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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미학산책 - 23. 시와 역사: 시사와 사시 본문

책/한시(漢詩)

한시미학산책 - 23. 시와 역사: 시사와 사시

건방진방랑자 2021. 12. 8. 0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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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와 역사(歷史): 시사(詩史)와 사시(史詩)

 

 

1. 할아버지와 손자

 

 

白犬前行黃犬隨 흰둥이 앞서 가고 누렁이 따라가는
野田草際塚纍纍 들밭 풀가에는 무덤들 늘어섰네.
老翁祭罷田間道 제사 마친 늙은이는 두둑 길에서
日暮醉歸扶小兒 손주의 부축 받고 취하여 돌아오네.

 

이달(李達)제총요(祭塚謠)란 작품이다. 영화의 한 장면 같은 광경이다. 흰둥이가 컹컹 짖으며 저만치 앞서 가자 누렁이도 뒤질세라 뒤쫓아 간다. 잠시 두 놈의 장난질에 시선이 집중되는 동안 카메라는 그 뒤에 즐비하게 늘어선 무덤으로 초점을 당긴다. 다시 무덤들이 원경으로 처리되면서 개 짖는 소리 사이로 두 사람이 나타난다. 해질 무렵의 양광(陽光)이 빗기는 가운데 술에 까부룩 취한 할아버지와 그 옆에서 할아버지를 부축하고 있는 손주의 모습이다.

 

슬픔을 느끼기에는 너무 목가적이고 평화스런 광경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할아버지와 손주는 누구의 무덤에 제사를 지내러 갔던 것일까. 할아버지는 왜 저물도록 무덤가를 맴돌다가 급기야 술에 취하고 말았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 그림 속에는 있어야 할 사람이 없다. 소년의 아버지이다. 시인은 짐짓 시치미를 뚝 떼고 있지만, 소년의 아버지야말로 바로 두 사람이 제사 지낸 무덤의 주인공이었던 것이다. 2구에서 들밭 풀가에 즐비한 무덤이라 했으니 예전부터 있던 것이 아니라 한꺼번에 들어선 무덤임을 알 수 있겠다. 산도 아닌 밭두둑 가에 울멍줄멍 돋아난 새 무덤들 가운데 소년의 아버지는 묻혀 있는 것이다. 아들의 무덤에 제사지내고 돌아오는 아버지의 심정, 할아버지가 왜 저러시나 싶어 말똥말똥 올려다보는 어린 손주의 천진한 눈빛. 오랫동안 잊히지 않는 슬픈 영상이다.

 

필자가 이 작품을 임진왜란(壬辰倭亂) 직후에 쓰여진 것으로 확신하는 것은 대개 이러한 이유에서다. 7년간 강토를 휩쓸고 간 전쟁의 참상을 시인은 목청 높여 성토하는 대신 한 폭 그림으로 우리에게 제시한 것이다. 이때 시는 폐허의 심성을 따뜻이 어루만져 주는 마법의 치유약이 된다. 필자는 이 시를 읽을 때면 언제나 광주항쟁 당시 자료 사진 속에서 해맑은 눈으로 죽은 아버지의 사진을 들고 있던 소년의 표정이 떠오르곤 한다.

 

夕投孤館抱鞍眠 저물녘 외론 여관 안장 안고 잠을 자니
破屋疎簷仰見天 부서진 집 성근 처마 하늘이 올려 뵈네.
聽得廚人連曉語 부엌에서 새벽까지 두런두런 거리는 말
艱難各說壬辰年 임진년의 괴롭던 일 저마다 얘기하네.

 

권필(權韠)숙대진원(宿大津院)이란 작품이다. 파리한 말을 끌고 먼 길을 가던 나그네는 저물어 지친 몸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말이 여관이지 집도 거지반 부서져, 고개를 들어 보면 처마 사이로 하늘이 보인다. 침구도 없이 말안장을 끌어안고 잠을 청하는 밤, 나그네는 아까부터 부엌에서 두런거리는 소리에 정신이 쏠려 그만 새벽까지 잠을 설치고 말았다. 경쟁이나 하듯 임진년 당시 피난길의 이야기로 밤을 새운 부엌의 사연은 젖은 솜방망이 같이 지친 시인의 잠을 달아나게 할 만큼 뼈저린 체험이었던 것이다. 이 시를 읽노라면, 오랜만에 친지들이 모여 이런저런 이야기로 밤을 새우다가, 종장에는 6.25 사변 당시의 이야기로 화제를 삼곤 하던 일이 연상되는 것은 왜일까?

 

 

四月十五日 平明家家哭 4월이라 보름날 이른 아침 집집마다 곡하는 소리.
天地變簫瑟 凄風振林木 천지는 변하여 쓸쓸해지고 싸늘한 바람은 숲을 흔든다.
驚怪問老吏 哭聲何慘怛 깜짝 놀라 늙은 아전에게 물었네. “곡소리 어찌 이리 구슬프더뇨?”
壬辰海賊至 是日城陷沒 임진년에 바다 도적 몰려와서는 바로 오늘 성이 함락되었답니다.
惟時宋使君 堅壁守忠節 이때 다만 송사또께서 성벽을 굳게 하여 충절 지켰죠.
闔境驅入城 同時化爲血 백성들 성 안으로 몰려 들어와 한꺼번에 피바다를 이루었지요.
投身積屍底 千百遺一二 쌓인 시체 밑에다 몸을 던져서 천백 명에 한 둘만이 살아남았죠.
所以逢是日 設奠哭其死 그래서 해마다 이날만 되면 상을 차려 죽은 이를 곡한답니다.
父或哭其子 子或哭其父 아비가 제 자식을 곡을 하구요 아들이 제 아비를 곡을 하지요.
祖或哭其孫 孫或哭其祖 할아비가 손주를 곡을 하구요 손주가 할아비의 곡을 합니다.
亦有母哭女 亦有女哭母 어미가 제 딸을 곡하기도 하고 딸이 제 어미를 곡하기도 하지요.
亦有婦哭夫 亦有夫哭婦 지어미가 지아비를 곡하는가 하면 지아비가 지어미를 곡한답니다.
兄弟與姊妹 有生皆哭之 형제나 자매를 따질 것 없이 살아 있는 이들은 모두 곡을 합지요.”
蹙額聽未終 涕泗忽交頤 이맛살 찡그리며 듣다가 말고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리네.
吏乃前致詞 有哭猶未悲 아전이 나서며 아뢰는 말이 곡할 이나 있다면 덜 슬픕지요.
幾多白刃下 擧族無哭者 칼날 아래 온 집안이 죄다 죽어서 곡할 이도 없는 집이 얼마인뎁쇼.”

 

이안눌(李安訥)사월십오일(四月十五日)이다. 415일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쳐들어 온 왜군을 맞아 싸우다 동래성이 함락된 날이다. 시산혈해(屍山血海)를 이루었던 당시의 전장에서 구사일생 살아남은 사람들은 해마다 이날만 되면 끔찍했던 만행의 그날이 어제같이 되살아나 주먹을 부르쥔다. 전란 후 동래부사로 부임했던 그는 때 아닌 통곡의 아우성을 목도하고 붓을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반복되는 비슷한 어구의 중첩 속에서 정서는 점차 고조되어 마침내 천지를 소슬케 하고 숲조차 떨게 하는 비분강개의 적개심을 자아낸다. 그나마 곡할 이라도 있는 집은 다행이라는 노리(老吏)의 넋두리는 당시 전장의 참혹상을 바로 눈앞의 일처럼 그려 보이고 있다.

 

권벽(權擘)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73세의 노구를 이끌고 피난길에 오르는데, 고통스런 피난의 와중에서도 시고(詩藁)를 담은 상자만은 억척스레 등에 지고 내려놓질 않았다. 보다 못한 아내가 이렇듯 도망 다니며 죽기에도 겨를하지 못하는데 그깟 시 상자는 어디에다 쓰려느냐고 타박해도 그는 결코 시 원고 뭉치가 든 상자만은 버리지 않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같은 노령의 피난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무려 128수에 달하는 작품을 마치 일기를 쓰듯이 남겨, 당시 피난길의 고초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전황을 세밀하게 묘사 전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군도(群盜)가 횡행하는 속을 전전하다가 막히면 되돌아오고, 피난길의 박절한 인심과 산에 올라 적을 피하던 일, 조복을 팔아 쌀을 산 일이며, 저마다 달리 말하는 뜬소문에 일희일비하던 일, 평양성의 화전(和戰) 소식에 낙담하던 일, 피난민을 보고는 지레 겁을 먹는 시골 늙은이의 표정 등등, 이들 시는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한양성을 빠져나간 피난민들의 삶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이럴 때 시는 당당히 역사 기록에 버금가는 가치를 지닌다.

 

 

 

 

2. 시로 쓴 역사, 시사(詩史)

 

 

시는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다. 시의 거울 속에는 그 시대 사람들의 원망(願望)과 애환(哀歡)이 그대로 떠오른다. 한 편의 시는 방대한 사료로 재구성한 어떤 역사보다도 더 생생하다. 사람들은 이를 일러 시사(詩史)라 한다. 맹계(孟棨)본사시(本事詩)에서 두보(杜甫)의 시를 논하면서, “두보가 안록산의 난리를 만나 농촉(隴蜀) 지방을 떠돌며 시에다 이때 일을 모두 진술하였다. 본 바를 미루어 숨겨진 것까지 이르러 거의 남김없이 서술하였으니 당시에 이를 일러 시사(詩史)라 하였다고 언급한 것이 시사(詩史)란 말의 첫 용례이다. 간난(艱難)의 피난 시절 두보는 기주(夔州) 지방까지 떠돌며 많은 시를 남겼는데, 뒷사람들은 그곳에 시사당(詩史堂)을 세워 두보의 화상을 걸어 놓고 그의 시정신을 기리고 있다.

 

시사(詩史)란 말은 시로 쓴 역사란 뜻이니, 그 본래 의미는 시인이 지나간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해서 시를 썼다는 말이 아니다. 앞서 본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의 시처럼 시인이 자신이 견문(見聞)한 당시의 일을 시로 기록해둔 것이 뒷날 사료적 가치를 지니게 됨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 즉 시를 읽으면 그 시대가 눈앞의 일처럼 낱낱이 펼쳐지니 그 시대가 어떠했는지를 알려면 굳이 역사책을 뒤질 것 없이 한편의 시를 읽는 것이 더 나은 것이다.

 

전란의 참상을 노래한 두보(杜甫)의 시사(詩史)로는 삼리(三吏)ㆍ삼별시(三別詩)를 압권으로 꼽는다. 앞서 본 이안눌(李安訥)사월십오일(四月十五日)도 사실은 이 작품의 분위기를 빌려왔다. 이 가운데 석호리(石壕吏)한 수를 감상해 보자.

 

暮投石壕村 有吏夜捉人 저물어 석호촌(石壕村)에 묵어 자는데 한밤에도 관리는 사람을 붙잡누나.
老翁踰牆走 老婦出門看 늙은이 담을 넘어 도망을 가고 늙은 아낙 문을 나와 내어다 보네.
吏呼一何怒 婦啼一何苦 관리의 호령은 어찌 저리 우악하며 아낙의 울부짖음 어찌 저리 괴로운가.
聽婦前致詞 三男鄴城戍 아낙이 나서면서 아뢰는 말이 "세 아들 놈 업성(鄴城)에 수자리 나가
一男附書至 二男新戰死 한 아들이 편지를 부쳐 왔는데 두 아들 새 싸움서 죽었다네요.
存者且偸生 死者長已矣 산 놈은 그럭저럭 산다하지만 죽은 놈은 그걸로 그뿐이지요.
室中更無人 惟有乳下孫 집안엔 사내라곤 아무도 없고 젖먹이 손주 새끼 하나 있지요.
孫有母未去 出入無完裙 손주가 있으니 에민 못 가고 가려 해도 앞가릴 치마조차 없답니다 .
老嫗力雖衰 請從吏夜歸 늙은 몸 힘은 비록 쇠하였지만 나으리 따라서 밤에 떠나가,
急應河陽役 猶得備晨炊 하양(河陽) 땅 수자리에 급히 응하면. 새벽밥은 지을 수 있겠습지요".
夜久語聲絶 如聞泣幽咽 밤 깊어 말소리도 끊기더니만 흐느껴 우는 소리 들은 듯했네.
天明登前途 獨與老翁別 이튿날 앞길을 오르려는데 할아범 혼자서 작별을 하네.

 

천 년 전의 일인데도 흡사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 생생하다. 느닷없이 들이닥친 관리의 서슬 앞에 허둥지둥 늙은 할아범은 뒷담을 넘어 달아나고, 시간을 벌던 할멈은 눈치를 보며 대문을 연다. 이미 그녀는 아들 셋을 모두 전쟁터로 떠나보낸 처지다. 그나마도 둘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도 관가(官家)의 푸른 서슬은 늙은 할아범까지 잡아가야만 직성이 풀릴 기세다. 아들 둘 죽은 것은 하나도 억울치 않다고 너스레를 떨던 할멈은 며느리와 손주를 지키기 위해 아예 자신이 수자리에 나갈 것을 자청하고 나선다. 늙은 몸이지만 병정들을 위해 새벽밥이라도 짓겠다는 것이다. 이윽고 말소리도 잦아들고 시인은 어디선가 목메어 우는 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다. 아침에 다시 피난길에 오르는 그를 늙은이 혼자 나와 마중을 한다. 설마 했는데 관리는 늙은 할멈마저도 그예 끌고 가고 말았던 것이다.

 

 

흔히 조선후기 삼정(三政)의 문란을 말할 때 백골징포(白骨徵布)니 황구첨정(黃口簽丁)을 말한다. 이러한 폐단이 낳은 비극을 노래하고 있는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애절양(哀絶陽)을 감상해 보자.

 

蘆田少婦哭聲長 갈밭 마을 젊은 아낙 곡소리 구슬프다
哭向縣門號穹蒼 현문(縣門) 향해 울부짖다 하늘에 호소하네.
夫征不復尙可有 구실 면제 안해줌은 있을 수 있다지만
自古未聞男絶陽 남근(男根)을 잘랐단 말 듣도 보도 못하였소.
舅喪已縞兒未澡 시아버진 세상 뜨고 아이는 갓난앤데
三代名簽在軍保 삼대의 이름이 군적에 실렸구나.
薄言往愬虎守閽 억울함 하소차니 문지기는 범과 같고
里正咆哮牛去皁 이정(里正)은 고래고래 소마저 끌고 갔네.
磨刀入房血滿席 칼 갈아 뛰어들자 피가 온통 낭자터니
自恨生兒遭窘厄 아들 낳아 곤경 당함 제 혼자 한탄한다.
蠶室淫刑豈有辜 잠실(蠶室)의 궁형(宮刑)이 무슨 잘못 있었으랴
閩囝去勢良亦慽 () 땅의 자식 거세 진실로 슬프고나.
生生之理天所予 자식 낳고 사는 이치 하늘이 준 바이니
乾道成男坤道女 건도(乾道)는 아들되고 곤도(坤道)는 딸이 되네.
騸馬豶豕猶云悲 말 돼지 거세함도 가엽다 말하는데
況乃生民恩繼序 하물며 백성이 뒤이을 일 생각함이랴.
豪家終歲奏管弦 부잣집은 일 년 내내 풍악을 울리면서
粒米寸帛無所捐 쌀 한 톨 베 한 치도 바치지 않는구나.
均吾赤子何厚薄 다 같은 백성인데 어찌 이리 불공평한가
客窓重誦鳲鳩篇 객창에서 자꾸만 시구편(鳲鳩篇) 읊는다네.

 

다산이 강진 유배시에 직접 견문한 사실을 시로 쓴 것이다. 노전(蘆田) 사는 백성이 아들을 낳은 지 사흘 만에 군적(軍籍)에 올라 이정(里正)이 소를 빼앗아 가자, 방에 뛰어 들어가 내가 이것 때문에 곤액을 당한다며 칼을 뽑아 자기의 남근(男根)을 스스로 잘라버렸다. 그 아내가 남근(男根)을 가지고 관가에 가니 피가 아직 뚝뚝 떨어지는데 아무리 하소연하려 해도 문지기가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버렸다. 그나마 이미 세상을 떠난 시아버지의 군포(軍布)도 꼬박꼬박 내고 있던 터였다.

 

백골징포(白骨徵布)란 무엇이던가. 이를테면 사람이 죽어 동사무소에 가서 사망신고를 하면, 동사무소 직원이 아예 접수를 받아주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는 계속 죽은 사람 앞으로 세금 고지서를 날려 보낸다. 황구첨정(黃口簽丁)이란 무엇이냐. 갓 태어난 어린아이의 출생신고를 하고 나면 그 다음날로 징집통지서가 날아드는 것이다. 눈도 뜨지 못한 핏덩이더러 빨리 입대하든지 군포(軍布)를 내라고 야단을 부린다. 정작 장정은 하나뿐인데 돌아가신 아버지와 난 지 사흘 밖에 안 된 핏덩이의 군포(軍布) 독촉 끝에 이정(里正)은 목숨보다 중한 소까지 끌고 가버렸다. 눈이 뒤집힌 가장은 칼을 뽑아 이정(里正)을 찌르지도 못하고 애꿎은 자신의 양근(陽根)을 자르고 말았던 것이다.

목민심서(牧民心書)는 이렇게 말한다.

 

 

심하게는 배가 불룩한 것만 보고도 이름을 짓고, 여자를 남자로 바꾸기도 하며, 또 그보다 심한 것은 강아지 이름을 혹 군안(軍案)에 기록하니, 이는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정말 개이며, 절굿공이의 이름이 혹 관첩(官帖)에 나오니 이는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정말 절굿공이이다.

甚則指腹而造名, 換女而爲男. 又其甚者, 狗兒之名, 或載軍案, 非是人名, 所指者眞狗也; 杵臼之名, 或出官帖, 非是人名, 所指者眞杵也.

 

 

웃어야 할 일인가. 울어야 할 일인가. 어쨌건 삼정(三政)의 문란을 말할 때, 당시 이를 증명하는 어떤 통계 수치보다도 우리는 이 애절양(哀絶陽)한 편을 통해 그 시대 백성의 절규를 실감으로 듣게 된다. 시는 이렇게 해서 역사가 된다.

 

 

 

 

3. 변새(邊塞)의 풍광(風光)

 

 

막막한 모래벌판은 끝간 데 없고 아득히 사람도 보이질 않는다. 황하의 물은 감돌아 흐르고 뭇 산들은 어지러이 솟아 있다. 어둑어둑 참담한데 바람은 석양에 구슬피 불어온다. 쑥대는 꺾어지고 풀은 말라 오싹하기 마치 서리 아침 같구나. 새도 날뿐 내려오지 아니하고 짐승도 내달리느라 무리를 잃는다. 정장(亭長)은 내게 말한다. “이곳은 옛 싸움터입지요. 일찍이 삼군(三軍)이 전멸 당했답니다. 이따금씩 귀곡성(鬼哭聲)이 날이 흐리면 들려옵니다.” 슬프도다! ()나라 때였던가? ()나라 때였던가? 아니면 근대(近代)였더란 말인가?

浩浩乎平沙無垠, 敻不見人. 河水縈帶, 群山糾紛. 黯兮慘悴, 風悲日曛, 蓬斷草枯, 凜若霜晨. 鳥飛不下, 獸挺亡群. 亭長告余曰: “此古戰場也, 嘗覆三軍, 往往鬼哭, 天陰則聞.” 傷心哉! 秦歟? 漢歟? 將近代歟?

 

 

당나라 이화(李華)조고전장문(弔古戰場文)의 서두이다. 모래 바람 부는 옛 전장(戰場)의 황량함이 뼈에 저밀 듯 생생한 명문이다. 다시 싸움의 광경을 상상하는 한 대목을 보자.

 

 

지독한 음기(陰氣)가 엉기어 막히는 겨울이 되면 청해(靑海)의 추위는 살을 에운다. 쌓인 눈은 정강이를 덮고, 수염에는 얼음이 꽁꽁 언다. 사나운 새도 둥지를 떠나지 않고 정마(征馬) 또한 머뭇거린다. 솜옷도 따뜻치 않고 발가락은 끊어질듯 살갗은 찢어진다. 이같이 괴로운 추위는 오랑캐의 기를 돋우워, 살기도 등등하게 자르고 베어 죽이며, 수송 수레를 약탈하고 군사들을 공격하였다. 도위(都尉)는 항복하고 장군도 죽임을 당하였다. 시체는 큰 항구의 언덕을 가득 메웠고 피는 장성굴(長城窟)에 가득 찼도다. 귀한 이나 천한 이나 함께 마른 해골이 되었으니 어찌 이루 말로 다하랴!

至若窮陰凝閉, 凜冽海隅, 積雪沒脛, 堅氷在鬚. 鷙鳥休巢, 征馬踟躕, 繒纊無溫, 墮指裂膚. 當此苦寒, 天假强胡, 憑陵殺氣, 以相翦屠. 徑截輜重, 橫攻士卒, 都尉新降, 將軍復沒. 屍塡巨港之岸, 血滿長城之窟, 無貴無賤, 同爲枯骨, 可勝言哉.

 

 

한나라 이래로 중국은 늘 북방 흉노와의 전쟁에 시달려왔다. 전쟁의 끝에 남는 것은 무엇이던가? 승자도 패자도 없는 소모적인 싸움 속에 애꿎은 청춘들만 사막에 뼈를 묻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아래 당시(唐詩) 중에는 멀리 변방의 풍정을 노래한 변새시(邊塞詩)가 유난히 많다. 이들 시는 그 풍부한 함축에서뿐 아니라 당대 변방의 고통과 삶의 괴로움을 실감의 언어로 노래하고 있다.

 

車轔轔 馬蕭蕭 수레는 삐걱삐걱, 말은 힝힝 우는데
行人弓箭各在腰 출정하는 군인들 허리에 활을 찼네.
耶孃妻子走相送 부모 처자 달려나와 전송하느라
塵埃不見咸陽橋 자옥한 먼지 일어 함양교(咸陽橋)도 뵈지 않네.
牽衣頓足攔道哭 옷 붙들고 넘어지다 길을 막고 통곡하니
哭聲直上干雲霄 통곡소리 곧장 올라 하늘에 사무친다.
道旁過者問行人 길가를 지나던 이 군인에게 물어보니
行人但云點行頻 군인은 다만 징집 잦다 말을 하네.
或從十五北防河 열다섯에 북쪽에서 황하를 지키다가
便至四十西營田 마흔에야 서쪽에서 둔전을 개간한다.
去時里正與裹頭 떠날 때 리정(里正)이 머리에 수건 매주더니
歸來頭白還戌邊 흰 머리로 돌아와선 또 다시 변방 가네.
邊亭流血成海水 변방에 흐르는 피 바닷물을 이루건만
武皇開邊意未已 황제의 변방 개척 성에 차지 않으시네.
君不聞漢家山東二百州 그대 듣지 못하였나. 산동의 이백 고을
千村萬落生荊杞 마을마다 논밭들이 가시밭이 되었단 말.
縱有健婦把鋤犁 건강한 아낙 있어 밭갈고 김매어도
禾生隴畝無東西 고랑마다 곡식들은 들쭉날쭉 하는구나.
況復秦兵耐苦戰 하물며 진() 땅 병사 괴론 싸움 참으면서
被驅不異犬與鷄 내몰림 당하느니 개와 닭 진배없다.
長者雖有問 役夫敢申恨 윗사람이 비록 물어보긴 한다지만 졸병 주제 어찌 감히 원한을 아뢰리오.
且如今年冬 未休關西卒 더군다나 금년엔 겨울이 오더라도 관서(關西)의 병졸은 쉴 틈이 없다 하네.
縣官急索租 租稅從何出 고을 관리 황급히 세금을 재촉하나 세금이 어디에서 나올 데 있단 말가.
信知生男惡 反是生女好 이제야 알겠구나 아들 낳음 괴로웁고 도리어 딸 낳음이 좋다는 말을.
生女猶得嫁比隣 딸 낳으면 이웃에다 시집을 보내지만
生男埋沒隨百草 아들 낳으면 잡초 속에 묻히고 마는 것을.
君不見靑海頭 그대 보지 못했나.
古來白骨無人收 옛날부터 흰 뼈다귀 거둔 이 없는 것을.
新鬼煩寃舊鬼哭 새 귀신은 원망하고 옛 귀신은 통곡하니
天陰雨濕聲啾啾 흐린 날 비 젖으면 그 소리 처량타오.

 

두보(杜甫)병거행(兵車行)이다. 이 시를 읽어 보면 왜 두보의 시를 두고 역대로 시사(詩史)의 일컬음이 있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기약 없는 전장터로 끌려 나가는 병정들이 함양교(咸陽橋)에서 가족들과 헤어지는 처절한 광경의 묘사로 서두를 열었다. 곡성(哭聲)이 진동하고 자옥한 먼지와 출발을 알리는 고함소리, 수레는 삐걱거리고 말도 힝힝거린다. 7구에서 떠나는 군인 하날 붙들고 물어보는 시인의 객쩍은 참견은 징집이 너무 잦아요.”라는 무뚝뚝한 대답을 끌어내기 위한 방편일 뿐이다. 그들이 가는 곳은 어디인가. 장강(長江)과 황하(黃河)가 발원하는 곳, 곤륜산맥이 앞을 턱 가로 막고 있는 모래 먼지 이는 몽고의 땅이다. 한번 가면 운이 좋아 2, 30년 만에 돌아올 수 있고, 그나마 흰 머리로 돌아와도 다시 다른 곳으로 끌려간다. 일손이 없고 보니 민생(民生)은 도탄에 빠지고, 전쟁 비용 때문에 세금은 더욱 가혹해지는 악순환 속에 청해(靑海)의 가없는 호숫가에는 거두는 손길 없는 해골만이 늘어간다. 이 누구를 위한 것인가.

 

 

秋塞雪初下 將軍遠出師 가을 변방 첫눈이 하마 내리고 장군은 멀리로 군대를 출정한다.
分營長記火 放馬不收旗 병영을 나눔은 횃불로 표시하고 말은 풀어 깃발도 거두질 않네.
月冷邊帳濕 沙昏夜探遲 싸늘한 달빛에 장막은 축축한데 사막은 깜깜하여 밤 정찰 더뎌지네.
征人皆白首 誰見滅胡時 군사는 모두 흰 머리이니 오랑캐 멸할 날을 볼 사람 그 누구랴.

 

장적(張籍)출새(出塞)이다. 가을인데도 변방엔 벌써 첫눈이 내린다. 오랑캐와의 전투를 위해 장군은 한밤중에 출정을 서두른다. 야습에 나선 길이다. 소리를 죽이려고 말은 풀어두고 깊은 밤이라 깃발도 챙기질 않았다. 싸늘한 달빛에 천막엔 서리가 내려 축축하고, 깜깜한 사막 길은 지척을 분간하기 어렵다. 78구에서 느닷없이 군사들이 모두 흰머리임을 말하였고, 끝도 없는 이 전쟁에서 오랑캐를 멸하는 날을 볼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 하여 자조의 심경을 드러내었다. 한창 젊은 나이에 이곳에 끌려온 병사들은 머리가 다 세도록 여태도 고향에 돌아가질 못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그들은 이 매서운 바람 먼지 날리는 모래밭에 해골을 누이고 말 것이다. 그때에도 또 오늘과 같은 야습은 되풀이 되리라.

 

誓掃匈奴不顧身 흉노 무찌르겠단 맹세 제 몸도 돌보잖코
五千貂錦喪胡塵 오천의 용사(勇士)들은 오랑캐 땅에 묻히었네.
可憐無定河邊骨 슬프다 무정하(無定河) 물가의 해골들은
猶是春閨夢裏人 봄날 규방 꿈속에 그리는 사람일레.

 

진도(陳陶)농서행(隴西行)이란 작품이다. 농서(隴西)는 지금의 감숙성(甘肅省)에 위치한 곳이다. 목숨을 초개와 같이 여긴 용사들의 용맹한 기상을 먼저 보인 뒤, 잇대어 무정하(無定河) 강가를 뒹굴고 있는 해골들을 말함으로써 이 전쟁의 허망함을 보였다. 더욱이 강가에 뒹구는 해골의 아내들은 여태도 남편이 돌아올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매일 밤 꿈속에서 만나고 있다 하여, 읽는 이로 하여금 저도 모르게 비장한 격정에 젖어들게 한다. 변새시(邊塞詩)에는 당시 전쟁터의 스산한 분위기와 끝없이 계속되는 정복 전쟁에 지친 고통의 목소리가 천년의 세월을 뛰어 넘어 생생하게 살아있다. 그래서 시는 그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4. 궁사(宮詞), 한숨으로 짠 역사

 

 

寂寂花時閉院門 쓸쓸히 꽃이 필 제 원문(院門)을 닫아 걸고
美人相拄立瓊軒 미인(美人)들 나란히 경헌(瓊軒)에 기대 섰네.
含情欲說宮中事 정 머금어 궁중 일을 말하고 싶지만은
鸚鵡前頭不敢言 앵무새 앞인지라 감히 말을 못하네.

 

주경여(朱慶餘)궁사(宮詞)이다. 꽃이 피는데도 적적(寂寂)’타 하여 이미 그녀가 군왕(君王)의 총애를 잃은 지 오래되었음을 보였다. 난간에 서 있는 것이 여럿이니 총애를 잃은 궁녀는 혼자만이 아닌 것이다. 아니 그녀들은 여태 총애를 한 번도 받아 보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청춘의 일렁이는 마음은 꽃과 마주 하여 원망의 넋두리를 한 없이 풀어 놓고 싶었다. 그러나 앵무새 앞인지라 두려워 감히 말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절묘하다. 글자마다 원망(怨望)이 서리어 있다.

 

寥落古行宮 宮花寂寞紅 퇴락한 옛 행궁 궁화(宮花)만 적막히 붉게 피었네.
白頭宮女在 閑坐說玄宗 흰 머리의 궁녀가 한가로이 앉아 현종(玄宗) 때를 말하네.

 

원진(元稹)행궁(行宮)이란 작품이다. 궁녀의 머리는 이미 하얗게 세었는데 궁화(宮花)는 올봄도 붉게 피었다. 행궁의 번화함을 더 이상 찾을 수 없듯이 그녀의 아름다움도 스러진 지 오래다. 적막한 것은 꽃이 아니다. 그녀의 마음이다. 그녀는 무료하게 앉아서 희미한 기억 속의 과거를 회상하고 있을 뿐이다. 시인은 흰머리의 궁녀가 있다고 하여, 행궁의 번화함은 이제 어디에도 없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제양(齊梁) 시기 이래로 궁녀의 생활과 정감을 제재로 한 궁사(宮詞)가 많이 창작되었다. 주된 내용은 군왕(君王)에게서 실총(失寵)한 후궁들의 원망과 하소연이다. 이래로 후대에 이르기까지 궁녀(宮女)들의 원한(怨恨)을 노래한 작품들이 계속 창작되었다.

 

당나라 때 왕건(王建)은 무려 1백수에 달하는 궁사(宮詞)를 지었는데, 그의 작품은 고사(古事)에 가탁하지 않고 일반에게 신비시되던 황궁(皇宮)의 일을 세세히 관찰하고 당시 후궁들의 실생활을 사실대로 적어 당시 사람들에게 큰 환영을 받았다. 그의 궁사(宮詞)연작은 당시 추밀사(樞密使) 왕수징(王守澄)에게서 직접 들은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그는 왕건(王建)과는 한 집안 사람으로 호형호제 하는 사이였다. 뒤에 왕건(王建)이 자신의 잘못을 풍자하자 왕수징(王守澄)은 노하여 아우가 지은 궁사(宮詞)는 궁궐 깊은 곳의 이야기인데 어떻게 이를 알았더란 말인가? 임금께 보고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자 왕건(王建)은 이틀 뒤 사죄하는 시를 올렸는데, 그 시의 끝 구절에 동성(同姓)이 직접 말해주지 않았다면, 외인(外人)이 구중(九重)의 일 어찌 알았으리오[不是姓同親說向, 九重爭得外人知].”라 하였으므로, 왕수징(王守澄)은 자신이 연루될까 두려워 이 일을 덮어두고 말았다. 어쨌든 왕건(王建)궁사(宮詞)는 사실에 바탕을 두었으므로 뒷날 당대 궁중의 풍속사를 연구하는 데는 희귀한 사료적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허균(許筠)1610(광해 2)에 벼슬에서 물러나 수표교에 있던 종의 집에서 요양하던 중, 종의 이모로 그 집에 얹혀 살던 76세의 은퇴한 궁인(宮人)을 만나 그녀에게서 궁중의 일을 이야기 듣고 마침내 왕건(王建)의 일을 본떠 궁사(宮詞)100수를 남겼다. 그녀는 선조대왕(宣祖大王)과 의인왕후(懿仁王后)의 성덕과 궁내(宮內)의 절목(節目) 및 여러 고사들을 자세하게 이야기해주었고, 허균(許筠)은 이를 시로 남겨 마침내 일대(一代)의 시사(詩史)를 이루었다. 이 가운데 세 수를 감상해 보자.

 

驅儺聲徹寢門深 나례(驅儺) 소리 침문 깊이 울려 퍼지고
鶴舞鷄毬鬧禁林 학무(鶴舞)와 포구락(抛毬樂)에 대궐이 떠나가네.
五色處容齊拂袖 다섯 빛깔 처용(處容)님은 소매를 떨치우고
妓行爭唱鳳凰吟 여기(女妓)는 앞다투어 봉황음(鳳凰吟)을 노래하네.

 

세모(歲暮)에 역귀(疫鬼)를 몰아내는 나례(儺禮) 광경을 묘사한 작품이다. 학무(鶴舞)에 포구락(抛毬樂)을 얹어 춤추고 노래하면, 뒤이어 오방처용(五方處容)이 색색의 옷을 입고 나와 처용무(處容舞)를 춘다. 다시 긴 춤사위가 한바탕 흐드러지게 휘몰아친 후 오색처용(五色處容)이 동서남북 중앙으로 갈라 자리를 잡으면 음악이 점차 빨라지면서 산하천리국(山河千里國)로 시작되는 봉황음(鳳凰吟) 가락이 울려 퍼지고 여기(女妓)는 낭랑한 청으로 노래를 부른다. 대개 나례(儺禮)의 의식절차나 의궤(儀軌) 및 정재(呈才)에 대해서는 이미 악학궤범(樂學軌範)에 상세하다. 위 시와 궤범(軌範)을 견주어 보면 조금의 차이도 발견되지 않는다.

 

紅巾假面着牛形 붉은 수건 가면에는 소 모양을 붙여놓고
鑼鼓喧闐茢掃庭 징북 소리 꽝꽝대며 갈대로 뜰을 쓰네.
萬戶一時驅鬼出 모든 집이 한꺼번에 귀신 몰아 내쫓고는
天王仙女帖門屛 천왕(天王)과 선녀(仙女) 얼굴 대문간에 붙여둔다.

 

이어지는 나례(儺禮)의 민속을 노래한 한 수이다. 붉은 가면에다 소 형상을 그려 붙이고 징과 북을 두들기며, 귀신을 쫓는데 영험이 있다는 복숭아 나뭇가지와 갈대 이삭으로 뜨락을 쓸어 집에서 역신(疫神)을 몰아내는 의식을 치른다. 그리고는 대문간에 천왕(天王)과 선녀(仙女)의 얼굴을 그려 붙여 놓고 역귀(疫鬼)가 다시는 얼씬도 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당시 궁궐과 여항에까지 미친 성대한 나례(儺禮)의 광경을 노래한 것인데, 오늘날에 보면 민속학 방면의 자료적 가치도 적지 않다.

 

銀臺投進疊封箋 은대(銀臺)에서 보고 올린 봉전(封箋)이 쌓였으니
知是官僚殿最年 벼슬아치 한 해 성적 고과(考課)함을 알겠구나.
直待上前開坼日 임금께서 열어 보는 그 날을 기다려서
解書宮女近床邊 글자 아는 궁녀가 어상(御床) 가까이 나아가네.

 

당시 인사고과의 제도를 엿볼 수 있는 시이다. 해마다 615일과 1215일이 되면 각 지방의 관찰사는 산하 수령의 근무성적을 평정 고과하여 중앙에 보고한다. 이때 가장 좋은 성적이 ()’이고 가장 낮은 성적이 (殿)’이 된다. 이 전최(殿最)는 경관(京官)에게도 시행하였다. 각처에서 평정한 전최지(殿最紙)는 밀봉되어 승정원을 거쳐 임금에게 주달되었다. 이 시를 보면 아마도 지방에서 고과한 서류가 올라오면 이를 개봉하지 않고 차곡차곡 쌓아 임금에게 올리고, 임금은 그 많은 서류를 일일이 볼 수 없었으므로 글자를 아는 궁녀가 어상(御床)에 나아가 이를 읽어 재가를 여쭈었던 듯하다. 허균(許筠)이 이 시를 지을 당시에야 미처 생각지 못하였겠지만, 그 시대의 충실한 기록은 이렇듯 뒷날 그 시대를 들여다보는 한 통로가 된다. 시가 세교(世敎)에 보탬이 된다 함은 그 내용의 감계(鑑戒)를 두고 이르는 말일 테지만, 이렇듯 시는 한 시대를 증언하는 비망록이 되기도 한다.

 

 

 

 

5. 사시(史詩), 역사로 쓴 시

 

 

祖舜宗堯自太平 요순(堯舜)을 본받으면 절로 태평하련만
秦皇何事苦蒼生 진시황(秦始皇)은 어찌하여 창생(蒼生)을 괴롭혔나.
不知禍起蕭墻內 재앙이 궁궐 안에서 일어날 줄 모르고
虛築防胡萬里城 헛되이 만리성(萬里城) 쌓아 오랑캐를 방비했네.

 

호증(胡曾)장성(長城)이란 작품이다. 아폴로 호가 달에 처음 착륙했을 때 감격한 우주비행사의 일성은 만리장성이 보입니다.”였다. 장성을 쌓은 벽돌을 모두 해체하여 적도를 따라 벽을 쌓으면 허리 높이로 지구를 한 바퀴 돌 수 있다고 하니, 과연 그 규모에 기가 질릴 뿐이다. 역사는 이 일을 이렇게 기록한다.

 

 

진시황(秦始皇) 32년 병술(B.C 215)이라. 시황(始皇)이 북쪽 변방을 순행하는데, 노생(盧生)이 바다에 들어갔다가 돌아와 녹도서(錄圖書)를 바쳤다. 거기에 쓰여 있기를, ‘()나라를 망하게 할 자는 호()이다라고 하였다. 시황(始皇)이 이에 몽염(蒙恬)을 파견하여 군대 30만 명을 출동시켜 북으로 흉노를 치고 하남(河南)의 땅을 거두어 44()을 만들고 장성(長城)을 쌓았는데, 지형을 인하여 험준한 요새로 제어하니 임조(臨洮)에서 시작하여 요동(遼東)에 이르기 길이가 만여 리였다.

 

 

통감(通鑑)의 한 대목이다. 녹도서(錄圖書)에서 망진자호야(亡秦者胡也)’라 예언한 것은 사실은 오랑캐 ()’를 가리킨 것이 아니라 진시황(秦始皇)의 둘째 아들 호해(胡亥)’를 두고 한 말이었다. 그러나 시황(始皇)은 만세토록 진() 나라의 왕업을 잇겠다고 방호(防胡)’를 위해 온 백성을 동원하여 만리장성을 쌓았다. 궁궐 안에서 재앙의 싹이 터나오는 것은 알지 못하고 그깟 만리장성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 했던 진시황(秦始皇)의 어리석음을 위 시는 신랄하게 꼬집고 있다.

 

또 두목(杜牧)아방궁부(阿房宮賦)를 지어 아방궁의 극에 달한 호사의 광경을 마치 직접 본 것처럼 노래하였다.

 

 

비빈후궁(妃嬪後宮)들과 왕자황손(王子皇孫)이 제 나라 궁궐에서 쫓겨나 진() 나라에 끌려오니, 아침에 노래하고 저녁에 비파 뜯어 진() 나라의 궁인(宮人)이 되었구나. 밝은 별빛 반짝임은 그녀들이 화장거울을 꺼냄이요, 초록 구름 뭉게뭉게 일어남은 그녀들이 새벽 머리를 손질함이다. 위수(渭水) 강물에 기름이 둥둥 뜸은 그녀들이 쓰고 버린 화장 기름이며, 안개가 자옥히 빗김은 초란(椒蘭) 향초(香草)를 사르는 연기이다. 벽력치는 소리에 깜짝 놀라니 임금을 태운 수레가 지나감이라. 덜커덩거리며 멀리서 들리다간 아득히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하니, 매일 화장 할 때마다 고운 자태 뽐내었건만, 우두커니 서서 먼 곳을 바라보며 은총 받기 바랬으나 얼굴도 보지 못한 것이 서른여섯 해로다.

妃嬪媵嬙, 王子皇孫, 辭樓下殿, 輦來于秦. 朝歌夜絃, 爲秦宮人. 明星熒熒開粧鏡也. 綠雲擾擾, 梳曉鬟也. 渭流漲膩, 棄脂水也. 煙斜霧橫, 焚椒蘭也. 雷霆乍驚, 宮車過也. 轆轆遠聽, 杳不知其所之也. 一肌一容, 盡態極姸. 縵立遠視, 而望幸焉. 有不得見者, 三十六年.

 

 

참으로 장한 붓이다. 호사스런 아방궁에는 6국에서 끌려온 아름다운 여인들이 이제나 저제나 진시황의 사랑을 한 번 받아 볼까 하여 오늘도 새벽부터 화장 거울 앞에 섰다. 일제히 펼쳐 든 거울빛이 공중에서 보면 마치 별빛처럼 곳곳에서 반짝인다. 어디선가 쿵쿵거리며 수레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오면, 그녀들은 혹시 오늘은하는 마음에 가슴이 콩콩거린다. 그러나 수레소리는 점차 멀어져가고, ‘오늘도하는 탄식에 날이 저문다. 그런 세월이 36년이라 했으니 그녀들의 꽃다움은 이제 어디가 찾을 것이랴. 두목(杜牧)은 다시 붓을 잇는다.

 

 

아아! 6국을 멸한 것은 6국이었지 진()나라가 아니었도다. ()나라를 멸한 것은 진()이었지 천하가 아니었도다. 슬프다. 6국이 제각기 그 백성을 사랑했더라면 진()나라를 막기에 충분하였으리라. ()나라가 다시 6국의 사람을 사랑하였더라면 3세를 이어 만세(萬世)에 이르도록 임금 노릇을 할 수 있었으리니, 누가 감히 진()나라를 멸할 수 있었으랴. ()나라 사람은 스스로를 슬퍼하기에 겨를치 못하여 뒷사람이 이를 슬퍼하였다. 뒷사람은 이를 슬퍼하였지만 이를 거울삼지 못하니, 또다시 뒷사람으로 하여금 뒷사람을 슬퍼하게 하는 도다.

嗚呼, 滅六國者 六國也. 非秦也. 族秦者秦也. 非天下也. 嗟夫, 使六國各愛其人, 則足以拒秦. 秦復愛六國之人, 則遞二世可至萬世而爲君. 誰得而族滅也. 秦人不暇自哀, 而後人哀之. 後人哀之, 而不鑑之, 亦使後人而復哀後人也.

 

 

역사는 다람쥐 쳇바퀴 돌듯 도는 것이다. 누가 역사의 교훈을 외면할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시인들은 지나간 시대의 역사의 거울에 현재를 비추어 보곤 한다. 예전 문집을 보면 으레 몇 수쯤의 영사시(詠史詩)가 실려 있다. 호당(湖堂)에서 공부하면서 월과(月課)의 주제를 역사상 인물로 정해 시 짓기 시합을 벌이기도 했다.

 

 

명나라 사람 정민정(程敏政)이 엮어 펴낸 영사절구(咏史絶句)는 우리나라에서도 출판되어 사대부의 애호를 받았다. 이 가운데 한 수를 더 읽어 보자. 이상은(李商隱)가생(賈生)이란 작품이다.

 

宣室求賢訪逐臣 선실(宣室)에서 어진이 찾다, 쫓은 신하 만나 보니
賈生才調更無倫 가생(賈生)의 재주는 겨룰 짝이 없었다네.
可憐夜半虛前席 슬프다 한밤중에 자리 당겨 앉았지만
不知蒼生問鬼神 백성의 일 돌보잖코 귀신의 일 물었구나.

 

가의(賈誼)는 한문제(漢文帝) 때의 신하였다. 20대의 젊은 나이로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나 대신의 미움을 사 장사왕(長沙王)의 태부(太傅)로 좌천되었다. 뒷날 문제(文帝)가 가의(賈誼)를 다시 불렀다. 이때 왕은 축복을 받느라고 선실(宣室)에 앉아 있었는데, 인하여 귀신(鬼神)의 일에 느낌이 있었으므로 가의(賈誼)에게 귀신(鬼神)에 대해 물었다. 가의가 귀신(鬼神)을 설명하는 동안 한밤중이 되었다. 문제(文帝)는 가의의 말에 빠져들어 자기도 모르게 앉아 있던 방석을 당겨 앞으로 바짝 다가앉았다. 시인은 문제(文帝)가 어진 이를 구하여 창생(蒼生) 구제의 일을 묻지 아니하고, 고작 일신의 복을 비는 귀신의 일을 물은 것이 안타까워 이 시를 지어 이때 일을 풍자한 것이다.

 

사시(史詩), 즉 영사시(詠史詩)는 역사적 사실을 테마로 해서 쓴 시이다. 차고조금(借古照今), 옛 것에서 빌려와 지금을 말하는 것은 한시의 오랜 관습이다. 시인들은 그저 맥없이 옛 일을 들추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과거 속에서 현재의 일을 바라보는 우회 통로를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 몇 수 가려 읽어본 시사(詩史)와 사시(史詩)들이 오늘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은 무엇일까. 어떤 치열한 역사의식도, 현실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저항정신도 시인이 먼저 흥분해 버리면 구호가 되고 만다. 자신의 흥분을 가라앉힐수록 역사와 현실은 더욱 돌올하게 독자의 뇌리에 각인되는 것이다. 80년대 그 숱한 민중시의 홍수는 시인의 흥분은 시를 대자보로 격하시킬 뿐이라는 교훈을 우리에게 남겨 주었다. 시의 정서는 이념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시에 산사야음(山寺夜吟)이란 작품이 있다.

 

蕭蕭落木聲 錯認爲疎雨 우수수 나뭇잎 지는 소리를 성근 빗소리로 잘못 알고서
呼僧出門看 月掛溪南樹 중 불러 문 나가 보라 했더니 시내 남쪽 나무에 달걸렸네요.

 

가을날 산사의 지붕 위로 사태가 되어 떨어지는 낙엽소리가 마치 빗소리 같길래 중에게 비 오나 보랬더니, 어렵쇼! 요 사미승 녀석의 대답이 걸작이다. “시내 남쪽 나무에 달이 걸려 있는데요.” 비는 무슨 비냐는 말씀이다. 동문서답 하는 속에 언외(言外)로 전해지는 흥취가 진진한 작품이다.

 

80년대 후반, 필자는 이 작품의 감상을 요구하는 것으로 시험문제를 낸 일이 있었다. 한 답안지에 일렀으되, “부르조아적 근성에 철저히 물든 정철(鄭澈)의 봉건 착취 계급으로서의 면모가 여실히 드러난 작품이다. 창밖의 일이 궁금하면 자기가 나가서 문을 열어보면 될 일인데, 그 쉬운 일조차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어 프로레탈리아 계층이라 할 수 있는 사미승을 부려 먹고 있는 것이다.”라 하였다. 철저한 역사의식(?)이 담긴 이 답안을 필자는 오래도록 잊을 수가 없다. 이런 의식 아래서 시는 더 이상 설 자리를 잃고 만다.

 

역사란 무엇인가? 현재의 퇴적일 뿐이다. 지금 시대의 자취를 일러 뒷사람은 옛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굳이 지나간 옛날에 얽매일 필요가 없겠다. 오늘, 바로 지금 여기에 충실하면 그것이 곧 옛날인 것이다. 시사(詩史)가 시인이 당대를 충실히 기록한 것이 뒷날의 역사로 자리매김 된 것이라면, 사시(史詩)는 오늘의 시인이 과거의 역사에 비추어 현재를 읽으려는 노력의 산물이다. 아무리 이제부터가 옛날이라고 해도 인간의 삶은 본질적으로 변한 것이 없다. 어제의 태양은 오늘도 그대로 뜬다. 해서 지나간 역사는 오늘을 비추는 등불이 된다.

 

전송암, 맹강녀묘(孟姜女廟), 20세기.

산해관 맹강녀묘에서 바라본 만리장성의 풍경이다. 가파른 능선을 따라 구불구불 이어진 인간의 탐욕이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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