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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한시미학, 23. 시와 역사: 시사와 사시 - 5. 사시, 역사로 쓴 시 본문

책/한시(漢詩)

한시미학, 23. 시와 역사: 시사와 사시 - 5. 사시, 역사로 쓴 시

건방진방랑자 2021. 12. 8. 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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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사시(史詩), 역사로 쓴 시

 

 

祖舜宗堯自太平 요순(堯舜)을 본받으면 절로 태평하련만
秦皇何事苦蒼生 진시황(秦始皇)은 어찌하여 창생(蒼生)을 괴롭혔나.
不知禍起蕭墻內 재앙이 궁궐 안에서 일어날 줄 모르고
虛築防胡萬里城 헛되이 만리성(萬里城) 쌓아 오랑캐를 방비했네.

 

호증(胡曾)장성(長城)이란 작품이다. 아폴로 호가 달에 처음 착륙했을 때 감격한 우주비행사의 일성은 만리장성이 보입니다.”였다. 장성을 쌓은 벽돌을 모두 해체하여 적도를 따라 벽을 쌓으면 허리 높이로 지구를 한 바퀴 돌 수 있다고 하니, 과연 그 규모에 기가 질릴 뿐이다. 역사는 이 일을 이렇게 기록한다.

 

 

진시황(秦始皇) 32년 병술(B.C 215)이라. 시황(始皇)이 북쪽 변방을 순행하는데, 노생(盧生)이 바다에 들어갔다가 돌아와 녹도서(錄圖書)를 바쳤다. 거기에 쓰여 있기를, ‘()나라를 망하게 할 자는 호()이다라고 하였다. 시황(始皇)이 이에 몽염(蒙恬)을 파견하여 군대 30만 명을 출동시켜 북으로 흉노를 치고 하남(河南)의 땅을 거두어 44()을 만들고 장성(長城)을 쌓았는데, 지형을 인하여 험준한 요새로 제어하니 임조(臨洮)에서 시작하여 요동(遼東)에 이르기 길이가 만여 리였다.

 

 

통감(通鑑)의 한 대목이다. 녹도서(錄圖書)에서 망진자호야(亡秦者胡也)’라 예언한 것은 사실은 오랑캐 ()’를 가리킨 것이 아니라 진시황(秦始皇)의 둘째 아들 호해(胡亥)’를 두고 한 말이었다. 그러나 시황(始皇)은 만세토록 진() 나라의 왕업을 잇겠다고 방호(防胡)’를 위해 온 백성을 동원하여 만리장성을 쌓았다. 궁궐 안에서 재앙의 싹이 터나오는 것은 알지 못하고 그깟 만리장성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 했던 진시황(秦始皇)의 어리석음을 위 시는 신랄하게 꼬집고 있다.

 

또 두목(杜牧)아방궁부(阿房宮賦)를 지어 아방궁의 극에 달한 호사의 광경을 마치 직접 본 것처럼 노래하였다.

 

 

비빈후궁(妃嬪後宮)들과 왕자황손(王子皇孫)이 제 나라 궁궐에서 쫓겨나 진() 나라에 끌려오니, 아침에 노래하고 저녁에 비파 뜯어 진() 나라의 궁인(宮人)이 되었구나. 밝은 별빛 반짝임은 그녀들이 화장거울을 꺼냄이요, 초록 구름 뭉게뭉게 일어남은 그녀들이 새벽 머리를 손질함이다. 위수(渭水) 강물에 기름이 둥둥 뜸은 그녀들이 쓰고 버린 화장 기름이며, 안개가 자옥히 빗김은 초란(椒蘭) 향초(香草)를 사르는 연기이다. 벽력치는 소리에 깜짝 놀라니 임금을 태운 수레가 지나감이라. 덜커덩거리며 멀리서 들리다간 아득히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하니, 매일 화장 할 때마다 고운 자태 뽐내었건만, 우두커니 서서 먼 곳을 바라보며 은총 받기 바랬으나 얼굴도 보지 못한 것이 서른여섯 해로다.

妃嬪媵嬙, 王子皇孫, 辭樓下殿, 輦來于秦. 朝歌夜絃, 爲秦宮人. 明星熒熒開粧鏡也. 綠雲擾擾, 梳曉鬟也. 渭流漲膩, 棄脂水也. 煙斜霧橫, 焚椒蘭也. 雷霆乍驚, 宮車過也. 轆轆遠聽, 杳不知其所之也. 一肌一容, 盡態極姸. 縵立遠視, 而望幸焉. 有不得見者, 三十六年.

 

 

참으로 장한 붓이다. 호사스런 아방궁에는 6국에서 끌려온 아름다운 여인들이 이제나 저제나 진시황의 사랑을 한 번 받아 볼까 하여 오늘도 새벽부터 화장 거울 앞에 섰다. 일제히 펼쳐 든 거울빛이 공중에서 보면 마치 별빛처럼 곳곳에서 반짝인다. 어디선가 쿵쿵거리며 수레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오면, 그녀들은 혹시 오늘은하는 마음에 가슴이 콩콩거린다. 그러나 수레소리는 점차 멀어져가고, ‘오늘도하는 탄식에 날이 저문다. 그런 세월이 36년이라 했으니 그녀들의 꽃다움은 이제 어디가 찾을 것이랴. 두목(杜牧)은 다시 붓을 잇는다.

 

 

아아! 6국을 멸한 것은 6국이었지 진()나라가 아니었도다. ()나라를 멸한 것은 진()이었지 천하가 아니었도다. 슬프다. 6국이 제각기 그 백성을 사랑했더라면 진()나라를 막기에 충분하였으리라. ()나라가 다시 6국의 사람을 사랑하였더라면 3세를 이어 만세(萬世)에 이르도록 임금 노릇을 할 수 있었으리니, 누가 감히 진()나라를 멸할 수 있었으랴. ()나라 사람은 스스로를 슬퍼하기에 겨를치 못하여 뒷사람이 이를 슬퍼하였다. 뒷사람은 이를 슬퍼하였지만 이를 거울삼지 못하니, 또다시 뒷사람으로 하여금 뒷사람을 슬퍼하게 하는 도다.

嗚呼, 滅六國者 六國也. 非秦也. 族秦者秦也. 非天下也. 嗟夫, 使六國各愛其人, 則足以拒秦. 秦復愛六國之人, 則遞二世可至萬世而爲君. 誰得而族滅也. 秦人不暇自哀, 而後人哀之. 後人哀之, 而不鑑之, 亦使後人而復哀後人也.

 

 

역사는 다람쥐 쳇바퀴 돌듯 도는 것이다. 누가 역사의 교훈을 외면할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시인들은 지나간 시대의 역사의 거울에 현재를 비추어 보곤 한다. 예전 문집을 보면 으레 몇 수쯤의 영사시(詠史詩)가 실려 있다. 호당(湖堂)에서 공부하면서 월과(月課)의 주제를 역사상 인물로 정해 시 짓기 시합을 벌이기도 했다.

 

 

명나라 사람 정민정(程敏政)이 엮어 펴낸 영사절구(咏史絶句)는 우리나라에서도 출판되어 사대부의 애호를 받았다. 이 가운데 한 수를 더 읽어 보자. 이상은(李商隱)가생(賈生)이란 작품이다.

 

宣室求賢訪逐臣 선실(宣室)에서 어진이 찾다, 쫓은 신하 만나 보니
賈生才調更無倫 가생(賈生)의 재주는 겨룰 짝이 없었다네.
可憐夜半虛前席 슬프다 한밤중에 자리 당겨 앉았지만
不知蒼生問鬼神 백성의 일 돌보잖코 귀신의 일 물었구나.

 

가의(賈誼)는 한문제(漢文帝) 때의 신하였다. 20대의 젊은 나이로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나 대신의 미움을 사 장사왕(長沙王)의 태부(太傅)로 좌천되었다. 뒷날 문제(文帝)가 가의(賈誼)를 다시 불렀다. 이때 왕은 축복을 받느라고 선실(宣室)에 앉아 있었는데, 인하여 귀신(鬼神)의 일에 느낌이 있었으므로 가의(賈誼)에게 귀신(鬼神)에 대해 물었다. 가의가 귀신(鬼神)을 설명하는 동안 한밤중이 되었다. 문제(文帝)는 가의의 말에 빠져들어 자기도 모르게 앉아 있던 방석을 당겨 앞으로 바짝 다가앉았다. 시인은 문제(文帝)가 어진 이를 구하여 창생(蒼生) 구제의 일을 묻지 아니하고, 고작 일신의 복을 비는 귀신의 일을 물은 것이 안타까워 이 시를 지어 이때 일을 풍자한 것이다.

 

사시(史詩), 즉 영사시(詠史詩)는 역사적 사실을 테마로 해서 쓴 시이다. 차고조금(借古照今), 옛 것에서 빌려와 지금을 말하는 것은 한시의 오랜 관습이다. 시인들은 그저 맥없이 옛 일을 들추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과거 속에서 현재의 일을 바라보는 우회 통로를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 몇 수 가려 읽어본 시사(詩史)와 사시(史詩)들이 오늘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은 무엇일까. 어떤 치열한 역사의식도, 현실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저항정신도 시인이 먼저 흥분해 버리면 구호가 되고 만다. 자신의 흥분을 가라앉힐수록 역사와 현실은 더욱 돌올하게 독자의 뇌리에 각인되는 것이다. 80년대 그 숱한 민중시의 홍수는 시인의 흥분은 시를 대자보로 격하시킬 뿐이라는 교훈을 우리에게 남겨 주었다. 시의 정서는 이념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시에 산사야음(山寺夜吟)이란 작품이 있다.

 

蕭蕭落木聲 錯認爲疎雨 우수수 나뭇잎 지는 소리를 성근 빗소리로 잘못 알고서
呼僧出門看 月掛溪南樹 중 불러 문 나가 보라 했더니 시내 남쪽 나무에 달걸렸네요.

 

가을날 산사의 지붕 위로 사태가 되어 떨어지는 낙엽소리가 마치 빗소리 같길래 중에게 비 오나 보랬더니, 어렵쇼! 요 사미승 녀석의 대답이 걸작이다. “시내 남쪽 나무에 달이 걸려 있는데요.” 비는 무슨 비냐는 말씀이다. 동문서답 하는 속에 언외(言外)로 전해지는 흥취가 진진한 작품이다.

 

80년대 후반, 필자는 이 작품의 감상을 요구하는 것으로 시험문제를 낸 일이 있었다. 한 답안지에 일렀으되, “부르조아적 근성에 철저히 물든 정철(鄭澈)의 봉건 착취 계급으로서의 면모가 여실히 드러난 작품이다. 창밖의 일이 궁금하면 자기가 나가서 문을 열어보면 될 일인데, 그 쉬운 일조차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어 프로레탈리아 계층이라 할 수 있는 사미승을 부려 먹고 있는 것이다.”라 하였다. 철저한 역사의식(?)이 담긴 이 답안을 필자는 오래도록 잊을 수가 없다. 이런 의식 아래서 시는 더 이상 설 자리를 잃고 만다.

 

역사란 무엇인가? 현재의 퇴적일 뿐이다. 지금 시대의 자취를 일러 뒷사람은 옛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굳이 지나간 옛날에 얽매일 필요가 없겠다. 오늘, 바로 지금 여기에 충실하면 그것이 곧 옛날인 것이다. 시사(詩史)가 시인이 당대를 충실히 기록한 것이 뒷날의 역사로 자리매김 된 것이라면, 사시(史詩)는 오늘의 시인이 과거의 역사에 비추어 현재를 읽으려는 노력의 산물이다. 아무리 이제부터가 옛날이라고 해도 인간의 삶은 본질적으로 변한 것이 없다. 어제의 태양은 오늘도 그대로 뜬다. 해서 지나간 역사는 오늘을 비추는 등불이 된다.

 

전송암, 맹강녀묘(孟姜女廟), 20세기.

산해관 맹강녀묘에서 바라본 만리장성의 풍경이다. 가파른 능선을 따라 구불구불 이어진 인간의 탐욕이 슬프다.

 

 

 

인용

목차

1. 할아버지와 손자

2. 시로 쓴 역사, 시사(詩史)

3. 변새(邊塞)의 풍광(風光)

4. 궁사(宮詞), 한숨으로 짠 역사

5. 사시(史詩), 역사로 쓴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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