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궁사(宮詞), 한숨으로 짠 역사
寂寂花時閉院門 | 쓸쓸히 꽃이 필 제 원문(院門)을 닫아 걸고 |
美人相拄立瓊軒 | 미인(美人)들 나란히 경헌(瓊軒)에 기대 섰네. |
含情欲說宮中事 | 정 머금어 궁중 일을 말하고 싶지만은 |
鸚鵡前頭不敢言 | 앵무새 앞인지라 감히 말을 못하네. |
주경여(朱慶餘)의 「궁사(宮詞)」이다. 꽃이 피는데도 ‘적적(寂寂)’타 하여 이미 그녀가 군왕(君王)의 총애를 잃은 지 오래되었음을 보였다. 난간에 서 있는 것이 여럿이니 총애를 잃은 궁녀는 혼자만이 아닌 것이다. 아니 그녀들은 여태 총애를 한 번도 받아 보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청춘의 일렁이는 마음은 꽃과 마주 하여 원망의 넋두리를 한 없이 풀어 놓고 싶었다. 그러나 앵무새 앞인지라 두려워 감히 말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절묘하다. 글자마다 원망(怨望)이 서리어 있다.
寥落古行宮 宮花寂寞紅 | 퇴락한 옛 행궁 궁화(宮花)만 적막히 붉게 피었네. |
白頭宮女在 閑坐說玄宗 | 흰 머리의 궁녀가 한가로이 앉아 현종(玄宗) 때를 말하네. |
원진(元稹)의 「행궁(行宮)」이란 작품이다. 궁녀의 머리는 이미 하얗게 세었는데 궁화(宮花)는 올봄도 붉게 피었다. 행궁의 번화함을 더 이상 찾을 수 없듯이 그녀의 아름다움도 스러진 지 오래다. 적막한 것은 꽃이 아니다. 그녀의 마음이다. 그녀는 무료하게 앉아서 희미한 기억 속의 과거를 회상하고 있을 뿐이다. 시인은 흰머리의 궁녀가 ‘있다’고 하여, 행궁의 번화함은 이제 어디에도 ‘없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제양(齊梁) 시기 이래로 궁녀의 생활과 정감을 제재로 한 궁사(宮詞)가 많이 창작되었다. 주된 내용은 군왕(君王)에게서 실총(失寵)한 후궁들의 원망과 하소연이다. 이래로 후대에 이르기까지 궁녀(宮女)들의 원한(怨恨)을 노래한 작품들이 계속 창작되었다.
당나라 때 왕건(王建)은 무려 1백수에 달하는 「궁사(宮詞)」를 지었는데, 그의 작품은 고사(古事)에 가탁하지 않고 일반에게 신비시되던 황궁(皇宮)의 일을 세세히 관찰하고 당시 후궁들의 실생활을 사실대로 적어 당시 사람들에게 큰 환영을 받았다. 그의 「궁사(宮詞)」 연작은 당시 추밀사(樞密使) 왕수징(王守澄)에게서 직접 들은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그는 왕건(王建)과는 한 집안 사람으로 호형호제 하는 사이였다. 뒤에 왕건(王建)이 자신의 잘못을 풍자하자 왕수징(王守澄)은 노하여 “아우가 지은 「궁사(宮詞)」는 궁궐 깊은 곳의 이야기인데 어떻게 이를 알았더란 말인가? 임금께 보고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자 왕건(王建)은 이틀 뒤 사죄하는 시를 올렸는데, 그 시의 끝 구절에 “동성(同姓)이 직접 말해주지 않았다면, 외인(外人)이 구중(九重)의 일 어찌 알았으리오[不是姓同親說向, 九重爭得外人知].”라 하였으므로, 왕수징(王守澄)은 자신이 연루될까 두려워 이 일을 덮어두고 말았다. 어쨌든 왕건(王建)의 「궁사(宮詞)」는 사실에 바탕을 두었으므로 뒷날 당대 궁중의 풍속사를 연구하는 데는 희귀한 사료적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허균(許筠)도 1610년(광해 2)에 벼슬에서 물러나 수표교에 있던 종의 집에서 요양하던 중, 종의 이모로 그 집에 얹혀 살던 76세의 은퇴한 궁인(宮人)을 만나 그녀에게서 궁중의 일을 이야기 듣고 마침내 왕건(王建)의 일을 본떠 「궁사(宮詞)」 100수를 남겼다. 그녀는 선조대왕(宣祖大王)과 의인왕후(懿仁王后)의 성덕과 궁내(宮內)의 절목(節目) 및 여러 고사들을 자세하게 이야기해주었고, 허균(許筠)은 이를 시로 남겨 마침내 일대(一代)의 시사(詩史)를 이루었다. 이 가운데 세 수를 감상해 보자.
驅儺聲徹寢門深 | 나례(驅儺) 소리 침문 깊이 울려 퍼지고 |
鶴舞鷄毬鬧禁林 | 학무(鶴舞)와 포구락(抛毬樂)에 대궐이 떠나가네. |
五色處容齊拂袖 | 다섯 빛깔 처용(處容)님은 소매를 떨치우고 |
妓行爭唱鳳凰吟 | 여기(女妓)는 앞다투어 봉황음(鳳凰吟)을 노래하네. |
세모(歲暮)에 역귀(疫鬼)를 몰아내는 나례(儺禮) 광경을 묘사한 작품이다. 학무(鶴舞)에 포구락(抛毬樂)을 얹어 춤추고 노래하면, 뒤이어 오방처용(五方處容)이 색색의 옷을 입고 나와 처용무(處容舞)를 춘다. 다시 긴 춤사위가 한바탕 흐드러지게 휘몰아친 후 오색처용(五色處容)이 동서남북 중앙으로 갈라 자리를 잡으면 음악이 점차 빨라지면서 “산하천리국(山河千里國)에”로 시작되는 봉황음(鳳凰吟) 가락이 울려 퍼지고 여기(女妓)는 낭랑한 청으로 노래를 부른다. 대개 나례(儺禮)의 의식절차나 의궤(儀軌) 및 정재(呈才)에 대해서는 이미 『악학궤범(樂學軌範)』에 상세하다. 위 시와 궤범(軌範)을 견주어 보면 조금의 차이도 발견되지 않는다.
紅巾假面着牛形 | 붉은 수건 가면에는 소 모양을 붙여놓고 |
鑼鼓喧闐茢掃庭 | 징북 소리 꽝꽝대며 갈대로 뜰을 쓰네. |
萬戶一時驅鬼出 | 모든 집이 한꺼번에 귀신 몰아 내쫓고는 |
天王仙女帖門屛 | 천왕(天王)과 선녀(仙女) 얼굴 대문간에 붙여둔다. |
이어지는 나례(儺禮)의 민속을 노래한 한 수이다. 붉은 가면에다 소 형상을 그려 붙이고 징과 북을 두들기며, 귀신을 쫓는데 영험이 있다는 복숭아 나뭇가지와 갈대 이삭으로 뜨락을 쓸어 집에서 역신(疫神)을 몰아내는 의식을 치른다. 그리고는 대문간에 천왕(天王)과 선녀(仙女)의 얼굴을 그려 붙여 놓고 역귀(疫鬼)가 다시는 얼씬도 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당시 궁궐과 여항에까지 미친 성대한 나례(儺禮)의 광경을 노래한 것인데, 오늘날에 보면 민속학 방면의 자료적 가치도 적지 않다.
銀臺投進疊封箋 | 은대(銀臺)에서 보고 올린 봉전(封箋)이 쌓였으니 |
知是官僚殿最年 | 벼슬아치 한 해 성적 고과(考課)함을 알겠구나. |
直待上前開坼日 | 임금께서 열어 보는 그 날을 기다려서 |
解書宮女近床邊 | 글자 아는 궁녀가 어상(御床) 가까이 나아가네. |
당시 인사고과의 제도를 엿볼 수 있는 시이다. 해마다 6월 15일과 12월 15일이 되면 각 지방의 관찰사는 산하 수령의 근무성적을 평정 고과하여 중앙에 보고한다. 이때 가장 좋은 성적이 ‘최(最)’이고 가장 낮은 성적이 ‘전(殿)’이 된다. 이 전최(殿最)는 경관(京官)에게도 시행하였다. 각처에서 평정한 전최지(殿最紙)는 밀봉되어 승정원을 거쳐 임금에게 주달되었다. 이 시를 보면 아마도 지방에서 고과한 서류가 올라오면 이를 개봉하지 않고 차곡차곡 쌓아 임금에게 올리고, 임금은 그 많은 서류를 일일이 볼 수 없었으므로 글자를 아는 궁녀가 어상(御床)에 나아가 이를 읽어 재가를 여쭈었던 듯하다. 허균(許筠)이 이 시를 지을 당시에야 미처 생각지 못하였겠지만, 그 시대의 충실한 기록은 이렇듯 뒷날 그 시대를 들여다보는 한 통로가 된다. 시가 세교(世敎)에 보탬이 된다 함은 그 내용의 감계(鑑戒)를 두고 이르는 말일 테지만, 이렇듯 시는 한 시대를 증언하는 비망록이 되기도 한다.
인용
1. 할아버지와 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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