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온 제비를 읊다
영신연(永新燕)
이식(李植)
萬事悠悠一笑揮 草堂春雨掩松扉
生憎簾外新歸燕 似向閑人說是非 『澤堂先生集』 卷之一
해석
萬事悠悠一笑揮 만사유유일소휘 | 만사 유유히 한 웃음으로 떨쳐내고 |
草堂春雨掩松扉 초당춘우엄송비 | 초당의 봄비에 소나무 사립문 닫았네. |
生憎簾外新歸燕 생증렴외신귀연 | 발 밖으로 새 제비가 오는 걸 싫어하는 건 |
似向閑人說是非 사향한인설시비 | 한가로운 사람에게 시비를 말하려는 듯해서지. 『澤堂先生集』 卷之一 |
해설
이 시는 여강(驪江)에 살다가 칠서(七庶)의 옥사(獄事)에 휘말릴까 염려하여 서울로 들어갔다가 부친상을 당하고 부친의 삼년상을 마친 33세에 새로 돌아온 제비를 노래한 것이다.
잡다한 세상만사는 그저 한바탕 웃음거리일 뿐이라, 초당의 사립문을 닫으니 봄비가 촉촉이 내린다. 주렴 밖에 새로 돌아온 제비를 미워하는 것은 일 없는 나를 보고 시비를 걸기 때문이다.
송시열(宋時烈)이 쓴 「택당집서(澤堂集序)」에 이식(李植)의 학문과 간략한 행적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우리나라가 문헌(文獻)이 성하기로는 본조(本朝)가 가장 으뜸이었다. 굉유(宏儒)와 석사(碩士)가 연달아 나왔고, 그들의 편장(篇章)과 사명(辭命, 국제간에 往復한 문서)이 모두 간행(刊行) 전포(傳布)되었으니, 모두를 합해 놓고 헤아려 보면 한우충동(汗牛充棟)에 이를 것이다. 그러나 그중에 의리(義理)가 정밀하고 논의가 정당해서 사문(斯文)의 우익이 될 만하고 세도(世道)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을 구하려 한다면 택당공의 문고(文稿)가 가장 훌륭할 것이다. 대체로 듣건대, 공은 어려서부터 사서(四書)ㆍ육경(六經)과 『이정전서(二程全書)』ㆍ『주자전서(朱子全書)』ㆍ『성리대전(性理大全)』 등의 글에 전심하였고, 여가에는 제가서(諸家書)를 남김없이 박람(博覽)하였다. 그러나 공이 만년에 가장 주(主)로 삼은 것은 또 『주자어류(朱子語類)』에 있었다. 그리하여 그 속에 들어가서 정력(精力)을 다하여 주자의 깊은 경지를 모조리 알고야 말았다. 이것이 이미 자신의 권형(權衡)과 척도(尺度)가 되어 버렸기 때문에 아무리 군서(群書)를 박람하였지만, 선택하는 것이 정밀하고 변석하는 것이 자상하여, 그 드러난 문장이 모두가 의리의 실상이어서 문사(文詞)나 아름답게 꾸미는 자들의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이것이 바로 그의 평생 동안 공부한 실지와 성공한 실지이다. …… 공에게는 또한 더 훌륭한 일이 있다. 공은 항상 국사(國史)의 잘못된 것을 걱정하였다. 당론(黨論)이 있어온 이래로 사필(史筆)을 쥔 자들이 각기 제 맘대로 하여 4, 50년 동안에 공정한 시비(是非)가 없었는데, 끝내는 기자헌(奇自獻)ㆍ이이첨(李爾瞻)이 남몰래 이전 기록을 깎아 버리고 제멋대로 거짓말을 써넣음으로써 더욱이 차마 말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공은 또한 스스로 ‘나를 알아주거나 나무랄 일이 여기에 있다.’고 여기고는, 선조(宣祖) 초년부터 시작하여, 빗질하듯 하나하나 씻어 내고 보충하고 산삭(刪削)하여 일과 말을 확실하게 사실대로 정리해 놓으니, 그 공정(公正)하기가 귀신에게 질정할 만하다. 대체로 공은 당론(黨論)이 일어난 이후에 태어나서 항상 『주역(周易)』 「대과(大過)」 괘(卦)에서 말한 ‘홀로 우뚝 서서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필삭(筆削, 쓸 만한 것은 쓰고 삭제할 것은 삭제함)할 때에 털끝만큼의 편파적인 말도 없었으니, 이야말로 공이 이 세상에 가장 공(功)을 남긴 것이다. 그러나 이치가 밝고 마음이 공변된 군자가 아니면 그 누가 공을 알아주겠는가[我東文獻之盛 莫如本朝 宏儒碩士 步武相接 其篇章辭命 皆登梓傳布 總而計之 則將至於充棟宇汗牛馬矣 然求其義理之精 論議之正 可以羽翼斯文 裨補世道者 則未有若澤堂公文稿者也 蓋聞公自幼 專意於四子六經程朱全書性理大全等書 以其餘暇 泛濫諸家 博極無餘 然晩年所主 又在於朱子語類 入其中而盡其精力 悉見其宗廟之美百官之富 此旣爲在我之權衡尺度 故雖博極泛濫 而擇之也精 辨之也詳 而其發爲文章者 無非義理之實 而非藻繪纂組者之可比也 此其平生用功之地與收功之實也 余又嘗遍觀其全袠 而其示兒一編 尤信其源委之有在矣 公季子端夏季周猥以事契相從矣 余問此稿何不剞劂而行於世耶 曰噫 此遺戒也 先人嘗自以爲不滿於意 而不足以傳世而示後也 故使之不出巾笥 但爲子孫之守而已 余曰此亦可以知公者也 夫人不見其全體大致 則得其一端 沾沾自足 便謂其如此而止已 此如暗中手摸箕杵爲象 是可哀已 今公旣於朱子書 涉其流而游其波 則眞所謂觀於海者也 是以其識見愈大 體驗愈深 而其意則愈謙 其可以知公者 實在於此矣 然程朱以後義理大明 大而天地高深 微而蠶牛絲毛 無不闡發 則詖辭異說 亦可以止矣 而自皇朝以後 如陽明,白沙輩蜂起鼃鳴 各自眩售 故書益多而理益晦 雖洪水懷襄 而其害蔑以加矣 然則公之議論文章 其可以終不傳於今與後歟 遂編摩成袠 總三十四編 其詩文十編 續集詩四編 則竝公所自選 而略有精粗之別者也 又詩二編則丁丑後所作 而文谷金相公壽恒所選也 別集文十八編 卽余就餘裔而所續選者也 抑公有大焉者 公嘗病國史自有黨論以來 載筆者各任己私 四五十年之間 無公是非 而卒之奇自獻,李爾瞻陰削舊錄 肆加誣筆 則尤有所不忍言者矣 公於仁祖朝上箚 請加整理 朝廷遂以屬公 公亦自以爲知罪在此 起自宣廟之初年 梳洗要删 事核而辭實 大公至正 可質神鬼 蓋公生於黨論之後 常以大過之獨立不懼存心 故筆削之際 無一毫偏陂之辭 此公之最有功於斯世者 然非理明心公之君子 孰能知之].”
이 외에도 홍만종(洪萬宗)은 『소화시평(小華詩評)』 권하 65에 그의 어릴 적 시와 유정(惟政)에게 준 시를 게재(揭載)하고 있다.
“택당 이식이 10살 때 「버들솜」을 읊어 ‘눈같이 가벼이 바람에 따르고, 솜보다 부드럽게 대지에 붙어 있네.’라 했는데, 이 시를 본 사람이 기이하게 여겼다. 임진왜란 후 왜적이 우리나라에다 통신사를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다. 우리나라 사람은 모두 왜인들에 대한 분통을 내고 억울하게 생각하고 있었으나, 조정에서는 저들이 트집을 잡을까 걱정하여 유정 스님을 보내 적의 정세를 살피게 하였다. 이에 유정은 여러 사대부의 집을 두루 돌아다니며 이별의 시문을 구하였다. 택당은 당시 아직 벼슬하지 않았는데, 유정에게 시를 선사하였다【「송송운승장사일본(送松雲僧將使日本)」으로 송설(松雪)은 임진왜란 때의 승병장 유정(惟政)의 호이다. 선조(宣祖) 37년(1604) 국서(國書)를 지니고 일본에 건너가 강화(講和)를 맺고 우리나라 포로 3천5백 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왜적 제압할 좋은 계책 도시 없어, 출세간(出世間)의 노스님을 일으켜 세웠구려. 행장 꾸려 먼 바다 급히 건너가는 몸, 철석간장(鐵石肝腸) 하늘도 이미 알고말고요. 삼선의 혀 한 번만 놀리면 그만일걸【높은 선정(禪定)의 힘을 발휘해 몇 마디 말만 하면 심복(心服)시킬 수 있으리라는 뜻이다. 삼선(三禪)은 이른바 운문선사(雲門禪師)가 대중을 교화한 삼자선(三字禪)으로, 顧(나를 돌아봄), 鑑(남을 비춰 봄), 咦(일체를 초월하여 自適함)를 말한다】. 수고스레 육출기계(六出奇計, 陳平이 漢 高祖를 위해 여섯 차례나 내놓은 기막힌 계책을 말한다)쓸 것이 뭐 있겠소. 돌아와서 임금님께 보고한 뒤에, 예전대로 지팡이 짚고 산으로 돌아가리.’ 유정도 시에 능한 분이었는데, 이 시를 보고 ‘이 시를 얻었으니, 나의 여행길이 외롭지 않을 것이다.’라고 기뻐하였다[李澤堂植十歲時詠 柳絮曰 隨風輕似雪 着地軟於綿 見者奇之 王辰後倭奴來請信使 人皆憤惋 而朝廷恐其生釁 遣釋惟政 往試賊情 惟政遍求別章于縉紳間 澤堂未釋褐時 亦贈詩曰 制敵無長算 雲林起老師 行裝冲海遠 肝膽許天知 試掉三禪舌 何煩六出奇 歸來報明主 依舊一笻枝 惟政亦能詩 見詩喜曰 得此而吾行不孤矣].”
원주용, 『조선시대 한시 읽기』 하, 이담, 2010년, 201~204쪽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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