 

그런가 하면 고사립(顧嗣立)한청시화(寒廳詩話)에는 위 제기(齊己)조매(早梅)시의 뜻을 뒤집은 일자사(一字師) 이야기가 실려 있어 흥미롭다. 장귤헌(張橘軒)이 시를 다음과 같이 지었다.

 

半篙流水夜來雨 밤비에 물이 불어 상앗대가 반쯤 차니
一樹早梅何處春 한 그루 이른 매화, 봄은 그 어딜러뇨.

 

원유산(元遺山)이 지적하기를, “좋긴 좋으나 편안치 않은 데가 있다. 이미 일수(一樹)’라고 해놓고서 어찌 하처(何處)’라 말할 수 있겠는가? ‘일수(一樹)’기점(幾點)’으로 고쳐 비동(飛動)함을 깨닫게 함만 못할 걸세라 하였다. 앞서는 기지(幾枝)’일지(一枝)’로 고쳤는데, 이제는 일수(一樹)’기점(幾點)’으로 고쳐야 한다 하니 언뜻 혼란스럽다. 그러나 그 어디메뇨라 해놓고, ‘단 한그루라 하기보다는 한 그루라 하더라도 몇 개의 점으로 나누어 포착하는 것이 이 경우에는 더 생동스럽지 않은가. 글자가 놓이는 앞뒤 환경에 따라 달라진 것이다.

 

幾點早梅何處春 몇 점의 이른 매화, 봄은 그 어딜러뇨.

 

 

 김홍도, 주상관매도(舟上觀梅圖), 18세기, 164X76cm, 개인 소장

뱃전에 기대앉아 언덕 위 매화를 바라본다. 내 인생에 저 꽃을 몇 번 더 보려나. 이런 마음이었겠지. 술병 하나 앞에 놓였고, 아이는 무료해서 제 무릎을 안았다.

 

 

 

()’()’으로 바꾼다는 것

 

또 당나라 때 임번(任翻)이 과거에 낙제하여 돌아가는 길에 절강(浙江)의 천태산(天台山)에 들렀다가 시정(詩情)이 동탕(動蕩)하여 절 담장 위에 시 한 수를 써 놓았다.

 

絶嶺新秋生夜凉 산마루 새 가을에 밤 한기 돋아나니
鶴翔松露濕衣裳 학 날자 솔 이슬은 옷깃을 적시누나.
前村月落一江水 앞마을에 온강 가득 달빛이 떨어져도
僧在翠微閑竹房 산중턱의 스님네는 죽방(竹房)에서 한가롭네.

 

천태산(天台山)을 내려와 전당강(錢塘江)에 다다른 그가 늦은 밤 강물에 비친 달빛을 보니, 강물이 조수를 따라 물러나자 달빛도 단지 반강(半江)’에만 남는 것이었다. 그는 문득 전날 시에서 일강수(一江水)’라 한 것이 잘못임을 깨닫고 마음이 불안하여 길을 되짚어 절로 달려갔다. 그랬더니 웬걸, ‘()’자 위에는 이미 누가 한 획을 가로 긋고, 다시 세로로 한 줄을 그은 뒤 점 두 개를 찍어 ()’자로 고쳐 놓은 것이 아닌가. 정신이 번쩍 든 그가 절에 스님들에게 수소문해보니, 그가 시를 써놓고 간 뒤 얼마 못 되어 한 관리가 이곳을 지나다가 그렇게 고쳐 놓고 갔다는 것이었다. 그는 그 관리가 누군지를 백방으로 알아보았으나 결국 알 수가 없어 안타까워하며 돌아갔다. 홍만종(洪萬宗)소화시평(小華詩評)에 나오는 이야기다.

 

이민구(李敏求)가 금강산에 놀러 갔다가 시를 다음과 같이 지었다.

 

千崖駐馬身全倦 벼랑에 말 세우니 몸이 너무 피곤하여
老樹題詩字未成 늙은 나무에 시 쓰려도 글자가 되질 않네.

 

계속된 여정에 지칠 대로 지친 나그네는 아마득한 벼랑 앞에 말을 세운다. 솜처럼 노곤하다. 노수(老樹)의 껍질을 벗겨 시를 쓰려 하니 지친 몸이 영 말을 듣지 않는다. 뒤에 김상헌(金尙憲)이 이 시를 보더니 대뜸 ()’자를 ()’자로 고쳤다. 그러자 갑자기 정채(精彩)가 확 살아났다. 과연 글자가 도무지 써지질 않는다고 하는 것보다 반만 이루었다고 하니 온유돈후(溫柔敦厚)한 기상을 담게 되었다. 남용익(南龍翼)호곡시화(壺谷詩話)에 나오는 이야기다.

 

 

 

시의 의미를 제대로 전해줄 한 글자

 

시승(詩僧) 교연(皎然)에게도 한 승려가 찾아와 이 물결 제택(帝澤)을 머금고 있어, 티끌 묻은 갓끈을 씻을 곳 없네[此波涵帝澤, 無處濯塵纓].”라 한 어구(御溝)시를 보여준 일이 있었다. 교연(皎然)자가 좋지 않으니 다른 글자로 고치라고 하자, 그 승려는 불복하여 시를 가지고 떠나버렸다. 교연(皎然)은 그가 반드시 돌아올 것이라고 말하고 자기 손바닥 가운데 한 글자를 써놓았다. 얼마 뒤 승려가 허겁지겁 돌아오더니 조금 들뜬 어조로, “스님의 지적이 과연 옳습니다. ‘()’자를 ()’자로 고치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교연(皎然)이 빙그레 웃으며 손바닥을 펴 보였다. 거기에는 이미 ()’자가 써 있었다. 둘은 소리 내어 껄껄 웃었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아들 이종학(李種學)과 함께 자주 서주루(西州樓)에 올라가 제서주성루(題西州城樓)라는 시를 지었다.

 

西林石堡入雲端 서림(西林)의 성벽은 구름 끝에 들었는데
亭樹含風夏尙寒 정수(亭樹)에 바람 불어 여름인데도 아직까지 춥구나.

 

돌아오는 길에 종학(種學), “아버님의 시 가운데 ()’자는 ()’자의 온당함만 못할 듯싶습니다[大人詩中尙字, 不如亦字之穩].”라 하자, 목은(牧隱)과연 그렇구나[果是也].”하고는 아들에게 빨리 되돌아가 고치게 하였다. 아버지가 아들을 일자사(一字師)로 삼은 이야기이다. 동인시화(東人詩話)에 나온다. ‘하상한(夏尙寒)’이라 하면 여름인데도 아직까지 춥다는 뜻이니 지속적으로 추웠다는 뜻이 되고, ‘하역한(夏亦寒)’이라 하면 여름에도 또한 춥다가 되어 지속의 의미는 상당히 줄어든다.

 

亭樹含風夏亦寒 정수(亭樹)에 바람 불어 여름에도 또한 춥구나.

 

 

 

 

인용

목차

1. 한 글자를 찾아서

2. 뼈대와 힘줄

3. 한 글자의 스승

4. 일자사(一字師)의 미감원리

5. 시안(詩眼)과 티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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