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뼈대와 힘줄
시안(詩眼), 시의 핵심처
정진규의 「몸詩 26」에는 ‘자안(字眼)’이란 부제가 붙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입술이든 자궁(子宮)이든/ 사랑하는 사람아/ 나는 다른 곳으론 들지 않겠고/ 오직 네 눈으로만 들겠으며/ 세상의 모든 빗장도 그렇게 열겠다/ 술도 익으면 또록또록 눈을 뜨거니/ 달팽이의 더듬이가 바로 눈이거니/ 너와 함께 꺾은 찔레순이/ 바로 찔레의 눈이거니/ 아, 자안(字眼)이란 말씀도 있거니/ 글자에도 살아 있는 눈이 있거니/ 모든 것엔 눈이 있거니/ 나는 오직 그리로만 들겠다
정말이지 시에도 눈이 있다. 시의 빗장을 옳게 열려면 시의 눈, 즉 시안(詩眼)을 찾아내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시안(詩眼)이란 말은 소동파(蘇東坡)가 「승청순신작수운정(僧淸順新作垂雲亭)」의 5ㆍ6구에서 “천공(天功)은 향배(向背)를 다투고, 시안(詩眼)은 증손(增損)이 교묘하도다[天功爭向背, 詩眼巧增損].”이라 한 것이 최초의 용례로 되고, 범성대(范成大)도 그의 시에서 “도안(道眼)은 간데없이 시안(詩眼)만 남고, 매화가 피려 하니 눈꽃은 녹네[道眼已空詩眼在, 梅花欲動雪花稀].”라 하여 시안(詩眼)의 말을 남겼다. 이래로 시안(詩眼)은 고전 시가 창작의 감상 경험 이론을 개괄한 술어로 널리 사용되었다. 범온(范溫) 같은 이는 아예 자신의 시화를 『잠계시안(潛溪詩眼)』으로 명명하기까지 하였다. 청(淸)의 유희재(劉熙載)는 시안(詩眼)이란 시의 어느 글자가 좋고, 어느 구절이 뛰어나다는 식의 개념이 아니라 전시(全詩)의 주지(主旨)가 엉겨 있는 ‘신광소취(神光所聚)’의 지점을 말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시안(詩眼)은 글자 그대로 시의 안목이다. 한편의 시 속에서 가장 정채롭고 전신(傳神)이 회주(會注)된 지점, 일동만수(一動萬隨)의 경락이 바로 시안(詩眼)이 된다. 그러므로 시안(詩眼)은 단순한 수사적 연자연구(煉字煉句)의 문제를 넘어서는, 시가 예술의 의경미(意境美)를 형성하는 핵심처이다.
시안(詩眼)이 주는 생기
예전 장승요(張僧繇)란 이가 금릉(金陵) 안락사(安樂寺) 벽에 네 마리 용(龍)을 그렸는데 눈동자에 굳이 점을 찍으려 들지 않았다. 이유를 물으니 점을 찍으면 용(龍)은 그 즉시 하늘로 날아 올라가 버릴 것이라고 하였다. 사람들이 비웃자 그는 한 마리 용(龍)의 눈에 점을 찍었다. 그 순간 천둥 벽력이 쳐 벽을 쪼개더니 용(龍)은 구름을 타고 솟구쳐 올랐다. 점 찍지 않은 나머지 세 마리만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른바 화룡점정(畵龍點睛)의 고사이다.
일찍이 고개지(顧愷之)는 “사람의 곱고 추함은 본래 묘처(妙處)와는 무관하다. 전신사조(傳神寫照)는 바로 눈동자 가운데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눈동자로 정신이 전달된다는 ‘아도전신(阿堵傳神)’의 유명한 주장이다.
청(淸)의 오대수(吳大受)는 그의 『시벌(詩筏)』에서 또 이렇게 말한다.
대개 뛰어난 솜씨의 시인이 구절을 단련하는 것은 지팡이를 던져 용(龍)으로 변하게 하여 꿈틀거리며 솟아오르는 것과 같아서, 한 구절의 영활(靈活)함이 전편을 모두 살아 움직이게 한다. 또 글자를 단련함은 용(龍)을 그려 눈동자를 찍자 용(龍)이 번드쳐 솟구침과 같아, 한 글자의 빼어남이 전구(全句)를 모두 기이하게 할 수 있다.
시안(詩眼)이란 바로 한편 시의 눈동자에 해당하는 자리다. 시의 힘줄과 뼈대가 바로 이 한곳에 모여 있다. 이로 인해 전체 시는 아연 비동(飛動)하는 생기를 띠게 된다.
한 글자에 살고 죽는 시
왕국유(王國維)는 『인간사화(人間詞話)』에서 지적하기를, “붉은 살구 가지 끝에 봄뜻이 들레네[紅杏枝頭春意鬧].”란 구절은 ‘뇨(鬧)’ 한 글자에 경계(境界)가 온전히 드러났고, “구름을 헤치고 달이 떠오자 꽃은 그림자를 희롱하네[雲破月來花弄影].”란 구절에서는 ‘롱(弄)’ 한 글자에 경계가 온전히 드러났다고 하였다. 이 두 글자가 바로 시안(詩眼)이 된다. 시는 한 글자에 죽고 산다.
山光物態弄春暉 | 산빛과 물태(物態)가 봄볕을 희롱해도 |
莫爲輕陰便擬歸 | 흐린 날 개였다고 하지는 마오. |
縱使晴明無雨色 | 맑게 개어 빗기운은 없다고 하나 |
入雲深處亦沾衣 | 구름 속 깊은 곳엔 옷이 젖나니. |
당나라 장욱(張旭)의 「산행류객(山行留客)」이란 작품이다. 이 시의 시안(詩眼)은 제 1구 ‘롱(弄)’자에 있다. 봄날 따사로운 햇볕 아래 신록을 머금어 빛나는 산빛, 사물도 긴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켠다. 산광물태(山光物態)가 봄볕과 만나 빚어내는 발랄한 생기를 시인은 ‘롱(弄)’ 한 글자에 담아내었다. 따뜻하고 감미롭다.
한 자로 포착해낸 정채로움
또 가도(賈島)의 「봉승(逢僧)」 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天上中秋月 人間半世燈 | 하늘 위엔 중추의 둥두렷한 달 인간엔 반세(半世)를 비추는 등불. |
여기서는 ‘반(半)’자가 시안(詩眼)이 된다. 중년의 삶을 돌아보는 고단함이 환한 8월의 보름달 아래 가물거리고 있다. ‘반(半)’은 윗 구의 ‘중(中)’과 대구를 이루면서 둥두렷한 보름달과 반이 꺾인 지나온 생애가 다시 선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또 두시(杜詩) 「절구(絶句)」 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江動月移石 溪虛雲傍花 | 강물이 출렁대자 달은 바윌 옮겨가고 빈 시내에 구름은 꽃가에서 피어나네. |
여기서는 ‘이(移)’자가 시안(詩眼)이 된다. 강물은 넘실대므로 그 위에 비친 달빛도 덩달아 일렁인다. 물 위에 비죽 솟은 바위가 아예 떠내려가는 것만 같다. 이때 ‘이(移)’는 얼마나 정채로운 포착인가.
이백(李白)은 「봉황대(鳳凰臺)」 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三山半落靑天外 | 삼산(三山)은 하늘 밖에 반쯤 떨어져 있고 |
二水中分白鷺洲 | 이수(二水)는 백로주(白鷺洲)서 둘로 나뉘었도다. |
위 구는 삼산이 아스라한 푸른 하늘 저편에 높이 솟아 있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하늘 높이 솟아 있는 세 봉우리는 ‘높이 솟았다[高聳]’ 또는 ‘솟아올랐다[聳出]’등으로 표현하는 것이 상식인데, 시인은 이를 반대로 ‘반쯤 떨어졌다[半落]’고 표현하였다. 바로 여기에 표현의 묘가 응축되어 있다. 이러한 참신한 발상은 이백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할 것이다.
시안을 찾는 안목
한편 시에서 시안(詩眼)의 소재는 어디에 있는가? 『여씨동몽훈(呂氏童蒙訓)』에서 반빈로(潘邠老)는 7언시는 제5자가 울려야 하고, 5언시는 제3자가 울려야 한다고 하고, 이른바 울린다[響]는 것은 힘이 결집된 곳을 말한다고 하여 향자론(響字論)을 주장하였다.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5언시의 경우 세 번째 글자가, 7언시는 다섯 번째 글자가 안자(眼字)가 된다.
잠삼(岑參)의 “외로운 등불은 나그네 꿈을 사르고, 찬 다듬이 소리 고향 생각을 다듬질하네[孤燈然客夢, 寒杵搗鄕愁].”의 ‘연(然=燃)’자나, 허혼(許渾)의 “만리 산천이 새벽꿈을 나누니, 이웃의 노래 소리에 봄 근심을 전송하네[萬里山川分曉夢, 四後歌管送春愁]”의 ‘분(分)’자의 경우가 모두 그렇다. 5언시의 경우 2ㆍ3로 끊어 읽고, 7언시는 4ㆍ3으로 끊어 읽는데, 이때 제 3자와 제 5자는 두 의미 단위가 결합되는 경계에 놓인 자들이다. 이 글자가 두 개의 이미지를 어떻게 결합시키는가에 따라 의경이 달라진다. 이는 의미 단위뿐 아니라 절주 단위의 매듭이면서, 대부분 주어와 동사의 관계에 놓이며, 서사와 서정의 관건자(關鍵字)가 된다. 위 예시에서 ‘고등(孤燈)’과 ‘객몽(客夢)’은 별개의 어휘인데, ‘연(然=燃)’이 매개함으로써 이 둘은 충격적으로 결합된다. 나그네는 등불을 밝혀둔 채 고향 시름에 잠이 깜빡 들었고, 그가 고향 꿈을 꾸는 사이 ‘고등(孤燈)’만이 외로이 남아 그리움을 ‘태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시안(詩眼)의 위치는 언제나 일정한 것이 아니다. 시구의 어법 변화의 다양성만큼이나 유동적이다. 시안(詩眼)이 항상 제 자리가 정해져 있다면 그 무슨 눈을 찾아 헤맬 필요가 있겠는가. 맹호연(孟浩然)의 “기운은 운몽택(雲夢澤)을 푹푹 찌는데, 물결은 악양성(岳陽城)을 흔들어 대네[氣蒸雲夢澤, 波厳岳陽城].”는 둘째 자가 안자(眼字)가 된다. 두보(杜甫)의 “시절을 느끼매 꽃 보아도 눈물 나고, 이별을 한하니 새 소리에 마음 놀라네[感時花甠淚, 恨別鳥驚心].”에서처럼 넷째 자가 안자(眼字)가 되기도 한다.
인용
1. 한 글자를 찾아서
3. 한 글자의 스승
5. 시안(詩眼)과 티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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